금각사 - 상상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 
 
 
 
 
노지훈 병장님의 후기를 읽고 본 책입니다. 읽는 내내 여러가지 의문들이 머리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했습니다. 미학,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제가 이렇다 저렇다 써도 될지, 제가 내린 결론들이 치명적인 오독의 결과는 아닐지 의심이 들지만 어쨌든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미시마가 다자이에 대해 라디오 체조와 규칙적인 생활으로 구원될 수 있었다는 평가를 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다자이에게 예수 믿었으면 자살 안했을 거라고 할 것이고, 경제학자라면 정부의 올바른 경제정책(다자이가 세금고지서를 받아들고 엄청난 액수에 좌절해 꺼이꺼이 통곡했다고 합디다)이 다자이를 생활난에서 구했을 거라고 할 것이고, 의학자라면 의학의 발전이 다자이를 여러가지 지병에서 구출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할 것이니, 미시마의 평은 보디빌딩에 심취한 운동중독자의 참견 + 라이벌 인기작가에 대한 질투 정도 밖에 안 보입니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일단 간단히 내용부터 정리하겠습니다. 말더듬이로 태어난 승려의 아들(일본 불교의 승려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가족이 있습니다.)이 금각사라는 절에 보내져 자라나지만 젊은 시절의 어두운 고뇌를 극복하기 위해 금각사에 불을 지른다는 내용입니다. 간단하죠?

주인공은 금각사에 불을 지른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금각사가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행복이나 쾌락으로 내가 화신을 하려고 하면, 금각은 단 한 번이라도 묵인해 준적이 있는가? 곧바로 내 화신을 가로막고, 나를 내 자신으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것이 금각의 수법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왜 금각사가 그를 막았을까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금각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그는 아침햇살이나 저녁의 석양같은 세상의 다른 아름다움들을 금각사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금각사는 그에게 아름다움의 원형, 이데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각사가 그를 '반드시' 가로막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금각사는 그에게 어떤 힘이 되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여자와 섹스를 하려 할 때 금각사가 머리속에 떠올라 발기할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금각사는 그에게 반대로 정력을 강화시켜 주는 우상이 되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맘에 안드는 파트너와 섹스하면서 이상적인 미인을 떠올리듯이 말이죠. 허구헌 날 금각사가 아름답다고 주워섬기던 그가 금각사 때문에 무력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본 금각사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와 자신의 상상속의 금각사에 비해, 현실 속의 금각사는 [낡고 거무튀튀한 3층 건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몽상을 통해 현실의 금각사를 몽상속의 금각사에 끼워맞추며 금각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윽고 금각사에 보내진 그는 전쟁을 통해 금각사가 사라졌으면 하고 소망합니다. 만일 금각사가 공습을 받아 잿더미가 된다면 그는 금각사를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상상속에서 아름답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각사는 전쟁은 끝나고 계속 존재합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금각사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세뇌시켰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뇌는 단단히 굳어져 그는 현실의 금각사를 보며 상상속의 금각사와 조화시키며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낡고 거무튀튀한 금각사, 실망스런 금각사의 기억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결국 여자와 섹스를 하려 들자 머리속에 떠오른 금각사는 허무, 거부, 소외의 아이콘이 되어 그를 발기 불능으로 만듭니다.

견디다 못한 그가 금각사를 불태우기 얼마전, 친구인 가시와기와 대화를 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이 '인식'이냐 '행위'이냐 입니다. 가시와기는 인식이라고 주장하고, 그는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여기에서 그가 가시와기에게 설득당했다면, 그는 금각사를 무력함의 근원으로 인식하기를 그만두거나, 금각사를 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행위'을 주장했고, 그래서 과거에 소망했듯 금각사를 현실에서 제거하여 이데아의 세계, 저세상으로 보내어 - 간단히 말해 불태워서 - 상상속의 금각사만 남기려 합니다. 아니면 금각사를 완전히 버리기 위해 불태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러가지로 볼 때 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어린 시절을 상기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 말더듬이듯이 저도 혀짧은 발음으로 소외되었고 몸도 여러가지로 약했습니다. 그가 금각사에 몰두하듯 저는 종교에 몰두했습니다. 매일밤 묵주기도를 하기도 했고 고3때도 성당에 매주 꼬박꼬박 나갔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이전에 모르던 세상을 알게 되면서 종교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금각사를 불태우는 주인공을 따라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금각사는 현실에 존재했기에 불태울수 있었지만 신은 이미 죽어서 저세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식을 달리해서 신앙의 상당부분을 바꾸어 절반은 이신론자, 절반은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의 영향으로, 저는 '금각사'를 어린 시절의 이상과 우상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성장소설로 읽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오독, 오해, 곡해라 할 지라도 나름대로의 자아 고백으로 받아들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덧. 다자이가 인간실격의 주인공과 동일시된다면 미시마와 금각사의 주인공은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같아 보입니다. 미시마 자신이 다자이에 대해 '돈키호테를 쓰기 위해 돈키호테가 되어버렸다'고 평한것 같은데, 오히려 미시마는 '돈키호테를 쓰고 나서 산초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금각사를 불태우고 새롭게 살려고 했지만 미시마는 군국주의를 일깨우고 할복자살해 버렸으니.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5-08 16:00) 

  
 
 
 
 병장 노지훈 (2006/04/13 03:49:07)

첫머리에 제 이름이 나오니 쑥스럽군요.(땀)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독서후기랍시고 써서 다른 분께 오독의 여지를 남기는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기범님의 후기 감사드립니다. (웃음) 
글 잘 읽었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13 07:05:45)

볼까말까 고민하고 있는 도서중에 하나인데, 봐야겠네요. 독서후기 잘 감상했습니다.    
 
 
상병 엄보운 (2006/04/13 09:26:48)

'전공투'가 한창일 때 미시마가 동경대 집회중인 대강당으로 들어가 몇 시간에 걸친 토론을 펼친 기록이 얼마 전에 책으로 나왔다고 들었는데, 혹시 읽으신 분 계실까 모르겠네요. 금각사 저도 보고싶어요.    
 
 
병장 김강록 (2006/04/13 09:42:14)

지훈님 때문에 그 책 보고잡은 사람 여기 또 있습니다. 

보운 / 당시 동경대 학생들에게는 근대 일본에 대한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위기, 마음에 듭니다.    
 
 
일병 이건룡 (2006/04/13 13:09:30)

잘읽었습니다. 전 이와이 지 감독의 성자옹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비극이 될수 밖에 없는 이유를 비교하면서 읽어 보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답을 내지 못해서.... 찬미 혹은 숭고한 존재에 대한 갈등과 현실과의 부조화에서 오는(이렇게 일축해도 되나 모르겠군요) 붕괴.....너무 과대 망상 적이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