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독서후기] 그저 사랑하기 -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상병 김예찬   2009-06-09 14:21:03, 조회: 260, 추천:0 

- 가라타니 고진 :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토 진사이론'에 대한 독서후기.






1.

<논어>에 관하여 특기할만한 사실은, 그 것이 '대화'록이라는 점이다. 논어는 공자가 '일대일의 관계'에서 타자에게 했던 말들을 옮긴 책이다. 따라서, 논어는 일반적인 책들과 달리 불특정 다수의 '일반적 타자'에 대하여 말해진 책이 아니다. 게다가, 논어는 공자에 의해 쓰여진 책이 아니라 공자의 말들을 제자들이 모아놓은 책이다.

재미있게도, 공자와 같이 이른바 인류의 큰 스승으로 이야기되는 붓다, 예수, 소크라테스 모두 스스로 책을 쓴 적이 없다! 이는 그들의 시대에 쓰는 습관이나, 철학적 사상의 체계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에는 제자백가라고 칭해졌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붓다 역시 브라만 교를 비롯한 종교-철학들이 난립하던 시기를 살았다. 예수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참조) 소크라테스 역시 그 이전에 수많은 소피스트들이 제 각기 철학을 펼치고 있던 시기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쓰지 않았던' 것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그들이 책을 쓰지 않은 것은, 쓰는 일(일반적 타자를 향하는 일)로 인하여 소멸되어 버리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물론 그들은 제각기 다른 종교/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가 항상 일대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결코 그때까지의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고 그 문제 자체를 무효화 한다는 점. 그리고 그 것을 (관계 맺는) 타자를 사랑한다는 문제로 바꾸어버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자는 '효'를 말한다. 그러나 그 것은 공자 이전까지 존재했던 혈연적 공동체의 선조 신앙과는 관련이 없다. 선조 신앙은 죽은 선조가 영靈의 형태로 살아있는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아직 인간을 섬기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귀신을 어찌 섬기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는 영혼은 없다, 라는 주장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타자와의 관계'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효'는 혈연적 관계와는 단절적인 것으로, 부모를 '관계 맺는 타자'로 삼는 행위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된다. 넓은 의미에서 '효'가 군 사 부에게 모두 적용된다는 것을 따져볼 때, '효'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가족주의와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장 27절 ~ 11장 33절

여기서 예수는 자기가 그리스도임도, 예언자임도 말하지 않는다. 그 것을 증명할 증거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만일 그 증거가 명확이 존재한다면, 이제까지의 예언자들은 박해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의 예언자들이 정말 예언자였다는 것을, 바리새인(당시 이스라엘의 보수적 종교-지식인 무리)들은 민중의 믿음이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나중에야' 인정한다("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람, 즉 일대일 관계에 있는 타자를 예언자라고 증명할 수 있는 '권위'는 어디에도 없다. 기적이나 신비와 같은 것은 엄밀한 '증명'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신앙을 일반적인 규범이나 증명을 통한 '권위'가 아니라("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결단'에서 찾고 있다. '내'가 '믿'는다는 결단을 통해서만 신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고 반문할 뿐이다. 공자 역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공자/예수의 사상은 그런 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2.

  그렇다면 왜 '그런 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대화'에 대해서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대화' 규정을 살펴보자. 

"나는 자기 대화, 또는 자기와 똑같은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겠다. 대화는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한다. 또 타자란 자기와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가르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달리 말해 타자,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조금 어렵지만 차근차근 따져보자. 왜 고진은 '자기와 똑같은 규칙(언어 게임)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는가? 대화의 사전적 정의는 '마주 대해 이야기함'이다. 여기서 '마주 대'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타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와 언어 게임을 공유하는' 사람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이를테면 궁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선임이 후임을 '갈구는' 것이 당연한('짬' 논리라는 규칙을 공유한) 궁에서는 이질적인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짬 논리를 공유하고 있는 궁에서는 '갈구는 문화'가 당연스럽게 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궁 문화 안에서 '(이질적인)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신병(이질적 타자)이 오는 순간을 가정해보자. 보통의 한국 남성이라면 사회에서 부터 어느 정도 궁의 언어 게임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 신병의 등장으로 인하여 궁 문화에 치명적인 위기가 오진 않지만, 만약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프랑스(물론 이 것은 '가정'에 불과한, 이상적인 '외국'으로서의 프랑스다.)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20년을 살다가 모종의 이유로 급작스럽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입궁하게 된 신병이라면 생활관에 만연한 짬 논리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 때 신병은 이질적 타자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때야 말로 '궁 문화'에서는 '대화'가 등장한다.

쓰다보니 갑자기 재밌어졌으므로 계속 이 사례로 밀고 나가보겠다.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라는 고진의 말은 무슨 뜻인가? 아까 그 신병(타자)이 없는 생활관에서는 '짬 논리 궁 문화'가 변함 없이 지속적으로 승계됨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다. 이러한 생활관에서는 내부적인 위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대칭적인 위계다. 병장 부터 이병까지 자신이 짬이 찰 수록 자연스럽게 위계 질서의 상층부로 올라갈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신병(타자)은 그렇지 않다. 기존에 정해져있는 암묵적인 규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 때야 말로, '가르치다 - 배우다'의 양상, 곧 고진이 말한 '진짜 대화'가 형성된다.

'가르치다 - 배우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말뜻과 달리 생활관 기존의 '신송'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행위이다. '신송'은 선임과 후임이 서로 '짬 논리'를 미리 전제해 놓고 정말로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깔려있는 이상 선후임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의견 차이는 단지 자기 질문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후임이 선임에게 "제가 왜 선임들의 잡일까지 해주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선후임 사이의 지난한 토론을 거쳐 결국에 '궁은 계급 사회기 때문'이라는 기본 전제가 도출되게 된다. 이는 타자의 반론에 의해, 또는 그 자신의 반론에 의해 명제가 심화되어 가는 '변증법적 대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형태의 물음에서는 기본 전제를 아예 깡그리 다시 묻는 '외부성(=타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가르치다 - 배우다' 관계는 아예 사고의 프레임 자체가 다른 생활관원(나)과 아무 것도 모르는 프랑스 출신 신병(이질적 타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차라리 하나의 '투쟁'이다. 이처럼 완전한 타자의 등장은 기존에 '문제'라고 인식해왔던 것 - 이를테면 병장은 왜 청소를 안하는가? - 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기본 전제' 부터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3.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대화'적이다. 붓다는 자아나 본체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는 '자아나 본체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존의 '문제'가 아닌, 그 외부에 있는 진짜 '문제'를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답은 '불교 철학'이 성립되면서 심오한 공空의 철학으로 전환되고야 만다. 붓다가 가져왔던 외부성의 문제, 외부성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플라톤이 '정립한' 소크라테스가 아닌, 소크라테스 그 자신을 보아야할 것이다. 잘 알려져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를 가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록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전략을 통하여 먼저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견해를 제시하게 하고, 만약 그러한 견해를 인정할 경우 그 견해 속에 어떤 모순점이 숨어있는지 밝힌다. 이러한 모순점이 있는 한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나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크라테스는 그 대화 상대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힐 때 '자신'이라는 기본 전제를 아예 깡그리 다시 묻는 외부성(=타자)으로 등장한다.



4. 

  여기서 우리는 왜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가 '글(경전)을 쓰지 않았는지' 알수 있게 된다. '일반적인 타자'는 진정한 '타자(=외부성)'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글(경전)을 쓴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는, 자신과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는 대상들을 향할 때 만이다. 반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과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다. 나와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지 않는 글을, 우리는 읽을 수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고 느낀다! 이는 외부성(=타자)을 거부하는 것이다. 소통의 비극은 이러한 까닭에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과연 일반적인 타자는 정말로 타자(=외부성)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다른 말로 일반적인 진리가 존재하는가? 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두를 향해 공적으로 말할 때, 그 것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친구들과 개별적으로 관계 맺을 때, 나의 말은 나의 행동(윤리적 실천)과 함께 전자의 말과 다른 울림을 가진다. 그리고 여기서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진리, 곧 '사랑'이 등장한다.

  당신은 '관계성의 사랑'이 아닌, '보편적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열렬하게 신과 인류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가까이 있는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신의 이름으로, 인류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벌어진 잔혹극들을 역사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는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의 '사랑'이 그 제자들의 책으로 인하여 '사랑의 보편 이론'으로 정립되었을 때 벌어진 비극들이라 할 수 있다.) 직접적인 관계에서의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고, 이 것을 일반화한 '사랑의 이치'로 만들 때 이는 공허해진다.


5.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완전한 진리, 일반적인 진리, 절대적인 진리를 쫓지 말지어다.(당신을 사로잡는 '문제'들을 무효화 해라!) 당신 주변의 타자들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어라.(정말로 진리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대화)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저 사랑하라.(적극적인 주체적 실천 윤리로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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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6:06:37 

 

상병 진수유 
  짝짝짝. 가지로- 2009-06-09
15:20:39
  

 

일병 오학준 
  첫째, '글(경전)을 쓴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는, 자신과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는 대상들을 향할 때 만이다. 반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과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다. 나와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지 않는 글을, 우리는 읽을 수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고 느낀다! 이는 외부성(=타자)을 거부하는 것이다. 소통의 비극은 이러한 까닭에 일어나는 것이다. 

곰곰히 되씹어보게 되는 글이네요. '소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소통의 비극'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듯 합니다. 요새 관심사가 바로 '소통불가능성'이라서 여기에 눈이 확 쏠리는군요. 2009-06-09
17:26:59
  

 

상병 김태완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편적 사랑과 절대적 진리를 지향하는 것이 정녕 부정적이기만 한 일인가. 그러한 것들을 자기 안에서 정립하고 확고히 굳혀두는 것은 주위사람들과의 관계나 외부성을 받아들이는데에 걸림돌이 될 뿐이란 말인가. 바울에 의해 정립된 단지 외부적관점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막수에 의해 비판받을 지라도 그가 쓴 성경을 보고 힘을 얻고 그가 실천한 사랑이 진리적 사랑이라 생각하면 안되는 것인가. 저는 성경을 보다가 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인가라면서 바로 성경책 읽기를 접었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 중에는 성경을 읽으며 힘을 얻고 성경이 인류의 삶에 있어 가장 지표가 되는 책이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예수가 전파하고 실천하려 했던 사랑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지향해야하는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과연 가까이 있는 타자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예찬님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열렬하게 신과 인류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가까이 있는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열령히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봉사활동이나 자선활동들은 그럼 가식일 뿐인가요. 그러한 사람들이 진실로 타자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나요. 여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군요. 몇몇 열렬한 신봉자들이 그러한 사례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는 신앙에 대해 강요적 태도를 보임으로 인해 타자와의 관계도 소원해지는 사례를 보이지 않습니다.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서는 각자 사고하는 것이 다르고 개성이 있으므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기위해 고정적인 생각이나 관념을 가지기 보다는 유들유들한 사고를 소유함으로써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그 안에서의 진리와 사랑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유동성을 띄자는 생각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를 주장하다가 자칫 주관적 태도를 일관하는 사람 전체를 부정하려 드는 것 또한 이러한 생각을 다시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민주주의는 좋은 이념 입니다. 하지만 이는 마이너리티들을 부정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통을 통해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진리나 사랑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을 그들과 소통하기도 전에 미리 배재하려는 듯한 예찬님의 태도는 저에게 역시 부정적으로 다가옵니다. 2009-06-09
18:08:54
  

 

상병 김예찬 
  태완님의 리플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 주변에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을 부정하자는 이야기인가? 이 것은 배제가 아닌가? 

인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히자면, '정말로' 열렬하게 신과 인류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가까이 있는 타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몇몇 열렬한 신봉자'들의 사례가 아닙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태완님이 말씀하신 '몇몇 열렬한 신봉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열렬한 신봉자'가 아니겠죠. '나는 보편적/절대적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저 말 뿐인 것이 아닌 사람들을 '열렬한 신봉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열렬한 신봉자'들은 관계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는, 아니 고뇌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보편적, 절대적인 '답'이 나와있으니까요. 

제가 예전에 겪은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열렬한 신봉자'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와 함께 길을 걷다가, 어느 걸인이 저희를 붙잡고 구걸을 했습니다. 저는 줘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딱 잘라서 '죄송하지만, 당신께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 같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하는 말이, '저런 분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두 푼의 돈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다.'라고 하더군요. 

물론 저도 그의 표현 대로 '한 두푼의 돈' 보다는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어느 하나의 방법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빈민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모순, 복지 정책의 실패, 개인이 거리를 떠돌수 밖에 없게 된 파편화된 사회 등등.. 여기서 '영혼의 구원'이라는 절대 목표를 제시해 버리면 다른 방법들은 무시당하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 앞에서 절대적 진리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무력합니다. 수학을 생각해볼까요? 무한이라는 추상적 수 앞에서 다른 구체적 숫자들은 0과 마찬가지로 취급됩니다. 정말로 '열렬한 신봉자'라면 자신이 믿는 진리를 절대, 무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 주변에서 '열렬한 신봉자'를 그리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들 이름을 예수 찬양으로 지을 정도로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인 우리 엄마도 가끔은 고뇌하는 신자입니다!) 2009-06-10
07:55:07
 

 

상병 권홍목 
  간만에 2연타석 안타- 
이런글은 따로 꼬불쳐 두고 읽어야지요 
절대적인 진리를 쫓지 말라는, 한번쯤은 들어봤을만한 논제를 이런식의 내용으로 접하게 되니 머리에 전구가 반짝반짝 들어오는군요 

아 잊을뻔했네. 가지로. 2009-06-10
08:17:14
  

 

상병 진수유 
  제가 볼 때는 접근이 다른 것 같아요. 예찬님의 글쓰기와 사유 방식이 태완님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찬님은 다소 파괴적으로, 태완님은 다소 창조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두 분 모두 글과 사유를 생성한다는 의미에서는 모두 창조적이지만 말이예요. 예찬님은 지금 당장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찬님의 글들을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예찬님의 여러가지 능력들 때문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예찬님의 어떤 '의지'가 '개진'되어 나가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찬님의 경우엔 좀 더 '저층', '변두리'에서부터, '공론'과 '일반'으로까지를 다 아우르기 위해 스스로는 더욱 파괴적으로 사유하는 면이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섣불리 예찬님을 판단하게 될까봐 더이상 속내를 드러내기는 어렵겠습니다. 다양성을 지향하시는 태완님의 생각들 또한 제게는 좋습니다. 솔직히 태완님의 생각들이 제게 더 친숙하고 '다가오는' 것이예요. 그러나 인생 어차피 길게 보고, 모든 사람들의 생각들에 이타적으로 접근해 본다면 뜻밖의 소통도 가능하고 주체적인 결론 또한 더 수월히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2009-06-10
08:58:47
  

 

병장 이동열 
  예찬님의 글과 댓글을 읽으며 마침 어제 읽은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집이 생각납니다. 

한 에세이에서 장영희 교수는 제자의 자살을 막지 못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녀의 제자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일면식도 없지만(타과생이었거든요) 학교의 교수인 장영희 교수를 찾아오지요. 그런 그에게 장교수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지요. 하지만 결국 그는 자살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후에야 장교수는 후회를 하지요. 직접 그의 어둠속으로 함께 들어갔어야 했었다고. 

그리고 함께 스쳐지나갑니다. 니체의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 

바쁜 와중에도 좋은 글 올려주신 예찬님 감사합니다. 히히 



[독서후기]김예찬,1421번글<그저 사랑하기>에 대해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11 06:38:00, 조회: 151, 추천:0 


  가라타니 고진의 <진사이>론에 대한 독해를 읽고서, 저는 예찬 씨의 독해력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예찬 씨에 관해서 독해력에 관해서는 어떤 기묘한 객관성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분명 심적 여유가 그렇게 많지 않은 인트라넷 사용환경에서 누군가의 사유를 그만큼 정리하고 소화해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제가 가라타니 고진이나 슬라보예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좋은 철학자이기 이전에, 좋은 논술강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낱 말장난처럼 보이는 서양 철학사의 관념 놀음들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데서 시작합니다. 철학은 자기 나름의 철학사를 소화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예찬 님의 분명한 반헤겔주의와 반대로) 헤겔이 철학이란 개념의 자기운동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일 것입니다. 아마도 사유란 이렇듯, 말을 만들어내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사유의 스승들에 대한 엄밀한 비판적 '독해'에서 시작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떤 사유의 '단초'를 매일 확인하곤 합니다. 그러나 질투심 때문에라도 예찬 '예찬'은 이정도로 해 둬야겠습니다. 

                                                            * * *


  진사이는 소라이 그리고 노리나가와 더불어, 에도 시대의 국학파의 시조 정도로 알려진 일본의 사상가들입니다.(주1) 이들은 당대의 사상계를 주름잡고 있던 주자학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런 작업을 대개 '주석학'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 철학 비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봐도 분명해지는데, 니체의 경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대한 문헌학적 독해를 통해서, 그것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특히나 진사이 같은 경우, 사실은 실천적 학문의 성격에 가까웠던 유가를 형이상학적 체계로 확장시킨 주자학에 대해서 같은 '문헌학적' 작업을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주자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본래 실천적 성격의 종교 이면에 어떤 불변의 '원리'가 있다(전에 진수유 씨가 말씀하신 성서를 관통하는 통일적 원리를 발견하려는 어떤 경향처럼)는 전제로 끌고 가서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확립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진사이는 마치 루터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서 본래 그것을 확립시켰던 어떤 유일무이한 맥락들을 상기시키듯, 논어로 돌아가 그것을 엄밀히 독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루터가 아퀴나스를 비판했듯, 이렇게 진사이는 주자학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사이가 '대화'로 발견했던 <논어>는 사실 조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사실은 진사이는 삶 속에서 실천적,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에, 논어에 대한 강독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스승-제자 관계를 배제한 '세미나' 형식을 통해서 거기에서 '타자'의 문제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타자는 김예찬 씨가 탁월하게 설명했듯이, 같은 언어게임을 소유하지 않은 타자입니다. 말하자면 주자학의 원리가 아무리 우주론적이고 초역사적 불변의 법칙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모놀로그이며 결국 하나의 언어게임으로 귀착되고 맙니다. 가령 주자학에는 모든 사물에 모종의 원리가 관통하고 있으며,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서 누구나 자신 안의 본성을 궁구하다 보면 성인이 될 수 있다(수신치국평천하??)고 이야기하지만 이것 역시 알만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모놀로그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리'가 발견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마주침 속에서만, 말하자면 주자학의 전제를 받아들이지조차 않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뿐입니다. 논어는 바로 이러한 마주침, 즉 대화의 구조로 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예찬 씨는 이러한 '타자'를 다시금 내무반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예화에 뭔가 안일한 게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진사이는 이러한 타자를 '논어'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아무런 텍스트가 아니라 역사적 권위를 띈, 말하자면 '대문자' 텍스트입니다. 루터 역시도 '성경'에서 시작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실 타자는 그렇게 흔한 건 아니라는 방증이 아닐까요?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발견하는 타자는 사실 흔한 타자입니다. 전혀 주자학도 혹은 중세 신학도 모르는 일상에서 보는 타인들입니다. 그리고 성경과 논어라는 위대한 텍스트는, 역으로 이러한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발견된 겁니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 자체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진사이나 루터나 가라타니 고진이나 사실 쉽지 않은 문헌학적 비판과 지루한 세미나와 학습을 거쳐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보람된 일이지만 대가 없이 주어진 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타자'를 우위에 두고 사고하는 모든 철학이 귀착되는 아이러니로 연결됩니다. 그 아이러니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작 '타자' 자신은 '타자적'이냐는 것입니다. 

  가령 레비나스라는 철학자에게 타자란, 전혀 예기치 못한 문맥 속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윤리적 대화와 배려를 요청하는 낯선 자입니다. 모든 윤리적 문제는 바로 이 타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이 '타자' 역시 레비나스 자신의 유대교의 문헌들에 대한 독해와, 나치즘이라는 역사적 파국 속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타자들(희생자들) 자신은 정작 윤리적인 존재냐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내무실에 온 세상 물정 모르는 유학파 신병이 철학적 '타자'냐고 하면은 그렇지 않고 단순히 군기 에듀케이션 센터에 보내버려야 할 백치에 불과합니다. 이 신병이 레비나스주의자이거나 고진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타자성'은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문제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간과하고 넘어갈 때, 가라타니 고진이 발견한 '타자'나 '대화적 구조'는 범용한 것으로, 일종의 '여러분 우리 대화합시다'와 같은 진부한 실천윤리로 변질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진짜 '윤리'는 문제의 유학파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를 군기 에듀케이션 센터로 보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체 게밥바라가 말했듯이, 때로는 꽃을 꺽어야할 때가 있지만 그게 봄이 오는 걸 막지 못하듯이, 그런 윤리야말로 최고의 '기독교적 사랑'이자 타자를 향한 최고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1)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일본의 리 비판>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6:07:36 

 

상병 김예찬 
  어젯 밤 바디우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불현듯 그제 올렸던 독서후기('그저 사랑하기')에 무언가 심각한 오독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는 바디우의 일견 '교조적인' 단언에 또 다시 현혹(?)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일반성 ≠ 보편성'이라는 부분에 대해 제대로 생각 해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고, 두번째로 '타자'에 대하여 너무나 지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개론'이 원전을 심각하게 곡해하는 사례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또 다시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도 들었구요. 마침 원익님의 지적을 통하여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관의 예를 통하여 제가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기존의 '문제'가 아닌, 그 외부의 문제를 생각'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굳이 생활관을 예로 꺼내들게 된 것은 아무래도 친숙한 사례를 통해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 것 같구요. 따라서 조악한 비유로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조악한/선정적인 비유를 동원하는 못된 버릇!) 하지만 어떤 공동체의 근본 자체를 되묻는 신병의 등장은 '당연히 그래왔던' 것에 대하여 다시 인식해볼 계기를 마련하지 않겠느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아니, 어쩌면 제 희망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가르치다 - 배우다'는 역전됩니다. 저는 '백치'라기 보다는 '개념 없는' 이라는 표현이 그 신병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일테니까요. 그 신병이 결국 궁기 센터에 가게 되든, 아니면 대책 없는 폭력의 희생양이 되든 간에, 그의 등장 자체는 기존 체제에 하나의 충격으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기존 후임들의 '상식적인 불만들'은 신병의 충격을 통해서 '전제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는 문제 의식'으로 전화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신병은 '외부'이자 '충격'으로 등장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만남의 날이 기대 되는군요. 2009-06-11
09:05:49
 

 

상병 양동훈 
  사실 예찬씨의 '그저 사랑하기'를 보고 댓글을 적었다 지웠다 적었다 지웠다 하고 결국은 등록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 논의가 또 이렇게 깊어가는군요 낄낄 

재밌습니다 정말...캬 2009-06-11
13:36:10
  

 

상병 김태완 
  동훈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동훈님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여기가 힘드시다면 저와 학주님이 한창 논의 중인 곳으로 오셔도 되요. 전 동훈님을 언제나 환영한답니다. (삼국지 주절잡설 애독자라는.) 2009-06-11
14:06:59
  

 

일병 오학준 
  "이 신병이 레비나스주의자이거나 고진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도리어 '타자성'은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문제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맥락과 상관없이 문득 확 생각이 드는 것이, 타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나 서경식의 경우 유대인과 자이니치라는 위치, 즉 스스로 타자임을 강요받는 동시에 끊임없이 타자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인식과 강요 사이가 괴리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는가 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자의식을 가져야 할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는, 나에게 타자라는 지위가 강요된다 한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그 생각이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체념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보편에 대한 저항의 기점임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도 일정하게 알려진 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존의 보편에 저항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인지 하는 실용적인 의문... '자기의식의 배반'이라는 홍세화의 비판이, 무산노동자가 '근로자'의 삶에 적응한다는 혁명가들의 비판이, 조금은 단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2009-06-11
15:30:05
  

 

상병 박원익 
  사실 제가 제기한 문제도, 엄밀한 학적 논의에 기초하기는커녕, 사실은 일상적인 삶에서 외삽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찬 님이 든 사례가 아무래도 우리들의 경험에 보다 잇닿아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좋은 사례이고, 그게 엄밀히 따져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에서 어떤 신병이 기존의 짬질서에 문제를 제기할 때, 그게 '대화'가 되기는커녕 서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해서 하게 되는, 모놀로그의 향연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지요. 이러느니 저는 차라리 짬질서를 옹호하는 구세대적 인물이 되기를 선호하는 편이고요. 물론 짬 질서를 전혀 공유하지 않은 신병은 경험적으로 봤을 때 결국 짬질서에 흡수되거나 궁기 센터에 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실 그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만한 여유가 있는 양식 있는 고참의 입장에서이고요... 결국은 역시 신병도 모종의 규칙을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궁기 센터와 같은 부조리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치다-배우다 관계 속에 편입될 때에만, '타자'가 발견된다는 게 저의 생각이고요. 타자란 흔한 타자이지만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초월론적으로' 발견된다는 게 바로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예찬님은 이러한 관계 '외부'에서 그것이 발견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이렇게 본다면 타자의 일상성과 범속성을 아무리 강조되도 거기에는 반드시 '미화'되는 부분이 있다고 보고요. 

사실 가라타니 고진의 '타자론'은 저에게 줄곧 어떤 고민의 지점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피할 수 없는 획기적인 통찰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함정이 되기도 하지요. 실은 고진이 이러한 다성적 '대화' 속에서 발견되는, 그러나 경험 속에서가 아니라 초월론적으로 발견되는 타자를 보다 엄밀하게, 칸트적 물物로 다시 재발견하는 데서 어떤 단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9-06-11
18:53:54
  

 

상병 진수유 
  아주 잘 읽었습니다. 배울 것이 많습니다. 2009-06-12
08:50:32
  

 

상병 박원익 
  오학준/저랑 비슷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 역시 '타자론'에는 스스로를 '타자'로 보는 어떤 자의식에 빠질 수 있는 어떤 위험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넓게 봐서 아도르노나, 서경식 그리고 홍세화 모두 그런 위험에 처 있지는 않을까요? 2009-06-13
02:52:14
  

 

일병 오학준 
  원익 // 예,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좀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면, 일단 저는 타자론이라는 '이론'과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실천'이 과연 분리될 수 있는 맥락인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도르노와 서경식, 홍세화 모두 그들의 '타자' 이론이 그네들의 삶 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하면서도, 그들의 '타자'로서의 자의식이 그들의 사회적 맥락 하에서 '타당'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이니치, 망명자, 유대인 처럼 그 사회에 통합될 수 없는 존재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다만 스스로가 그런 자의식을 가지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그러한 자의식이 인정받지 못할 때 - 내가 왜 타자인가? 혹은 네가 왜 타자인가? - 이 타자이론은 사실로서 설 곳이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본다면 타자는 어떤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뜬금없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