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글쟁이의 자기기만  
병장 박원익  [Homepage]  2009-10-11 10:49:38, 조회: 191, 추천:0 

[이 글은 일전에 김예찬님이 올렸던 '책임감을 위하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라고 소개하겠습니다.]


그 동안 제가 모종의 '권위자'로 주목을 받아온 것 같아서 기분이 답답합니다. 준우님의 말을 따라 저도 한 번 항변을 해 볼까요? 여러분은 저를 아십니까? 제가 여기서 쓰는 글을 가지고 대단하게 알아주는 사람이 현실의 오프라인에서 단 한 명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권위'라는 글을 가지고 실제로 그 단어에 담긴 진지함만큼 누군가를 대하셨습니까? 도대체 권위라는 말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권위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행해진 것 같다는 인상에 벌써 입맛이 씁니다. 초반부터 너무 거칠어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뭔가를 쓰고 있기 때문에 부여되는 어떤 권위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상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역으로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쓰려는 어떤 욕망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글로 쓴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제가 글에 관해서 느끼고 있는 고통도 바로 그런 것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와 관해서는 책마을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자기만족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뜨거운' 순간에 박수를 치자니요? 농담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어찌 쉽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책마을에서 벌어졌던 권위논쟁 이면에는 이와 비슷한 자기만족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치열한 경험과 삶의 체험에서 우러러나온 어떤 아이디어라 해도, 무엇이든지 일단 글로 써 보고 나면 그것이 완벽하게 '관념화/이상화'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분이 몇몇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당장 관찰가능한 수준에서 목격되는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막상 쓰고 나면 별 게 아닌 일반화된 통속적 견해로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글을 쓸 때 가장 경계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것이지요. 흔히들 소설가나 비평가에 대해 부여하는 권위는 대개 그들이 '언어의 마술사'라는 타이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흥미롭지 않은 어떤 통속성을 흥미롭게 포장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결국 그들들을 대중이 사랑/존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랑/존경하는 건 그들이 거짓말-사기를 치는 부분이고, 그런 결점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결점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게 만들기 위함이지요. '전이'라는 것에 함축된 것은 이러한 거대한 기만입니다. 다시 말해 책마을에서 이야기되는, 특정인들에게 한정되는 '권위'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과대평가 하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책마을은 '글'을 사랑하는, 말하자면 글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페티쉬'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생각이 깊거나 아니면 근본적인 사고에 더 가깝다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제가 글쟁이들의 '자기기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결국 글쟁이들이 직조한 텍스트를 가지고서 결국 그 텍스트로는 대체할 수 없는 대체되어서도 안되는 사고를 '절약'하는 바로 그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도, 결국 자기기만에 능한 능력자들이라는 뜻이지요. 이에 반해 왜 사람들은 '흥미롭지 않은 현실/아이디어를 흥미롭게' 서술하며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은 현실을 흥미롭지 않은 그대로, 치열하게 포착해내려는' 글쓰기가 더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싶습니다.  


  사실을 글을 쓴다는 것에 수반되는 '쾌감'이 무엇인지를 알면 거기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듭니다. 책마을 중독현상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일텐데요. 그런데 이 쾌감의 정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부유하는 사고의 편린들을 일단 글로 적어두고 형식화하다보면 그것이 이전부터 그랬다는 듯, 그럴듯한 정합성을 띠게 되고, 마침내 그것이 타인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오기 때문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것'으로 귀속되는 환각에 가끕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텍스트 이면에 나의 사고라는 건 별 게 아니며 심지어 그러한 사고과정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다는 게 맞지요. 대신 텍스트가 저 대신 사고를 하며, 말을 한달까요. 내가 처음에 무슨 문제의식으로 글을 쓰고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것이 결국 어쨌든 타인들이 알아서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며, 자동적으로 서로 이심전심의 상태가 되는 그런 즐거움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저는 이런 가공할만한 도착적 과정에 매혹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며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연, '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저항해야할 유혹이지요.  


  무엇보다 이러한 유혹에 굴복했다는 징후는, 곧 우리가 어렵사리 마련한 공론장을 어떻게 전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모습에서 전적으로 드러납니다. 책마을을 포함해서 오늘날 공론장에 만연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입니다. 이것은 부르주아-의회민주주의나, 주식회사의 모델과 유사한데요. 그러니까 이것은 너도 옳은 구석이 있고, 나도 옳은 구석이 있으며 결국 저마다 다 옳은 구석이 있으니, 서로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도 그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식회사에서 주주들이 저마다 가진 지분에 대한 권리가 있듯이, 저마다 '진리'에의 어떤 지분을 가지고 있고 그 지분에 따라 주주총회에서 발언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분들을 합치면 바야흐로 회사, 나아가 전 세계를 사들일 막강한 담론적 권력/권위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이러한 상대주의의 허구성을 최초로 폭로하지요. 그가 의식은 단지 자신에 대해서만 의식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의식이어야 진정한 자기의식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서로 간의 '상호인정'에서 저마다 자기의식으로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게 곧바로 드러나서 주인과 노예의 투쟁으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말해 헤겔은 '상대주의'라는 게 저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인 어떤 진리에의 지분에 기초하기는커녕, 단지 '상호인정'이라는 허약한 기반에 기초한 이상, 그것이 실제로는 각자 개인의 상대적 진리의 총합으로 수렴되기는커녕 오히려 총체적인 비진리 즉 오류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을 말한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 옳은 구석이 있다고만 말할 때, 정말로 우리 각자가 옳은 것에 대해 뭔가를 진지하게 의식하고 소유하고 있다기보다는, 담론적인 층위에서 상대와의 치열한 '눈치작전'(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저는 오히려 '내 생각도 맞고, 네 생각도 맞다'는 말을 뒤집어, '내 생각도 틀리고, 네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더 나아가 '너나 나나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가장 현실적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더 겸허한 상대주의의 새로운 판본으로 이행해가자는 제안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대적 '진리'라는 게 없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 그것은 우리 모두를 틀리게 할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뭐라 글로 떠들든 간에 근본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간극과 모순의 편에 자리잡고 있지요. 그렇다면 '글'을 통해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단지 담론적인 게임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글'을 통해 책임을 져야하는 부분이 있다는 누군가의 제안이 큰 울리을 가지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책임이라는 건, 단순히 아무 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로 빠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지요. 다시 말해 치열하게 글을 쓰고 토론하고 격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지금 젊은 순간에 단지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글을 쓰고 담론을 만든다는 위치가 얼마나 연약하고 불완전한지를 직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누군가가 거론한 '텍스트의 종언'이라는 것도 바로 담론이 자기만족적인 수준에만 머무는 바로 그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0-13
10:09:45 

 

일병 오학준 
  글을 쓸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그 불쾌감의 정체가 요거였던가, 싶군요... 2009-10-11
12:50:49
  

 

상병 한강수 
  흠.. 
엄청난 양의 텍스트들이 
그저 텍스트로 그치고 있다는 생각은 
저같이 글을 안써본 사람은 해본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말이죠. 
지금의 궁안에서 
현실에 들러붙은 글을 쓴다는게 가능 한가요? 
다시 말해서 
지금의 상황을 참작한다면 차라리 텍스트만의 잔치를 극한까지 끌고가서 
궁을 나간뒤의 일을 도모하는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2009-10-11
13:42:17
  

 

상병 박준우 
  하필 모든 내글내생각을 지웠더니 다음날 이런글이 올라오네요. 킥킥... 2009-10-11
13:42:56
  

 

상병 한강수 
  하지만, 
원익씨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입니다. 
총체적 진리의 수렴이라는 환상. 
아마 자유주의적 상대주의를 이루어내고 있는 
자기자신에 대한 만족감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리고 가지로. 2009-10-11
14:14:11
  

 

병장 김예찬 
  이야기는 좀 다르지만 김무준님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처음 김무준님이 <구회 말 투아웃>이라는 글을 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자족적인 단편을 쓰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다가 갑자기 옴니버스식으로 단편을 계속 써보는게 어떨까, 해서 다음 편들을 써 나가기 시작했고, 이 것이 당시 책마을에서 이야기 되던 '88만원 세대'와 관련한 세대 담론에 대한 논의와 맞물려 장편으로 기획 되게 되었습니다. 사실 김무준님이 <구회말 투아웃>을 쓸 때는 어떤 세대 담론과는 무관한, 그저 야구라는 소재로 단편을 쓰고자 했던 생각이였죠. 본인도 글 쓸 때는 별로 계획 안쓰고 그냥 손 가는 대로 쓴다고 밝힌 것처럼요. 그러나 , 거기에서 먼저 '세대 담론'이랄 것과 연결점을 찾은 책마을 독자들의 반응이 결정적으로 <구회말 투아웃>을 장편으로 만든 것이죠. 

그 순간 <구회말 투아웃>은 어느 순간 김무준님이 쓴 글이라기 보다는, 김무준님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짓는 무언가로 변해버립니다. 20대 세대 담론과의 연결점이나 한창 인기를 모으던 '야구'라는 소재와 같은 것들이 김무준님에게 '출판'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이죠. '세대 담론' 같은 것에는 별 흥미가 없는 '독고다이'를 자처했던 김무준님은 <구투>를 계기로 변해버립니다. 이 것은 '출판'을 향한 욕망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렸던 단편은 이제는 무준님에게 '꼭 출판 해야 하는' 무언가가 되었고, 아직도 그 생각을 버리지 않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요새 알라딘 창작 블로그에서 연재하시던데 좋은 결과가 있기를..) 

재미있는 것은 원익님이 말씀하셨듯 "부유하는 사고의 편린들을 일단 글로 적어두고 형식화하다보면 그것이 이전부터 그랬다는 듯, 그럴듯한 정합성을 띠게 되고, 마침내 그것이 타인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오기 때문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것'으로 귀속되는 환각"이 생긴다는 점이겠죠. 저도 여기에서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 것은 마치 시험 공부를 위해 억지로 읽었던 텍스트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마치 내 생각인 양 변해버리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공부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결여되어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신의 책 읽기, 자신의 글 쓰기, 자신의 공부에 대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2009-10-11
16:15:56
 

 

상병 한강수 
  그리고 또 하나. 
어찌보면 그런 상대주의적인 시각으로 인해 
소크라테스가 말한 보편개념을 획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인식의 심화에 많은 도움을 주진 않을까 합니다만. 
물론 그 결과 세계상이 빈약해 지긴 하겠지만. 
그리고 너도 틀리고 나도 틀릴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다면 이제 담론은 더이상 필요 없나? 라는 생각도 갖게 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에 대해서만 언급하셨지만 그렇다면 펼쳐지는 텍스트들이 
얼마만큼 진리에 가까운가에 대한 합의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우주 미아격이 될수도 있지는 않을까요? 
어지간히 애를 써도 그 진리율은 0%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즉, 자유주의적 상대주의라는 것은 그런 와중에 생긴 어쩔 수 없는 방법론으로 제기된 것 같습니다. 

/예찬 
저의 생각은 짧지만 그래도 궁금함에 질문을 하자면, 
'나의 것으로 귀속되는 환상' 자체가 인식의 자연스러운 과정은 아닐까요? 
어차피 생득적으로 '생각'이란 것들이 생기진 않을테고 
나의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직관적인 어떠한 선언을 한 후부터 
구체화되고 굳어지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해 생각이 없던 사람에게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그리고 그 답을 했을 때, 이유를 물어본다면 아마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신이 왜 그사람을 지목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찾기 시작하고 
어디서 들었거나 살펴본 것들중에 하나를 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사람의 생각으로 굳어지고. 2009-10-11
16:48:25
  

 

일병 심현주 
  이번에 있었던 교육 관련한 논쟁에 발을 잠깐 담궈본 입장에서 눈치작전이라는 말은 크게 공감이 갑니다. 정말 우리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권위에 입각해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고 나 또한 그 권위를 인정 받음으로써 얻은 만족감에 헤벨레 해져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더 큰 문제는 역시 만족감을 느꼈기에 그곳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겠죠. 
사실 밖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주목받을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자신할 수 없네요. 
'그게 뭐 임마-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은 기대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우훗. 

일단 예찬씨가 말하는 주체를 찾는다면 더불어 책임감도 자연스레 생기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난 소중하니깐요. 2009-10-11
18:57:31
  

 

병장 이기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 

갑자기 떠오르네요. 2009-10-12
08:35:59
  

 

일병 이준혁 
  글이 진리와 꼭 특정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잘 모르겠습니다. 글은 현실도피의 기능도 가지고 있지요. 가장 직접적인 예로 '성애소설'을 들 수 있을까요. (참고로 저는 사드의 텍스트들을 이런 관점에서 매우 즐깁니다. 이것들이 지닌 정치적인 함의 따윈 관심도 없어요) 저는 귀여니의 소설이나 혹은 라이트노벨 부류의 것들도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들이라고 봅니다. 자기만족에서, '그들만의 리그'로 끝나는 이야기들도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허영심을 갖고 이를 떠벌린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는 되겠지요. 

ps. 설탕다녀와서 지금에서야 (제 글과 관련한) 원익님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뒷부분의 정치와 관련한 부분은 읽지 않았고 (관심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크립키와 관련한 부분에 답글을 남겨드렸습니다. 2009-10-12
10:27:23
  

 

병장 양동훈 
  답글 먼저 달고 왔습니다. 
그리고, 
가지로- 2009-10-12
12:29:07
  

 

상병 박준우 
  죄송합니다. 몇 번을 읽어봤는데, 난독증이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글이라는게 기만적이고, 도착적인 만족감에 허우적 거릴수 있다고 말하시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고 담론을 만드는 위치가 열악하고 불완전 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의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책마을에 올라오는 그 어떤 글보다 원익씨의 글이 권위적이라고 느낍니다. 원익씨가 말씀하셨죠. “여가 자유게시판인것도 아닌데...” 그런데 저는 고개를 갸웃 했습니다. 여기가 자유게시판이 아닌 것은 맞지만,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게시판인것은 맞습니다. 여기는 토론만 해야 하는 곳도 아니고, 철학을 해야 하는 곳도 아닙니다. 담론만을 위한 공간은 더더욱 아니죠. 여기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 하는 곳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익씨는 누구보다 깊게 사고하고 싶어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깊게 사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신건지 (아닐지도 모르지만) 깊이 사유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데 너무 집착하시는게 아닐까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원익씨 뿐만 아닙니다. 저도 가끔 한탄합니다. 원익씨도 그렇게 한탄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왜? 이들은 이렇게 도착적으로 글을 쓰는걸까?’ 그런데 자기기만에 도착적이라고 하시는 그 글 보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원익씨의 글이 독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컨대 원익씨는 글이라면 모름지기, 책마을이라면 모름지기, 내글내생각이라면 모름지기, 담론에 대한 리플이라면 모름지기, 이런생각을 하시는거 같습니다. 그것이 기만적이라면, 그리고 도착저이라면 소통의 기쁨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원익씨에게는 회의주의에 대해 쓴 제 글은 그냥 분석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프네요. 예, 솔직히 저는 이 글이 주제넘은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원익씨가 주제넘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글이... 기분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원익씨처럼 치열하게 사고하고 치열하게만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왕왕 있습니다. 저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봅니다. 여기는 치열한 토론장인 것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2009-10-13
00:22:10
  

 

병장 박원익 
  오학준/그 위화감을 때때로 느낄 때가 있지요. 그 위화감 때문에 글쓰는 걸 멈출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에 대한 '반성'을 경유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강수/사실 '후일을 도모하자'는 건 제가 항상 하는 생각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런 글을 쓴 게 아닐까 생각하고요. 절실함이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상대주의'에 관해서는, 그것이 내세우는 표면상의 명분보다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를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보편'이라는 것도 소피스트들(이들은 오늘날의 상대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이지요)과 대결하면서 나온 것이지요. 소피스트들은 주어진 전제 안에서 한낱 지적 유희나 즐기는 그런 인간들이어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철학 고유의 방법, 즉 다일렉틱(변증론)-철학적 대화술을 통해 전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사고지평으로 나갔고요. 바로 그 방법을 통해서만 진정한 보편에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그러한 '소피스트들'과 대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김예찬/주체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로 공감이 갑니다. 가령 어떤 저자들과 고유명들을 단지 학계에서 통용되는 일반상식의 차원에서 수용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들을 독자적으로 독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지적 해방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결코 이준혁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를 '권위주의자'로 지칭하신(큰웃음) 준우님도 동의할 수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