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베스트-내글내생각] 근대문학의 종언과 환상문학의 종언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3-16 16:15:26, 조회: 345, 추천:3
최근에 생각했던 바를 두서 없이 끄적여봤습니다... 오타와 비문이 눈에 띨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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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이 선언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기본적으로, 근대문학이라는 자명한 대상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그것에 담겨있는 스타일과 대상 그리고 서술 방식 내지는 사유들, 더 나아가서 문학제도와 문단일반은, 역사의 생성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며, 일정한 역사적 역할을 담지하지만 결국은 '종말'을 향해 노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언> 테제에 반응하는 한국의 많은 문인들과 식자들은, 마치 이러한 선언이 단순히 어떤 즉흥적인 감흥이나 일종의 포스트모던한 유행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한 유일한 용기 있는 한국의 비평가는 내가 아는 바로는 다음 카페 <비평고원>을 운영하며 <소조>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영일> 씨이다. 그는 최근에 <한국문학과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비평집을 발간한 바 있다.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보여주듯 분명 칸트의 철학적 모티브를 엄밀하게 사유하고 있다. 즉 미적/과학적/도덕적으로 엄밀하게 나누어진 영역의 '대상'의 자명성은, 단지 그 대상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환원하는 어떤 반성적 태도에 의해 존립한다. 즉 <실천이성비판>의 경우 그 자체로 윤리적인 대상이 있기는 커녕, 윤리적인-반성적 태도에 의해서만, 모종의 '결단'에 의해서만, 그러한 대상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저런 윤리적 쟁점들은 한낱 작위적인 문제설정들에 불과한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라 대답한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태도를 초래하는 혹은 강제하는, 유일무이한 단독적 상황 내지는 타자성他者性이다. 예컨대 이론과학의 영역에서 아주 나이브한 사례 하나를 들자면, 양자역학적 상황의 아이러니에 대한 순수 이론적 발견은,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순전히 이론적 허구나 생성물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쓸모있는 일상적 직관과 충돌하더라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게끔' 강제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다. 칸트는 그것을 물物자체Thing itself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다면 어떠한 과학적 발견/이나 윤리적 전회/내지는 미학적 프로그램을 실제적으로 추동할 동기 같은 것도 없다.
그렇다면 가라타니 고진은 어디서부터 근대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엄밀히 말해서 근대 일본문학에 대해 반발심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이 현실을 사유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적 힘을 상실하고 나서부터이다. 즉 그가 반발을 느끼는 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적 성취 이후의, '하루키 이후'의 문학적 상황에 대해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하루키 소설의 '기원'은 근대문학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근대문학 기저 자체의 상징적 장치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현실세계의 구조에 대한 사고방식이자 세계관이기도 하다. 이는 바로크나 중세 '알레고리'적 사고방식에의 단절, 즉 현실이나 세계의 일상적 사건이나 개물에는 어떤 역사-보편적 의미 따위는 없다는 리얼리즘Realism적 세계관에 잇닿아 있다. 다만 개개의 사물이나 인물 그리고 배경은 우연적인 일반성을 재현할 따름이다. 협소한 의미에서 리얼리즘(리얼리즘 기법으로 쓰여진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정숙하지 못한 보바리 부인의 비참한 말로에는 그 자체로는 어떤 도덕적 비유도, 교훈적 의미 같은 건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투로 서술되어 있다. 그것이 역으로 보수적인 비평가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도 그러하거니와,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 쓰여진 환상이나 신화적 구조(헤르만 헤세의 소설들)를 차용한 소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주관-회향적인 사私-소설(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조차도 그러한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그러한 리얼리즘적 전통은, 문학에도 나름의 유용한 것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가령 대한민국의 고등과정 문학교육을 지탱하는 일종의 페다고기Pedagogy와 같은 것이다: '문학과 소설은 세상을 바라보는 반反-본질주의적 지혜와 심미안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교양'으로서 문학은 요컨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본래는 혁명적이었던 협소한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적'인 유파와 다른, 어떤 일반화된 리얼리즘의 보수성이다.
오히려 근대문학의 유니크함을 되살리는 것은, 이러한 '리얼리즘'적 경향에서 탈피하며 리얼리즘의 환원주의적 세계관을 불식시키는 어떤 '사건'(요컨대, 근대 리얼리즘의 전통에는 이러한 '사건'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된다. 가령 보바리 부인이 아무리 자신의 삶을 유니크한 것으로 치장하려 해봤자, 무의미한 키취로 전락하고야 마는 것을 보라.)을 선언하는 소설들 내지는 문학적 기획들이다. 요컨대 정말 리얼Real한 것은 어떤 상황과 인물의 고유성과 그것을 구성하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기는커녕, 엄밀한 사유를 담은 알레고리를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 이것이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나, 카프카의 소설 내지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세계사적 상황은 어떤 개방된 혼돈으로 보이며 주체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이들 문학작품들을 오늘날의 <환상문학>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소설/극에서 일상적인 현실은 그야말로 신뢰할 수 없고 때로는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한, 리얼리즘에 대한 반발들은, 실존주의 소설에서부터 시작해서, 부조리극과, 말라르메-보들레르의 시학, 탐미주의, 그리고 누보로망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오늘날의 기성문단이 강조하는 '순문학'이라는 용어는, 이런 일탈들을 다시 정상궤도로 올리고, 원래대로의Businsess as usual 정상적인 심미적 태도를 내면화도록 하는 조치들을 태생적으로 강제할 수 밖에다. 이 심미적Aesthetic 태도는 물론 주변세계를 유의미한 사건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개별자들이 어쩔 수 없이 사로잡혀 있는 세계의 심미적 '풍경'으로서 대하는 미적 관조의 태도이다. 거기에도 물론 '개성'도 있고, 나름의 '일반성' 내지는 사회적 '전형성'도 있으며, '낭만'도 있고, 말하자면 있을 것은 다 있다. 그러나 빠진 것이 있다면, 본래 근대 소설의 획기적인 기원에, 혹은 위반적인 기원에 존재하는 어떤 힘일 것이다. 혹자들이 오늘날 이러한 순문학이 위기에 빠졌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오히려 도처에 순문학이 만연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순문학이 오늘날 수능 언어영역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다 내면화하는 어떤 것이라면 말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감수성이 '점수'와 연결된다면 더욱이 그러할 것이다. 애초에 '순문학'이란 문단과 문학제도 그리고 이를 관리감독하는 국가의 권위에 의해 재생산되지 않으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근대문학적 태도가 만약 지속가능한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한에서이다. 나는 여기서 다른 인식적, 윤리적 관심사들을 괄호 안에 넣는, 미적 태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를 낳은 시대적 사건이 망각되고, 본디 특이한 하나의 역사적 결단이었던, 태도 그 자체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제도화되는 전도과정이다. 이런 한에서 순문학적 관심은, 그 자체로 '미적美的'이라기보다는, 국가제도적으로 권장되는 '진선미眞善美' 삼위일체의 모호한 혼합물이자 시민교양의 인격도야 수단으로서 전용될 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사태 때문에, <근대문학의 종언>을 곧바로 기성문단의 해체의 당위성으로 연결시키는 주장에 반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오히려 출판자본과 수능교육 시장 그리고 문단의 삼각고리로 연결된 문학제도야말로 쉽게 변경되거나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근대문학>은 종언하기는 커녕 영원할지도 모르며, 도리어 <근대문학의 종언>이야말로 잊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게 잊혀질 수 없는 선언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언표조건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엄밀한 통찰과 사유를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종언테제야 말로 오늘날 횡행하는 수많은 범용한 종언-담론(근대민족국가는 끝났다, 산업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끝났다, 노동은 끝났다, 기타 등등)처럼 귀결되고 말 것이다.
나는 사실 <책마을>에서 환상문학에 대한 진지한 논의들을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매우 흥미롭게도 여기서도 모종의 <환상문학의 종말>에 대한 담론들이 논의되고 있음을, 말하자면 <환상문학> 속의, 엄밀히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불만족'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인데, 왜냐하면 이는 예컨대 문단 바깥에서 이야기되는 '종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근대문학(문단) 속의 불만과 정확히 상응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도 동일한 곤궁이 발견된다. 다음과 같은 불평들. 우선, 오늘날 생산되는 범용한 텍스트들이, 가령 이영도의 그것과 같은, 전범적인 작품들에 미치지 못한다. 첫째 문제의식은 이렇다: <즉 획일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된 고착화된 세계관 속에서, <환상문학>은 기원적인 장르적 힘을 상실했으며, 앞으로의 충실한 독자층들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다음과 같은 포기할 수 없는 대의야말로, 문제를 더욱 난국으로 몰고간다: <'장르' 그 자체의 잠재성은 여전히 유효하며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문명과 인간조건에 대한 일정한 사유를 담지 못하는 시드 노벨이나 기타 추리, 공포 장르와 변별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환상문학의 종언은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서도 예기치 못한 통찰을 던져줄 수 있다. 종언을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이들일수록, 더욱 그 대상에 대한 일종의 애증에 사로잡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가 끝났다고 말하지만 실은 끝났다고 얘기되는 그 안에서 이야기해야만 그 종언의 담론이 '유효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종언 담론이 공유하는 필연적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한국 내에서) '문단'을 가지지 않은, 그 대신 아나키적인 웹진과 사이버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 <환상문학> 공동체(?) 내에서조차, 동일한 <종언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역으로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문단이나 권위적인 제도의 폐착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히려 사회주의 아나키스트 <프루동>이 제기한, <아나키와 권위의 이율배반>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순전한 아나키 내부에서만 침잠해 있을 때, 사실 그 속에서 '권위'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서,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것은 역으로 절대로 '권위'를 건드리지 못한 채 비껴갈 뿐인 것이다. 이것이 일견 자율적인 상황 속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불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히려 유효하게 권위를 침식할 수 있는 것은, 역으로 아나키의 질서 내부의 '중심 없는 권위'이다. 말하자면 권위 바깥의, 전복적 권위를 유효하게 창출해낼 수 있는 집단적인 '힘'만이 그러한 아나키를 단순히 이성적일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이 실로 문단이나 문학권력에 도래한, 권위의 위기라면, 이러한 위기는 문단 안과 동시에 문단 '바깥'의 위기는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날 문단 외부는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문단 외부에 나가도 역시 동일한 '종언'에 대한 불평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단적이 예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아직도 기성문단이 불합리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유일한 문제인 양 얘기한다. 그러한 아름다운 영혼들이 불평하듯이, 권위가 실로 불합리하다면 본인들이 '문단바깥'에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만들어 보기라도 해야하지 않는가? 혹은 최소한 그러한 비판적 권위를 생각해보아야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는 그러한 영혼들이 결코 시도하지 않는 일임은 분명하다. 사유의 권력의지, 이것을 결여한 채, 문단 외부의 어떠한 '한국문학' 내지는 고유한 '장르문학'이 자족적인 형태로 실존하리라는 믿음에 베팅을 거는 방식으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전용하는 것은 실로 자유주의적인 어리석음에 불과하며, 실은 <근대문학의 선언>을 쓴 고진의 사유 자체와 무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역으로, 오늘날의 사태가 증명하는 근본적인 파국은, 이전보다 더더욱 그렇듯이, 문단과 이를 뒷받침하는 권위적 제도 없이는 '문학'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태가 문단 내부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문단 바깥, 즉 예를 들어 환상문학 공동체에서 더 분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를 라캉의 악명 높은 반 여성주의적 테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견주어 보고 싶기도 하다. "문학 같은 것은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의 실존을 그 자체로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단순히 무질서한 '아나키'로만, 쓰고 싶은대로 쓰고 마음 내키는대로 가입과 탈퇴를 병행할 수 있는 느슨한 문학적 취향의 인터넷 동아리(나는 이것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로만은 '보증'할 수 없는 것이다. 온전한 문학이란, 그 이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문학은 단순히 국가가 지원하는 용돈과 (단적으로 병영문학의 형태) 문단의 어른들이 독점한 상징자본 그리고 사교육 시장을 통해서'만' 존속할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떤 문학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이 점에 관해서 야野권의 문학인이라도 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문학이란 초역사적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부정적인 방식으로라도 문단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문단을 비난하지만,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그는, 내심, 문학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이 없지 않으며, 문학의 영역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은 (라이트 노벨이나 비주얼 노벨 등속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텍스트들이 보여주듯이) 문학적 사유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라져간다'는 명백한 사태에 반하여, 가장 엄밀하게 삶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문학적 사유는 어떻게든 존속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다름아닌 바로 그 '삶'이 사라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이것을 <근대문학의 종언>이 던지는 외상적 충격을 부인하는 가장 교활한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단과 이에 상응하는 권위와 규칙의 지평 외부의, 문학 자체의 비실존. 이것이 고진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가하는 중대한 도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도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이것은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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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5:05
상병 김형태
난해하네요. 그러니까 이영도 이후의 대부분의 환상소설들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그래서 종언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거죠? 아닌가요? 허허,
일단 공감해요. 저도 가장 초창기의 환상소설들을 즐겨 읽었지만, 어느새 환상소설이 인터넷 소설과 일맥상통하듯 가벼운 장르로 폄하되는 현상을 겪었답니다. 물론 인터넷 소설들이 가벼웠던것만은 아니라는게 당연하지만 말이죠. 제가 그걸 느꼈을때는 귀여x의 소설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느꼈는데요. 그 이후로는 그저 그 시절을 그리워만 하면서 폴라리스 랩소디를 다시 탐독하는 일 밖에 없었네요. 그리고 다시 순수문학 소설을 찾게 되었고요. 정말 너무 다릅니다. 최근의 환상소설들과 이전의 환상소설들은 말이죠. 소재의 고갈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 것 뿐아니라 문제의 환상소설들은 환상소설로 그친다는 문제가 있는것 같아요. 오히려 생각이 멈춰지는 거라는 얘기죠.
원익씨의 글에 좀더 양질의 덧글을 달고 싶지만, 저는 여기까지인가봐요. 흙 2009-03-16
20:21:10
일병 김강현
문학에 문외한이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뇌를 자극시키는 이론들이 난무하는군요. 이런거 정말 좋음... 흐흐. 2009-03-16
22:10:49
상병 김예찬
서브문학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조영일의 '선언'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더군요. '씬'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한 것 같긴 합니다만.. 원익님이 언급한 장르 문학에서도 '종언 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조영일의 '선언'에 대한 논박인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2009-03-17
09:35:29
상병 박원익
김형태/'종언'은 사실 제가 한 얘기가 아니라 주욱 이곳에서 이야기되어 왔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은 '환상'에 대한 모호한 욕망만 남은 채, 그것의 실존은 주관적 자기 선언으로만 그치지 않습니까? 이는 근대문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순문학은 '문창과'나 '국문학과' '비평지' 그리고 '신춘문예' 같은 제도적 허구들이 뒷받침해주기라도 하죠. 환상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와 유사한 시상제도나 정기인 간행물 출간으로 이를 '따라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강현/'이론'은 정작 얼마 없지 않은가요?(땀 삐질)
김예찬/사실은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여기서는 비밀로 해 두고 싶습니다. 여기서 조영일의 이름을 들여와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말입니다. 2009-03-17
14:16:43
병장 김민규
0. 종언은 곧 애증이고 새로운 약속의 선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망을 선고하는 모호한 대상은, 그저 불확정한 시간을 점유하는 시기적 유행의 특성, 이상으로 정의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것은 물자체로서 실존한다. 바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종언, 종언, 종언에 의해서.
1. 문학에 권위를 부여하고 헤게모니를 선사하는 것은 누굴까. 예술은 과연 대중적인가. 수적 차원에서의 호불호 대결이 가치지향적 물음에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2. 궁극적으로 문학이 비대중적이고 특정 방향을 지향하는 '리그'라면, 그것에 대한 검증의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종언'은 또다른 생산과 일탈적 발전을 불러올 것인데, 결국 문단 내적인 문제로 한정되며 여타를 배제하는 엘리티즘의 양상을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닌가? 그 울타리 안 고민에 '내'가 개입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3. 특정 전통으로 공고화된 '권위'가 실상은, '문단과 문학제도 그리고 이를 관리감독하는 국가의 권위에 의해 재생산'된 것이라고 하면, 그래서 관조적이고 귀족적 유희로서의 순문학이 현실의 사명적 의무를 망각하게 한다면 -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애초에 확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끔 유도한다면(심지어 내재적 해석에 따라 어떤 '답'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T/F로 가르는 절대평가에 의해 권위를 증폭시키기에 이른다면), 그래서 비주체적이고 맹목적인 대중적 중우를 양산하고 만다면, 그것이 권력적 요구에 부응하는 전략적 도구와 무엇이 다를 수 있을 것인가.
4. 그래서 현대적 상황에 있어 탈근대, 반권위는 필연적일진대, 문단 내적 차원에서의 박민규 류의 포스트-포스트를 옹호할 수 밖에 없는것은 문단 외적 움직임의 비조직화된 양상 탓으로 모두 해명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변방의 일탈적 흐름이 체계화된 형태를 가져 새로운 지평을 열고야 말았을 때에, 그것 역시도 다시금 문단 내부로 편입되며 같은 차원에서의 권위에 기댄 배제의 논리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 아닌가?
5. 출판자본과 교육시장 그리고 문단의 삼각고리야말로 오히려 문학이 실질적으로 '소유'한 우위적 자원으로 이해되어야 할지 모른다. 자, 다시한번, 그러한 권위는 누구의 주머니로부터 나온 것일까? 나는 왜 또 하나의 힘을 얹어주고 있는걸까?
어떤 답을 요하는 것은 아니고, 딱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머리속을 하도 돌아다니며 괴롭히길래 견딜 수 없어서, 또한 이것이 나름의 문제의식으로 화두를 던진 원익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기에 일단 남깁니다. 언급했다시피 정리하지 못한 이야기이기에 내적으로 상충되거나 충돌할지도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제가 책마을에 들어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주어졌던 화두이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 가기 전에 한번 더 곰씹어 보렵니다. 그리고 9할타자 만드는 것 같아서 찜찜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글에 대해서는 순전히 내재적으로 보아서도 기분나쁠정도로 치열하므로, '가지로' 날립니다.
다소간의 조소도 느껴져요. 그러니까 그냥 괜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스매시를 받고서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두고두고 한이 될 것 같아요. 생각좀 더 해보죠. 2009-03-17
16:05:33
병장 김무준
항상 이런류의 논의를 보면서 하는 생각이지만, 꼭 이렇게 어려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왔다갔다 해야하는 건지. 쩝. 깽깽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말입니다.
(꼭 민모씨를 향한 투정은 아님) 2009-03-18
00:28:58
병장 김민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죠. '꼭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닌지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면서 적는 것이 아니라면야.
아실 만한 분이, 허허허. 2009-03-18
06:03:16
상병 한영빈
무준씨 말씀대로 어려운 단어들로 이해하지못하는 많은 사람들 중 1人. 2009-03-18
08:28:23
상병 박원익
제 논의를 좀 더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종언의 담론(그것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든 환상문학의 종언이든)을 다음과 같은 딜레마의 구조로 풀어보고 싶습니다. 여기에 어떤 조소가 담겨 있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겟습니다.
(1)즉 '누군가에게' X라는 것은 근본적인 욕망의 대상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누군가의 일관된 정체성과 삶은 바로 이 욕망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그 X는 이를 추구하는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욕망의 대상-원인이라고 정식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X는 그 주변의 사물의 정상적 관계들을, 일상적 욕구의 체계들을, 과잉결정하는 상징적 기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문학'이라는 대의를 위해 밥을 쫄쫄 굶는 것 따윈 대수롭지 않았던 저 좋았던 옛 시대의 고전적 문학청년의 숭고한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문학청년의 세계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문학=X에 의해 '과잉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그러데 이 X는 '정의상' 온전히 실현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항상 어떤 외적인 방해물Y에 가로막혀 있다고 자연스레 간주됩니다. 앞서의 문학청년은 문학에 심취한만큼, 아무래도 문학성이란 미몽과 같은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방해물Y는 X만큼이나 미결정적인 텅 빈 변수이며, 이것은 온갖 일시적인 환유적 설명과 합리화들로 채워져야만, 즉, '헤게모니화'되어야 만 Y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의 규정을 지니게 됩니다. 가령 그 문학청년이 백낙청을 추종하는 민족주의 좌파라면, 분단체제의 특유한 상황 탓으로 이 느 결핍감을 설명하려 들겠지요. 그러나 이는 한낱 방편에 불과합니다.
(3)유사-종언의 담론들의 범용한 방식들은, 바로 이 Y가 무엇인지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도달했다는 선언들입니다. 이것은 가령 제레미 리프킨의 온갖 진부한 종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한낱 '착각'에 불과합니다. 여기서의 종언은 또 하나의 개선책에 다름아닙니다. 왜냐하면, Y를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다시 본연의 X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단'이 사라진다면, 본연의 대중적 문학적 실천들 활성화될 것이다, '분단체제'가 종식되면 민족문학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세계문학으로 도달하게 될 것이다' '정형화된 세계관'이 사라진다면, 환상문학은 본연의 역동적 상상력을 재획득할 것이다. 기타 등등.
(4)그런데, 종언의 담론의 가장 궁극적이고 파괴적인 단계는 'X=Y'간의 사변적 동일성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언은 하나의 넘을 수 없는 문턱을 선언합니다. 이 문턱을 정식화하고 논증하는 것이, 바로 '비판Crtitics'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우리가 X라는 하나의 궁극적 욕망-원인으로 과잉결정된 세계에 입장할 때, 우리는 동시에 Y의 환원불가능성을 X의 '기회비용'으로서 지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X로 구조화된 상징적 우주'에 입장하는 유일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5)그러나 이것은 결코 X에 대한 냉소적 비관주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X=Y'는 하나의 잊혀진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 자체로 X에 대해 소급적으로 깔보고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담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X의 기원적 '위대함'은, 혹은 근대문학의 위대함은, 본래 이를 이러한 'X=Y'라는 장애에도 아랑곳 없이, X를 유의미한 것으로 단언하는 그러한 행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잊혀졌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X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든 혹은 그것을 되살리든, 이는 필연적으로, 최초의 심연적 결단의 순간으로 되돌아가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궁극적은 <종언의 담론>이란, 종언의 대상X이 차지하고 있는 비가시적인 심연을 가시화하기 위한, '공간-비우기' 내지는 '과거청산'의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03-18
09:05:58
병장 김민규
이해가 단번에 가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그것은 원문에 깔린 번역투적 문체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일 겁니다. 우선 '종언'을 이해하는 것의 문제. 이것은 원익님의 전 글을 참조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근대 일문학의 경향성에 대한 배경지식, 마땅한 레퍼런스나 친절한 유도가 함께 제시되지 않았으므로 사전에 단서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문맥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있지요. 순문학에 대한 권력적 접근이나 문단 내, 외를 분리하여 아나키즘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고, 당연히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분석적 '불만족'이 개입하며 라캉의 테제를 끌어들여 실존을 논한다니, 그 하나하나로 얼마나 많은 가지들이 뻗어나올 수 있는 주제들입니까.
읽으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나 싶기는 하지만, 그래서 두쪽모아찍기 양면인쇄로 찍어 줄을 그어가며 다섯번, 여섯번을 읽으며 씨름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할 가치는 충분할 터 - 이만큼이나 생각할 거리 가득한 TAG의 모음집이 어디 흔합니까. 게다가 궁 안에서요.
이것이 쓰이기까지, 과연 어떠한 사고의 흐름을 거쳐야 했을까요. 그리고 왜 저는 본능적 자기방어로 논리적 반발감을 느끼고 있는걸까요. 이런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지요. 게다가 간만에 이끌려진 고뇌로부터의 산물이니 적절한 피드백은 제게 부담이고 짐입니다.
취향적 차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기때문에 이러한 토론은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2009-03-18
09:16:59
병장 김민규
사방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문제가 드디어 우리를 덮쳤습니다. X는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이고 적극적 의미에서는 생산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칸트의 물자체가 현상계 안에 나타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징계 안에서 X는 오로지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나타납'니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어떤 생산의 결과물들은, X, 곧 대상 a의 일시적 모방물 또는 대체물로서 존재하는 시니피앙에 불과하며, 애초부터 충족될 수 없는 근원적 결여의 우회적 충족방안에 불과하여, 그저 우리의 '충동'을 채우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폐쇄작용으로 격하될지 모르는 위험마저 안고 있지요. 어쨌든, 구순충동을 채우고자 하는 기관의 부분충동과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본성 가운데에 사로잡혀 있고, 이것은 심미성에 대한 본능적 경탄으로 증명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종언의 문제의식은 - 심미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헤게모니화된' Y, 즉 외적 의도성이나 외부효과가 작용하여 욕망의 문제를 비튼다는데 있겠습니다. 순수욕망의 선언이자 주체적 자아의 반사작용이고 반복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결여를 채워 보겠다는 본능적 욕구와 다름아닐터, 그러나 Y 자체가 부각되지 않는 상태야말로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이상에 근접한 것입니다. 종언은 Y를 인지하게 하며 오히려 부각시킵니다. 그래서 X를 투명하게 바라보지 못하게끔 우리의 정신을 착란시키고 교란합니다.
X로의 회귀는 그래서 필연적이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요. 과연 대상 a에 우리가 가서 닿을 수 있습니까? 어째서 불가항력적 결여를 문학이라는 시니피앙을 통해 채워야 합니까? 또한, 새로운 대체물(그것이 뉴웨이브이든, NT이든, 무엇이든)로서 그 주위를 맴돌 때에, 이것이 다시금 헤게모니화되어 하나의 정형화된 '양식'으로 재구축되고 말 위험성은 어떻게 방지해야 할까요?
오케이, 여기까지는 일단 이해한 바의 요약이고 중립적 서술인데, 그 다음이 막힙니다. 대안적 의견제시로 나아가기에 저의 그간의 고민은 너무도 희미했군요. 2009-03-18
09:59:05
병장 김민규
잡히지 않는 모호한 대상물에 근접하기 위한 사변적 시도가, 그나마 잘 알지 못하는 이론적 도움을 얻으니 다소 수월해지는 것을 느껴요. 다만 너무 깊이 들어가면, 저의 얕은 지식의 한계가 탄로날 것이 명백하므로, 부디 친절한 유도등들로 연착륙을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바삐 움직이며 알트탭으로 적고있는 중이라 조금 정신이 없군요. 2009-03-18
10:11:44
상병 박원익
저는 김민규 님이 대상a를 끌어들이는 것에 반쯤 동의합니다. 저는 대상a 없이도 충분히 덜 현학적으로(하지만 이것은 제 책임이기도 합니다), 잘 논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예를 하나만 더 드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저는 김무준 님이 칼럼란에 개재한 탁월한 글 한 편, <장르소설의 정형화>를 읽었습니다. 그것은 장르 소설의 전범으로 자리잡은 세계관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인해, 소설들이 '하향평준화'되는 현상을 개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초의 신선함을 상실하고, 사고할 필요 없는 읽을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최초의 고전적인(?) 작품들의 흥행으로 인한 흥미 위주의 접근과 시장의 확장으로 인한 진입장벽의 완화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시장>의 문제입니다. 시장이 확장한 데 따른 '외부효과'인 것이지요. 그래서 '과도기적인' 과정이 지나고 자체의 자정작용이나 혹은 이에 상응하는 것이 있다면, 문제는 절로 해소되리라는 기대감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언제든 '과도기'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달까요.
저는 방금 전에 만든 임시방편의 공식(하지만 이보다 더 간명하고 수학적인 공식이 있으리라 믿습니다)을 적용한다면, 방금의 논의도, 기원적인 X와 이것의 (민규 님이 적절하게 이름 붙인) 외부효과 Y라는 개념적 구분에 기초해 있습니다. 이 Y를 최소화하고 완화하는 정책적 요소가 있다면 X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것이 대부분의 비평적 사고입니다. 제가 굳이 가라타니 고진을 끌어들이고 칸트를 끌어들인 것은, 논의를 불필요하게 현학적으로 만들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X와 Y의 구분은 자명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X와 Y 사이의 경계는 반성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이지요. 혹은 오늘날의 포스트한 용어로 말하자면, '과잉결정된' 것이고요.
다시 원래의 사례로 돌아가자면, 원래 문제시되었던 환상소설 세계관의 진부한 '전형성'은, 원래 처음부터 '전형적'이었던 것입니다. 가령 강호들이 난립하는 중원대륙이나, 톨킨의 북유럽적인 민속적-이교적 신화적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혼합물에도 그 자체로 획기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작품들에서 발견하는 신선한 '상상력'이라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모종의 장르적 유희만이 아니라, '인식적 충격'을 주었던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발견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소(X)들에 대해, 원칙적으로 우리는 미리 이론적으로 가정하고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마치 그게 '가능하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죠. 그리고 이게 종언의 담론을 사로잡는 사고방식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문학을 대하는 저희들의 태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X로 지각하는 것은, 통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원래 이미 X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Y와 다름 없는 것이지요. 마치 어떤 광학적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리감'에 의해서만 Y가 나중에 X로 인지된달까요. 사실 우리가 환상소설의 아류작들에 대한 냉혹한 비평을, 이영도나 톨킨에게 당시에도 똑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미 그런 비평이 있었고요. 사실 근대소설의 기원도 일종의, 전범에서 일탈한 <패관잡기>에 불과했더랬지요.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통속적인'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실은 X란 단순히 허구이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제의 패관잡기가 오늘의 근대문학이라는 식의 냉소주의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패관잡기에서 근대민족-문학으로 옮아갈 때, 분명히 무언가가, 말하자면 '관점'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X의 실존을 보증하는 것은, 칸트가 이야기하듯이 단순히 '지속가능한' 어떤 초월론적 태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양자역학의 예에서처럼, 동시에 일정한 확률로 입자인 동시에 파동일 수 있는 양자(X)의 존재는 결코 경험에서 실증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적 사고 속에서만큼은, 그러한 것이 '실존'하며 나름의 미분화된 존재론적인 구조를 갖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역설을 깊이 사고했으면 합니다.
김무준 님은 최초로 환상문학의 틀구조를 수용한 환상소설 1세대 작가들이 나름의 철저한 연구와 자기단련을 통해, 단순히 부와 명예 뿐만이 아니라 분명 일정한 문학적-문화적 성취를 일궈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취향'이 동시대인들과 맞았기 때문이다는 식의 설명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환상소설의 구조는 전에도 말해듯이, 단순히, 유희만이 아니라, 기존의 담론지평에 일정한 '인식론적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잠시나마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규정하는 '상상력'도 오늘날 키취화된 RPG적 세계관의 임의적인 재구성과 해체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인식론적 충격'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그러한 1세대의 기원으로 오늘날의 젊고 능력 있는 잠재적 작가들이 되돌아가면 어떨까요? 저는 여기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때와 같은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자기음미가, 발생한다면, 말하자면 오늘날의 문화적 토양을 비옥하게 했던, 근본적인 상상력을 재활성시킨다면,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이미 RPG화 된 환상소설과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환상소설의 르네상스를 진정성 있게 꿈꾸는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환상소설에 대한 기대는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X 자체의 동일성에 기입된 이러한 강력한 비동일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009-03-18
15:48:23
병장 김민규
1. '대상 a'를 끌어들인 것은 근원적 결여를 가정하지 않고서 욕망을 설명하기에 마땅한 전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생각한 바에 따르면 Y는 이미 X에 잠재된 것입니다. '신선함'이라는 태도는 그때까지 그러한 특성이 결여되어왔다는 오랜 결핍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것은 X의 어떠한 특질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그것을 보는 우리의 태도, 관점에 보다 닿아 있습니다. 부가적으로 이것은 특정 시점에서의 일시적 반응성을 기초로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태도란 지속되지 않는 것이며, 게다가 현상황에서 이것이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획득된 것이 아닌, 상황적인 맥락 내지는 외부적 조건에 근거한 것이기때문에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Y는 순간순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유동합니다.
'신선한 것'의 등장은 '결여'의 상태를 극복할 하나의 대체물이 발생한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장은 경제학적 매커니즘에 의해 움직이기때문에, X의 등장과 함께 발생하는 맹목적 수요는 동시에 유사한 X2, X3의 공급을 발생시킵니다. 이것은 희소성을 감소시키며, '결여'의 조건을 무색하게 하여 최소한 시각적으로 X와 그 아류들의 가치를 하락시킵니다. 이 알고리즘의 반복적용은 시장을 확장시키다가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지루한 관성으로 남아, 마침내 '결여'의 본래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새로운 '결여'를 주장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2. X, X2, X3은 불확정한 것이고 불특정한 모습의 일반론적 대체물입니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정리에서 다소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ΔP × ΔX > h/4π , P=운동량, X=위치, h=플랑크 상수 그러므로 우변은 상수Constant, 그러나 이런 운동량과 위치를 측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입자의 그 자체의 성격(특질)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다만 변화량간의 상대적 측정만이 유효할 뿐이고 서로에게 비독립적인 것이지요. 여타의 변수(특히, 입자 자신에 관련된)가 개입할 여지는 제로, 입니다.
게다가 상징계 안에서 '대상 a'는 오직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결여의 극복방안으로서의 새로운 X의 등장은 그 시초에 온화한 환대를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방식의 이해라면 진입장벽 그 자체를 인정하는 접근도 가능할 것입니다. X, X2, X3가 이미 구축한 균형점equilibrium은 변화를 거부하며 허상의 안정감을 부여하여 '낯선 것에 대한 맹목적 반감'을 조장한다는 것이지요.
3. X와 그의 아류들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공고한 체제를 이룹니다. 말하자면 그들만의 균형에서 누리는 평화지요. 이것은 그러나 반드시 유명세(=취향적 지지, 내지는 독점적 시장지배)로부터 비롯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신선함'으로 인식론적 자극을 줄 수 있었던 그 자체의 특징의 우월성이 비로소 인정된, 지속가능한 태도의 승리가 아닐까요. 비록 진입 초기에 그 진실성이 어필되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러니까 맹목적 '신선함'에 의해 부각되었지만 - 비로소 그것이 반감을 깨트리고 하나의 '권위'로 나아가는 과정, 체제로 편입해 헤게모니화하는 것은 철저히 내적 구조의 우월성에 의한 것이리라는 점입니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입니다. 지독한 패러독스이지요. 또한 그들의 균형의 성립은 또다른 '결여'를 불러 일으키며, 근원적 목마름을 촉진시킵니다. X, X2, X3에 대한 Y는 이제 권위의 형태로 나타나 또다른 맹목적 추종을 일으킴과 동시에, 진입장벽이 되고, 신선함을 부르는 '결여'가 됩니다.
4. 아마도 X4, X5, X6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나와(그 역시도, 불확정하고 불특정한 일반적인 모습의) 체제의 전복을 꿈꾸며 하나의 '종언'을 선언할겁니다. 이것은 어찌됐건 '결여'를 충족시키며 시선끌기에 성공하나, 그 진실성이 입증되고 체제 내부로 편입되기까지에는 어떤 진지한 태도와 충격을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과거로 돌아가 X, X2, X3을 같은 주체(작가)가 재창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X, X2, X3이라는 같은 시니피앙으로 형태지어질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맞습니다.
5. 과잉결정은 확률적인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잉결정된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방향성의 문제겠지요. 지나치게 부각되어 추종되든지, 아니면 지나치게 격하되어 거부되든지요. 자, 여기까지는, 또다시 인식을 같이하는 부분에 대한 '정리'입니다.
6.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종언이 지향하는것이 궁극적으로 불필요한 외부성의 배제, 곧 체제의 해체라고 하면, 그 이후의 포스트-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것에 있어서 어떠한 사적 견해를 밝히지 않음이 보다 '해체'라는 본질에 적절하고, X 자체에 충실한 어떤 질적 지향을 유도하고 입증할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체제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익님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말씀하시지요. '문단과 이에 상응하는 권위와 규칙의 지평 외부의, 문학 자체의 비실존' - 즉 대안을 동반한 내부적 투쟁이야말로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가장 획기적이고 실질적인 계기이리라는 이야기겠지만,
그렇다면 그때부터 그것이 개별적 이해의 지배를 받는 이상, 헤게모니 투쟁 이상으로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요? 무한경쟁적 시장논리에 의해서 비평과 질적 입증이 이루어지는 것이 과연 건설적일까요? '모든 재화는 동일하며 무한하게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 수 없는 이상 같은 모델이 작동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데, 만약 그것이 궁극적으로 '권력 사유'를 향해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작가 개인에게 있어서 영달과 성공으로 인정되고 만다 하면, 그것에 순전한, 의도되지 않은, 진실성 있는 문학이 깃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순전한 문학이란 원익님 말씀대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고, 개개인을 자극해 진보로 추궁하기 위한 권력작용은 차악의 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부와 명예 뿐만이 아니라 분명 일정한 문학적-문화적 성취를 일구어'내었다는 표현이, 동어반복적인, 혹은 그저 인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저의 착시일까요? '성취'의 입증이 결국 헤게모니의 확보여부로 결론나는 이상에, 혹은 그것의 생산주체가 죽고 나서 일이백년이 흐른 후에나 뒤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이상에 말입니다.
음, 글로 쓸걸 그랬습니다. 쓰다보니 여기저기 말들이 막 튀는군요. 2009-03-18
18:10:14
상병 박원익
글쎄요, 제가 민규 님의 생각을 제대로 따라갔다면, 전 김민규 님의 사유가 지나치게 '전지적' 시점에서 전개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미 볼장 다 봤다는 투의 닳고 닳은 냉소주의? 저는 그런 식의 사유에는 일정한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간단히 말해서, 사실 'X'라는 것은, 민규님이 '잘못'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근원적 결여를 보충하는 상징적 허구라는 것만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X는 우리가 목말라 하든 말든 무관하게 돌발하는, 외부성의 사건입니다.
가령 양자이론을 다시 한번 그 역사 자체로서만 언급한다면, 그것의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 직관에 반하도록 사유하게끔 강제하게 만드는 하나의 '문턱'을 형성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강제적인 '초월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방언과 일상 언어게임에 반하는 방식으로 언어와 삶을 조직하는 특유의 태도(오늘 날에는 문단 내부에서만 가능한 그러한 태도)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의 역사적 문턱을 형성합니다. 그런 만큼이나, 그것은 헤게모니 투쟁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헤게모니 투쟁은 어떠한 기원을 소급적으로 무화할 수 있는 그러한 RPG 게임과 유사한 어떤 모델을 함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구조는 이와 다른 것입니다.
어찌보면 민규 님의 오해는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점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2009-03-18
19:22:06
병장 김민규
'X'는 물론 외부적이고 독립적인 돌발적 사건이며 자연적 현상입지요. 그러나 그것을 이루는 본능적 원리(행동주체와는 무관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결여'의 가정에서 이야기를 시작했기에, 어떤 갈림길이 있다면 그러한 세계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하는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아주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이 세계는 물론 비선형적이고 우연적 작용들로 가득차있는것으로 보이나, 실상 그것중 절대우연은 없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 신념입니다. 그렇기에 'X' 역시도, 그저 막연한 자연발생적 우연으로 둘 수 없는 강박증을 보이고야 마는 것이고요.
방언-일상 언어와 반하는 문단의 언어습관- 이것은 공고화된 내부적 헤게모니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외부의 도전은 거듭되며 갈수록 기세를 올리고 있지요. 다만 조직화되지 않았을 뿐, 이미 문단 내부로까지 시각화된 텍스트나 이모티콘등의 생소한 습관들이 침투하고 있지 않습니까? 변방의 도전이 비로소 어떠한 공통적 지지기반을 얻게 되면 그야말로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것이고, 기존의 질서를 깨고 '특유의 태도'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이모티콘은 그간 마땅히 감정표현을 할 언어적 수단이 없던 '결여'로부터 발생한 필연적 결과물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새로움'의 모습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어필했고, 본능적 반감(언어를 교란한다는)을 얻었으나 점차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있어요. 언어는 본래적으로 변천하는 것이니 이것이 퇴보라고 단언하는 것이야말로 고질적 관성에 기댄 권위의 표출과 다름이 아닐 터, 그러나 정식 언어체계의 안으로 편입되느냐 마느냐는 그 '지속가능성'이 결정할 일 아닌가요.
음, 애초에 제가 원익님의 발화내용을 거슬러가는 형태로 논의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어느 지점부터는 분명히 견해의 차이가 발생할 것이며, 그때부터는 상호적 관찰과 의문의 해소를 이루어나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2009-03-18
19:50:12
병장 이지훈
뜬금없고 전체적인 글 맥락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예컨대 이론과학의 영역에서 아주 나이브한 사례 하나를 들자면, 양자역학적 상황의 아이러니에 대한 순수 이론적 발견은,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순전히 이론적 허구나 생성물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쓸모있는 일상적 직관과 충돌하더라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게끔' 강제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다.
'나이브한'과 '양자역학적 상황의 아이러니에 대한 순수 이론적 발견'에 대해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음, 생각을 정말 많이 하면서 읽어야 하는 글이군요. 잘 봤고, 또 더 잘 보려고 합니다. 2009-03-19
07:09:34
상병 박원익
김민규/그러니까, 문제는 모든 사건의 전개를, 체계 내부에서 발생한 결핍감에서 비롯된 체계 외부로의 추동과 이를 저지하려는 억압적 체계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의 원환고리로, 사유하려는 민규 님의 사유(이것은 초-역사적 사고방식입니다.)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겠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혐오'합니다.(이 점에 관해서 따로 글을 준비해야겠군요.) 냉정하게 말해서 민규 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자유주의적 냉소주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사유이기는 커녕, 비-사유에 가깝고요. 그리고 이는 제 발화내용(?)을 거슬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애초에 출발부터 저와 반대되는 것이지요. 사실 저는 김민규 님이 제 논의를 패러디하나 싶었습니다. 라캉의 개념을 유사-허무주의적 방식으로 수용하는 그런 태도도 말입니다. 왜 그런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지 싶네요.
이지훈/'나이브'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진부한 사례라는 뜻이고, '영자역학적 상황의 아이러니에 대한 순수 이론적 발견'이라는 것은 양자역학이 이야기하는 바, 즉 물질의 존재론적 성격이 관찰자의 시점에 좌우된다는 그 이론이 이야기하는 반-직관적 내용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 이론적 가정으로서만 사고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비유클리드 기하학처럼 말이죠.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데 그러한 사고는 일견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러한 존재를 알고나서 이전과 같이 사고할 수 없게 되어버린달까요. 전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근대문학도 비슷한 위상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09-03-19
10:45:10
병장 이지훈
원익//
오오,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2009-03-19
11:52:22
병장 김민규
어떤 의미에서 정확한 지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다분히 오해가 개입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건 발생의 역사적 필연성을 옹호할 뿐이고, 그 '발생'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도 좋다-는 탈가치적, 아니 몰가치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진화론적 환원이야 곤란하겠습니다만 인간 의지의 힘에 기대어 일정량의 '자정'과 '갱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여전히 신임합니다. 개혁은 필연적이고, 또한 필수적인 것이되 그 반복적 재현에는 근원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령 저는 열흘전에 사랑니를 뽑았습니다. 사랑니의 태생은 불충분한 구강 면적의 활용도와 그 기능성을 보충하기 위한 내적 시도였겠으나, 동기가 어쨌든간에 그 녀석은 지루한 중력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정확히 옆으로 누워버리더군요. 그것은 치열齒列이라는 공고한 체계를 흔들며 고통을 동반하여 등장했으나, 마침내 완성된 형태의 치아로 성숙하였을 때 또 하나의 체제로 군림했습니다. 잇몸 밖으로 전혀 돌출되지도 않은 주제에 하나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저는, 마침내 잇몸을 째고 녀석을 반으로 갈라 꺼집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치아 본연의 기능적 특성을 되돌려 보충하고자 한 또 하나의 '완성'에의 시도지요.
그 자리에는 텅 빈 공터만이 남아 이전의 사정을 짐작케 했습니다. 또한번 '결여'가 발생되었고, 실밥은 그것을 붙잡아 매며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보조적 장치가 되었죠. 이제 상처는 아물고 그 자리에는 다시금 말랑한 잇몸이 들어설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번 치열이라는 강력한 체제를 이루며 구강 구조를 장악할 것이고요.
궁극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완성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숙명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욕망은 완성을 꿈꾸는 목적론적인 운동이며 '선'을 향해 정향지어져 있죠. (여기에는 배후세계론적인 저의 가치관이 개입하나, 거기까지 나아가게 되면 더 큰 대화의 불편과 균열을 야기할 것이므로 일단은 생략하겠습니다) 맹목적 운동성이 냉소적 시각이라고 하신다면야 어찌할 바가 없겠습니다만,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그것을 향해야 한다는 당위론에 닿아 있을 때에, 그것이 어떻게 '자유주의적 냉소주의'의 '비사유'로 판단될 수 있는지 다소의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다음의 글을 통해서 보다 많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09-03-19
12:26:30
상병 김예찬
제 짧은 생각으로는 민규님은 원익님의 글이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이 결국에는 하나의 '역사적 체제'와 연관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에게 민규님의 댓글에서 이야기되는 '체제'는 단지 '메커니즘'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집니다. 원익님은 구체적인 '지금'을 이야기하고 있고, 민규님은 탈시대적인 모종의 공간을 상정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리고 그 모종의 공간은 마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계약에 의해 사회가 생겨났다는 '사회계약론'의 가장 원론적인 주장이 가지고 있는 '가상적 전제'와 같은 것으로 느껴지구요..
[re] [내글내생각]근대문학의 종언과 환상문학의 종언
병장 김무준 2009-03-17 02:14:43, 조회: 191, 추천:0
그러니까, 이건, 심히 두서 없는 텍스트인지라 임산부와 노약자를 포함한 어린이 등 자칫 주화입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격하고도 골 때리는 표현과 심경에 거슬리는 울트라 캡숑급 분노가 쓰나미로 몰아닥칠 수 있습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고 소녀시대 효크보다 두려울 수 있으니 원치 않는 이는 초록색 화살표의 뒤로를 눌러주세요. 없음 말고.
따로 텍스트를 작성하려다, 원익씨의 텍스트에 대한 깽깽이의 개소리라 예의고 나발이고 답글로 달겠습니다. 그렇다고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깽깽이가 지금 배가아파 죽을 것 같아 배설을 해놓고 튀었다고 생각합시다. 뭐, 그렇다고요.
근대문학이 끝나건 말건, 현대문학이 도래하건 말건, 시대를 초월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표현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뜯고 또 뜯어도 이게 당최 소설인지 알 수 없는 박민규의 텍스트가 그랬다. 학계와 평단은 열광했고 대중은 박민규를 외쳤다. 박민규! 박민규! 박민규! 김애란인가 김해란인가의 텍스트는 섭취해 본 적이 없으니 적당히 넘어가자. 이 종언, 이라는 건 심심하면 들려오는 종말론과 비슷한 것이다. 지구와 달보다도 좁은 거리로 소행성이 비껴 지나갔다. 몇 년 후에 행성이 충돌한다. 거대한 해일이 다시 발생하며 화산이 폭발하고… 셧. 그러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 근대문학에도 종언이, 환상문학에도 종언이, 순수문학에도 종언이, 경제에도 종언이, 심지어 우리네 청춘에도 종언이가 등장한다. 예, 종언아 넌 엄마 친구 아들이니? 왜 이렇게 바쁘니? 종언아. 종언아!
가리타니 고진보다 유명한 대한민국 평론가가 있을까. 뭐, 일본문학이 노벨문학상 어쩌고 그러니 일문학 최고, 라는 식으로 주둥이를 놀려대며 그래서 대한민국에 저명한 평론가가 없다, 라고 씨부렁대면 어이 이봐 거기 자네 그러지 말고 어금니 꽉 깨물게, 하고 찔러주고 싶건만 툭 까놓고 말해보자 유명한 대한민국 평론가가 누가 있던가? 이건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그래 어쩔 수 없이 고진의 주장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는데, 정녕 문학이 ‘총체적으로 싸잡아 쉽게 그냥 가치 있어 보이는 적당한 텍스트들의 집합’ 따위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증명하기 위해 자위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라도 가져야 한다고 씁쓸하게 웃어야 할 것이라면, 그럼 결국 이성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씨-발 문학 따위는 사실 실존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인정해놓고 호작질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제도적 장치와 학문적 정리가 없다면 귀여니도 깽깽이도 철수도 영희도 지-랄이고 나발이고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한다 주장할 수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특유의 제도화 전도과정을 거쳤단다. 순문학이 교육과 교양으로 인하여 심히 변질되었다고는 하나, [정치적·계몽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공리주의적 또는 대중 문학·통속 문학이 아닌 순수한 예술적 충동에서 형성한 문학.]라는 정의를 여전히 포함하고 있다면야, (물론 사전적 의미만을 염두에 두면 깽깽이의 수많은 텍스트도 문학 비스무리 한 걸로 해석될지 모른다) 그 범주를 설정하려 할배들이 발렌타인 십칠 년산을 쪽쪽 빨고 있건 어쩌건, 순문학과 예술 자체를 본질적, 감성적, 본능적으로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은 어쨌거나 결국에는 대중의 호오이니 앗싸 그래 종언이고 당근이고 박민규처럼 탈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하리니 숭배하라! 고 주장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아님 말고.
문학이 실존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지극히 매트릭스적인 사고일 수 있으나, 문학이 뭔지는 몰라도 에라 모르겠다 문학일 것처럼 느껴지는 수많은 텍스트를 접해온 깽깽이는,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문학이 실존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그럼 나는 대체 지난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뭘 해온 거야요? 부레이끼! 호머 심슨! 메리 크리스마스! 를 외치며 까무러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깽깽이는 박모씨의 의견과는 달리 문학은 실존하며 역사와 함께 탄생과 재생성을 반복해왔으나 한 번도 망했던 때는 없었으니, 역으로 종언이라는 단어가 빗발처럼 거세게 쏟아져도 오히려 종언 자체가 실존할 수 없음이라 주장하며,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미지의 대상을 좇는 유에프오 탐구회 회원이 아니라, 단지 우리 스스로를 위해 대상을 사랑하고 증오하며 텍스트를 생산한다 말하련다. 머리 아프게 시리 아나키가 어떻고 고진은 또 어떻고 라캉인지 바리캉인지 ! 닥치고 깽깽이는 무식해도 스스로를 위하여 텍스트를 생산하련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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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5:18
병장 김무준
그래서 뭔 말을 하려는 거냐고요. . (혼자놀기) 2009-03-17
02:15:52
상병 김예찬
요약하면 A, See-足 어려운 말 모르겠다 그냥 난 내 갈 길을 가련다.
이거인듯. 2009-03-17
07:00:15
상병 박원익
제 감상은, Well, Then so be it, 정도가 아닐련지. 2009-03-17
14:21:25
상병 박원익
<순문학과 예술 자체를 본질적, 감성적, 본능적으로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은 어쨌거나 결국에는 대중의 호오이니 앗싸 그래 종언이고 당근이고 박민규처럼 탈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하리니 숭배하라! 고 주장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아님 말고.
>
위와 같은 구절을 미루어 보건대, 제 인상으로는 무준 님은 '문학'(대문자 Literature)의 실존을 주장한다기보다는 '글쓰기'와 '텍스트'의 실존을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의 실존은 아마 저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용기 있게 밀고나간다면 한국의 롤랑 바르트가 되실테지만, 이는 자칫하면 문학의 주관적 실존을 옹호하지만 실제로는 암묵적으로 제도권의 문학에 기초한 사고모델에 의지하는 흔한 위선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제안은 이렇습니다. 정말로 텍스트에 대한 감각적 호불호(텍스트의 즐거움)를 판단한느 익명적 취향들의 이합집산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애초에 님은 장르의 '문학성'에 대해 민감하게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준님은 '텍스트'를 가지고서, 이와 무관한 <대문자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무준님이 드신 '박민규'라는 논거도, 제가 봤을 때 사실은 전혀 대중적인 취향의 사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열광한 것은 상대적으로 '지적인, 자의식적인' 소수에 불과했죠.... 오히려 '공의 경계'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같은 라이트 노벨을 소재를 든다면 아마 납득이 갔겠지만 말입니다. 이들과 '문학'과 동일선 상에 놓는다면야, 애초에 문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에둘러서 누군가의 문학론(?)에 불편한 심기를 보일 필요도 없겠지요.
제 눈에 보이는 것은 이런 비일관성입니다. 2009-03-17
15:48:26
병장 김민규
그저 묵념밖에는. 2009-03-17
15:51:23
병장 김무준
오늘도 여전히 깽깽이의 텍스트로는 깽깽이의 사고를 전달할 수 없음을 실감합니다. 감사합니다. 호오라는 단어선택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사회와 문화가 일 퍼센트의 의견에 의해 쥐락펴락 흘러가는지는 몰라도, 결국 어떤 집단적 형태를 생성하는 것은 구십구 퍼센트의 대중이 아닐까요. 위에서 말하는 깽깽이의 ‘문학’이란 실은 ‘문예’와 ‘예술’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깽깽이도 스스로가 참 한탄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정작 기존 문학과 이론에서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철저히 가치와 이론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통념으로 전해지는 ‘참된 가치’의 기준에 맞추어지는, 슬픈 텍스트 생산의 반복이라 생각해 아직도 텍스트를 글이라 부르지 못하고, 스스로를 글쟁이라 부르지 못합니다. 어쨌거나 나는 지적하신대로 위선적으로 보일 테니까요. 꼭 뭐랄까, 있는 집 자식이 더한 것처럼.
대중이라는 단어 자체도 참 지랄 맞습니다. 이를 대중이라 부르고 소수 식자층이라 읽는 집단을 말한다는 주석 따위는 친절하게 달려있지 않으니, 대중이라는 단어의 뜻만을 바탕으로 해석(깽깽이의 사고체계(?)를 배제한 내재적 비평의 입장에서는)해보았을 때, 박민규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답이니까요. 포스트모더니즘이 어쩌니 했으면서 대중이란 단어를 끌고 왔으니 이거 퍽이나 우습군요.
허나 이와는 별도로 상당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위와 같은 근거로 깽깽이의 단어 선택이 적절치 못했으며(생산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텍스트의 패러독스가 발생한 다는 것은 알겠으나, 오히려 '공의 경계'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같은 라이트 노벨이 대중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이런 라이트 노벨류에 관심이 없어서 그러는데, 이런 책들이 뭐 몇십만부 쯤 팔렸습니까? 까놓고 출판서적의 소비층을 일단 대중이라는 집단으로 잡아놓고 보면, 이게 베스트셀러가 되어 상당수 대중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기보다는, 한국에서 요런 라이트 노벨은 오덕냄새가 나는 일본이야기라는 인식이 아직 팽배해 있는 것 같아서요.
무튼 이걸 문학이라는 연장선상에 동일하게 놓을 수 있느냐. 있다고 봅니다. 깽깽이는 독자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에 ‘내게는 아닐 수 있는 것이 타인에게는 맞을 수 있다’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든요. 문학을 폭 넓은 어떤 두루뭉술한 개념으로는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개념을 타인에게 보여주면 타인은 그 안에서 이걸 볼 수도, 저걸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원익님 말대로 타인의 문학론에 대해 발끈할 필요도 없는 건데, 깽깽이는 평소에도 짖지만 이성과 감성을 갖고 있으나 항상 따로 논다고 짖어대거든요. 비일관성이 비춰지는 건 깽깽이가 이성과 감성이 따로 노는 병신이라 그렇습니다. 깔깔깔깔.
예, 모순덩어리에요. 위선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되는대로 에라 모르겠다 그저 이성과 감성을 함께 합쳐 합리적 답안을 도출하는 것만이 시크하고 쿨한 도시남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니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련다- 보다는, 때로는 타인의 답도 타당함을 알고 있지만 가끔 짖어주는 그런 게 좋거든요. 원익님을 보면 제도적 틀과 기득권을 비판하는 왼쪽의 향기가 폴폴 느껴집니다. 근데, 나도 제도적 틀에서 보면 굉장히 외곽에 있는 존재이지만, 그런 왼쪽스런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발끈해서 짖어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뭐, 그렇다고요. 다른 사람들처럼 머리로 이해하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그런 군자는 못 되거든요. 소인배인지라 이해하고 인정하되,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늘어놓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단어선택이 드러워서 해석에 굉장한 무리가 있습니다. 다시봐도 깽깽이의 개소리가 원익님의 텍스트보다 훨씬 어렵고 어이없군요. 꺄하하. 2009-03-18
00:15:48
일병 신재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나 공의경계는 절대로 대중적인 소설은 못되죠 제 스스로가 이런 컨텐츠들의 주요 소비자라서 더 잘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판매량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일반 순문학들이나 다른책들보다야 몇배는 많이 팔렸음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판매량이 많아봐야 솔직히 대국민적인 관점에서 보면 엄청나게 적은수요죠 단지 순 문학작품들이 엄청 안팔리는것일뿐..] 그나저나...
김무준님의 말은 정말 이해가 안가내요 깔깔깔이랑 꺄하하만 무슨뜻인지 알듯말듯 하핫 2009-03-18
08:58:51
병장 김무준
간단히 말하면 이성과 감성의 엄청난 갭이 있어서 그렇다- 는 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