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병장 김광철 06-21 07:01 | HIT : 382 



 철없던 시절, 끄적거린 雜文.......




<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1




 그것은 황량한 풍경이다. 언젠가 지리시간에 사진으로 본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처럼 메말라 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구름 낀 척박한 황무지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생명이라곤 그림자도 없고 죽은 모래만이 끝없이 펼쳐진 단조로운 사막보다는, 말라비틀어진 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깨진 돌이 구르는 우중충한 잿빛 황무지가 더 알맞아 보인다. 사막은 완전히 죽어있지만 황무지에는 아직도 생(生)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찌꺼기들이 처절하게 굴러다니고 있다. 죽은 자의 침묵보다는 죽어가는 자의 신음이 훨씬 더 비참해 보이는 법이다. 


"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혹독하고 잔인하다. 그래서 인생을 우습게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문득 <시네마 천국>의 대사 한 구절을 떠올렸다. 아니 그것은 나의 의지로 떠올린 것이라기보다, 이런 상황에서는 으레 조건 반사되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철저하게 길들여진 것이다. 묵직한 종소리 같은 충격이 나를 강타할 때 <시네마 천국>의 대사는 어느새 머릿속에 그득히 고여 있었다. 그리고 이내 찐득한 자취를 남기며 목덜미를 따라 넘쳐흐르곤 했다. 그것은 분명히 불쾌한 감촉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15년간의 삶을 통틀어서 그런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 불쾌한 감촉을 느끼는 때가 잦아졌다. 모두 그녀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분명히 이 대사를 떠올린 적이 있었는데.......언제였더라? 그래 아마 병원에서 그녀를 수발하던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모래처럼 서걱거렸지. 위암이라는구나. 길어야 6개월이래.


 나는 그때 순간 뒤통수에 뭔가 둔감한 충격을 느꼈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비로소 그 말의 뜻을 이해했을 때, 머리 안에는 어느새 <시네마 천국>이 그득히 고여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야 현실에서 몰래 뒤통수를 후려치는 영악한 종소리에 미리 대비할 수 있다. 으레 상황이 이쯤 되면 영화에서는 고뇌하는 주인공을 위로하듯 슬픈 배경음이 깔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관객들은 주인공을 위해 눈물을 훌쩍거려 주겠지.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배경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그 건조하고 아찔한 충격과 혼자 힘으로 맞서기 위해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거세해야만 한다. 나를 위해 울어줄 관객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속살에 박힌 이물질을 끊임없이 감싸 안는 조개처럼, 몸 안으로 뚫고 들어온 비수 같은 쓰라림을 혼자 힘으로 기우고 덧대며 끌어안아야 한다.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쓸데없는 감상의 곁가지들도 모두 쳐내버려야 한다.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리 조그맣고 여린 새순이라 할지라도 보는 즉시 잘라내야 한다. 마음을 놓는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행성을 삼켜버리는 바오밥나무처럼 자라나 굵은 뿌리들로 온몸을 묶어버릴 것이다. 조그만 새순을 우습게보다가 나약한 감상에 온몸을 칭칭 감긴 채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나는 이미 여럿 보았다. 부단한 가지치기를 통해서만 나는 강해질 수 있다. 언젠가 지루한 가위질이 끝나면 나의 의식은 곧고 앙상한 줄기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그 기분 나쁜 감촉에 몸서리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펼쳐진 광막한 황무지와 맞닥뜨리면서, 나는 또다시 목줄기를 온통 적시며 기어가는 끈적한 자취를 느끼는 중이다. 나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길들여졌고 종소리에 저항하기에는 나의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 그 메마른 풍경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실험실의 개가 되어 조건 반사의 법칙에 충실히 따르는 것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 내 앞의 황무지에는 회색으로 메마른 홍채가 둥글게 펼쳐져 있고, 빛 잃은 잿빛 동공이 그 위에 부유하듯 떠있다. 그랬다. 그녀가 퇴원한 후 나와 처음으로 마주본 그녀의 눈은 그토록 황량했다. 




2




 우리가족은 1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시골로 내려가 친척들과 함께 명절을 보냈다. 일년에 두 차례 들르는 우리들의 체취를 용케도 기억하고 있던 백구는 우리가족이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때부터 킁킁거리며 부산을 떨더니, 제일 먼저 대문을 열고 들어서곤 했던 나에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다. 


" 워메 우리 손주 왔는가~"


 할머니는 백구와 엉켜있던 나를 보자마자 두텁고 투박한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일년에 두 번씩 만나는 내가 그 사이 얼마나 자랐나 항상 무게로 가늠해 보곤 했던 것이다. 나는 날이 갈수록 포동포동 살이 오르는 중이었다.


" 와따 우리 손주 너무 많이 커부렸다. 인자 무거워서 할미가 업지도 못하것네."


 그러나 나는 그 후로도 여러 해 동안 명절 때면 항상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할머니의 등에 오르지 못했을 때, 아마도 그건 내가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너무 늙어버렸기 때문이리라.


" 할무니 나 저거......."


 할머니의 품에 안긴 채 낯선 시골집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문득 신기한 듯 돌담 벽을 가리키며 졸라댔다. 내가 가리킨 돌담에는 따사로운 햇살아래 초록빛 사마귀 한 마리가 몸을 발딱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마루에 내려놓고는 살금살금 돌담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일순간 재빠르게 팔을 휘두르는 듯 하더니 어느새 한손에 바동거리는 사마귀를 우악스럽게 쥐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 옜다 버마재비"


 그러나 할머니의 재빠른 손놀림을 경이롭게 쳐다보던 나는 정작 사마귀의 날카로운 세모꼴 눈과 시퍼렇게 날이 선 사나운 앞다리와 마주하자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세월의 상흔처럼 쪼글거리는 수많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그러나 검게 그을린 굵은 팔과 투박한 손가락, 실팍한 몸에서 여전히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웬만한 장정 한명이 할 분량의 농사일을 혼자서 해치우고 있었다. 서울서 내려온 아빠와 삼촌이 농사일을 돕겠다며 고추밭으로 따라 나섰을 때, 할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기어코 따라나선 두 아들들은 따가운 햇볕아래서 몇 시간을 못 버티고 기진맥진하여 그늘로 들어갔지만, 할머니는 한나절이 지나도록 끄떡없이 고추 따기에 여념이 없었다.  


" 이노무시키 다 큰 놈들이 그렇코롬 비루먹은 개 맹키로 기운이 없어서야 어디 처자식들이나 멕여살릴 수 있것냐. 긍께 집에 있으랑께 뭣 땜시 쫓아와서는......"


 할머니는 그렇게 핀잔을 주고는 고추가 가득 담긴 커다란 비료 포대를 거뜬히 머리에 이고 황혼녘이 다 되서야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들이 돌아갈 때 수확한 고추를 한 포대씩 안겨주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단지 억척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에게선 여느 시골아낙들과 다른 위엄이 느껴졌다. 할머니의 꼬장꼬장한 성격과 남자 못지않은 강단진 행동은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어쩌다 동네에서 사람들끼리 싸움이라도 붙을라치면 대번에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어 다툼을 잠재우곤 했다. 물론 싸움의 당사자가 할머니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대드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할머니는 조금도 꿀림 없이 사내 뺨치는 두둑한 배짱과 조리 정연한 말솜씨로 상대를 제압했다. 온 동네를 뒤집을 듯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한바탕 대거리를 벌이던 젊은이들이나, 입에 못 담을 육두문자를 따발총처럼 씨부려가며 머리끄덩이를 잡고 늘어지는 아낙네들도 할머니가 나서면 신기하게도 모두 순한 양처럼 별말 없이 중재를 받아들였다. 때문에 동네에서 싸움이 나면 사람들은 할머니부터 먼저 찾곤 했다. 


 이러한 여장부 기질은 아마도 오래전에 중풍으로 들어앉은 할아버지 대신에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역할을 해야 했던 할머니의 기구한 형편에서 비롯되었으리라. 화장실 가는 것조차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할머니는 소소한 부엌일에서부터 집안의 재산관리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렇게 혼자서 자식들을 키워내고 집안을 지탱해야 했기에,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나날이 굵어지는 팔뚝처럼 여물어갔고 갈수록 거칠어지는 두터운 손바닥에 비례하여 마음도 그만큼 강인해져야했다. 때문에 나이 지긋한 동네 어른들도 할머니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명절 때가 되면 며느리들은 부엌에서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여야했다. 안부를 물으러오는 어르신들이나,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은 젊은 사람들이 인사차 방문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젊은이들 대부분은 어린시절 장난을 치다 할머니로부터 따끔하게 호된 경험을 당한 적이 있는 왕년의 개구쟁이들이었다. 예전부터 동네아이들 사이에서 할머니는 '호랑이 할멈'으로 통했던 것이다. 하지만 개구쟁이들은 나이를 먹어 고향을 떠난 후에도 그 따끔했던 꾸지람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와 할머니께 인사드리곤 했다. 어쩌면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따끔함이 불러일으킨 어린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무서운 '호랑이 할멈'도 나에게는 솜털처럼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럽게만 느껴졌다.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의 다른 모습을 본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거동이 불편하여 늘 방 한켠에 누워있던 할아버지는 내가 13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상여가 나가던 날, 늦가을의 날씨는 꽤 쌀쌀했고 하늘은 찌무룩한 무채색으로 덕지덕지 칠해져 있었다. 누런 삼베 모자를 쓴 나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상여 앞에 시무룩하게 서있었다. 쩔렁거리는 방울소리가 상여를 재촉하고 있었지만, 며느리들과 고모의 처량한 통곡소리는 상여의 뒤꽁무니에 달라붙어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러운 흐느낌들 속에서 오직 할머니만이 눈물 한 방울 없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꼿꼿이 서있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울음소리들을 애써 떼어내며 상여는 천천히 힘든 걸음을 옮겼다. 나는 시린 손으로 사진을 꼭 붙잡고 방울소리에 맞추어 한발 한발 내딛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싹둑 잘린 벼 밑동들만 한없이 펼쳐져있을 뿐이었다. 바짝 말라 바닥을 들어낸 삭막한 논바닥 위로 청승맞은 방울소리만이 넓게 비껴나갔다. 나의 빨갛게 달아오른 손으로 문득 때 이른 진눈깨비가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를 묻고 내려오자 진눈깨비는 한층 굵어지고 있었다.


" 그 사람이 돌아가버리닝께 하늘도 맴이 아퍼서 저러코롬 진눈깨비를 뿌려주능마요."


 동네 이장 어른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두 눈은 어디에 홀린 듯 한점에 고정되어 있었고 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고모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대성통곡을 했다. 


" 하이고오...... 워쩔꺼나 불싸앙헌 우리 아부지...... 한번 마음 놓고 나댕기지도 못허고 허구헌날 방구석에만 박혀있던 우리 아부지 불싸앙해서 워쩔꺼나......." 


 옆에서 지켜보던 동네아낙들도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서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문객들의 위로에도 그저 희미하게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 묵묵부답이었다. 눈을 내리 깔고 방 한구석에 조용히 들어 앉아 있는 할머니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평소의 다감다정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굳게 닫힌 성문처럼 고집스럽게 다문 두 입술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주변에 온통 보이지 않는 성벽을 둘러친 것 같은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종의 위엄을 느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 경황이 없을 때, 오직 할머니만이 말없이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장례가 끝나고 조문객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끝내 조그만 흐느낌은커녕 한마디 말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너무 울어 기진한 채 누워있는 고모를 대신하여 그저 묵묵히 뒷정리를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려왔던 자식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날, 자동차에 탄 우리들을 배웅하며 드디어 할머니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 욕봤다"     


 그 한 마디 뿐이었다. 그 짧은 외마디 소리를 토해내는 것조차 힘에 부친 듯, 할머니의 입에는 다시금 굶은 자물쇠가 채워졌다. 아니면 입을 여는 순간 목구멍 밑으로 간신히 눌러놓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서둘러 닫아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욕. 봤. 다 사이사이에 습기를 머금은 흐느낌이 희미하게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짧은 인사로 자식들을 떠나보낸 할머니는 자동차의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얼마동안 할머니는 시골집에서 혼자 살았다. 이제 제사 때나 명절 때마다 가족이 시골로 내려가는 대신 거꾸로 큰 아들인 아빠가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곤 했다. 할머니는 유독 제사지내는 것에 집착했기 때문에 올라올 때마다 황금빛 제기(祭器)들을 꼭꼭 챙겨오곤 했다. 특히 할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오면 그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제삿날 며칠 전부터 서울로 올라와서 손수 음식을 장만했으며, 며느리들이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는 기색이 보일라 치면 무섭게 재촉했다. 그리고 제사 당일 아침이 되면 가져온 제기들을 꺼내 나란히 늘어놓고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 황금색 그릇들은 더 이상 닦지 않아도 될 만큼 누가 봐도 충분히 깨끗한 상태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마치 사랑스런 자식들을 돌보는 것처럼 조심스레 그것들을 닦고 또 닦았다. 제기들을 닦는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도 진지해서 어떤 신성한 의식처럼 보일지경이었다. 그렇게 정성어린 손길 덕택에 눈부신 윤기를 두른 황금빛 제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제사상 앞에서 자식들이 제사 드리는 모습을 할머니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특히나 할머니의 눈길은 늘 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 니는 우리 이씨 가문 장손이니라. 알것냐? 니가 지금부텀 조상님을 잘 모셔야 나중에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벱이여. 내말 알아 듣것냐?"


 할머니는 올라올 때마다 매번 확인하듯 나에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마치 내가 황금빛 제기라도 되는 양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곤 했다.




3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이 넘어가자 자식들은 할머니에게 서울로 아주 올라오시라고 설득했다. 할머니는 시골집이 좋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자식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시골집은 나이 많은 할머니가 혼자살기엔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 힘든 농사일은 그만 두시고 서울로 올라와서 손자 손녀들 재롱도 보면서 편안히 지내시라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오랜 설득 끝에 결국 할머니의 고집이 꺾였다. 할머니는 서울로 올라와서 자식들의 집을 차례로 돌며 지냈다. 즉 처음 1달은 큰 아들네 집에서, 다음 1달은 둘째아들의 집에서, 그 다음 1달은 딸네 집에서, 그리고 다시 큰 아들네 집으로.......이렇게 할머니는 서울에 머무르는 내내 뺑뺑이 돌듯 자식들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할머니에게 서울은 아마도 하나의 거대한 미로 같았으리라. 한평생 혼자 힘으로 타본 것이라곤 고작해야 경운기나 낡아빠진 마을버스가 전부였던 할머니에게,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지하철 노선표를 이해시키기란 처음부터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 도대체 이런 구렁이들 모냥 몽켜있는 것을 타고 워디를 워쩌크름 돌아 댕긴다는 거시여?"


 할머니는 생전 처음 보는 지하철 노선표를 의아스럽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더군다나 할머니는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역 이름을 알려줘도 글자를 읽지 못했으므로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할머니가 헷갈리는 것은 지하철뿐만이 아니었다. 종종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곤 해서 우리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 무신 놈의 집들이 다 요놈이 그놈 같고 그놈이 요놈 같은지 원......."


 경찰에 실종신고까지 하는 소동 끝에 동네 파출소에서 발견된 할머니는 돌아오면서 멋쩍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이런 사고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계속되자 할머니 혼자서는 외출은커녕 현관문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도심 속에서 할머니는 철없는 꼬마와 다름없었다. 외출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할머니가 혹시나 다른 길로 새지는 않는지, 넘어지지는 않는지 옆에서 항상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지리도 모르고 까막눈인 할머니가 시내에서 길을 잃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서울은 거대하고 완벽한 하나의 미로였다. 할머니가 그 거대한 미로에 빠져 미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외출이 어려워지자 할머니는 자연히 TV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TV를 보면서도 프로그램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문맹이라는 장애 때문에 TV자막을 읽지 못한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운동경기방식을 몰라 스포츠중계를 보면서도 득점은 어떻게 하는지, 심지어 지금 누가 이기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할머니는 영화나 드라마의 기본적인 줄거리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 근디...... 아까부텀 나오던 그 이쁜 색시는 왜 안 보인다냐?"
" 그 여자는 아까 차에 치여 죽었잖아요."
" 워메? 아까 죽었던 그 색시 아녀? 다시 살아났능가보네......."
" 아이참......할머니 이건 과거회상 장면이잖아요!"


 이와 같은 답답한 대화가 몇 번 계속되자 할머니는 점차 입을 다물어버렸다. TV에 나오는 것들 중에 할머니가 그나마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재미있어했던 것은 다름 아닌 '광고'였다. 수십 초짜리 짧은 광고들을 보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이해능력이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비자를 유혹하기 위한 감각적인 영상들은 할머니의 눈을 충분히 즐겁게 해주었으리라. 이해할 필요가 없으면서도 재미있는 화면을 보여주는 광고들을 할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른 프로그램에는 흥미를 잃은 채 오직 광고만 쫓아다녔다. 그렇게 하루 종일 TV앞에 혼자 앉아 광고를 쫓아 채널을 돌리는 날들이 점차 늘어갔다.


 할머니가 TV를 독점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할머니와 우리 가족과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 할머니는 점차 가족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일에 바삐 열중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말없이 화석처럼 굳어진 채 꼼짝 않고 TV만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외출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집안에 갇혀 지내다시피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할머니의 말수는 더욱 줄어들어 하루에 한두 마디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심지어 우리들은 할머니를 집 한 구석에 늘 똑같이 앉아있는 가구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할머니는 이제야 진정으로 도시인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할머니가 오기 전에도 우리 가족 간에는 별 대화가 없었다. 구성원이 한명 더 늘었다고 해서 갑자기 화기애애한 가족이 될 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비단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도시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내가 타인에게 무관심하듯이 타인도 내게 무관심하기를 바랬다. 덕분에 겨울이 되면 하루에도 몇 명씩 노숙자들이 길거리에서 얼어 죽었으며, 죽은 지 몇 달이나 지난 독거노인이 심하게 부패된 시체로 심심찮게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소식에도 역시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잘해야 TV뉴스의 단신이나 신문의 토막기사정도로 다뤄질 뿐이었다. 그나마도 하루만 지나면 사람들은 기사내용을 모두 잊은 채 다시 자신만의 일에 몰두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바쁜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할머니도 점차 이러한 생활방식에 물들고 있었다.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그나마 바깥구경을 할 수 있었던 날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는 때였다. 서울로 올라와서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는 고모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 교회 때문에 제사를 소홀히 한다고 고모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삼촌은 할머니를 교회에 데려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만, 고모는 막무가내였다. 주일이 되면 꼬박꼬박 찾아와서 할머니를 데려가곤 했다. 할머니도 꽤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눈치였다. 고모 집에 가있을 때는 주일뿐만 아니라 매일 새벽 예배까지 나간다고 했다. 짧았던 서울에서의 생활동안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열성을 보인 대상은 아마도 '교회'가 유일했을 것이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혼자 앉아서 찬송가 비슷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가사는 분명 찬송가인데 곡조는 옛날 민요가락인 경우가 많았고, 어떤 날엔 아예 가사는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대신한 채, 순전히 노랫가락만을 흥얼거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곡조라는 것도 찬송가에서부터 옛날민요, 케케묵은 유행가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바뀌기 일쑤였다.


 그렇게 열심히 나가던 교회에서도 할머니는 별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선 무엇보다 문맹인 할머니는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다. 찬송가도 가사를 읽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부르는 것을 듣고 따라 불러야만했다. 목사의 설교도 할머니에게는 난해하게만 들렸으리라. 자연히 할머니는 다른 교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교회에서도 점차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리고 이상했던 것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제사에 집착하는 할머니의 모순적인 태도였다. 고모가 제사는 미신이며 우상 숭배라고 아무리 입이 닳도록 이야기해도, 할머니의 고집은 완강했다. 고모네 집에 가있던 때에도 제삿날이 가까워오면 어김없이 고모를 앞세우고 큰 아들네 집으로 향하곤 했다. 황금빛 제기들은 할머니의 변함없는 정성으로 여전히 반들반들 윤이 흐르고 있었다.


 서울 생활이 계속 될수록 할머니는 시드는 꽃처럼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물론 나를 제외하곤 가족 중 아무도 그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고, 사실 그런 것에 별 관심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갈라지고 있던 균열들의 미세한 파열음을 내가 뚜렷하게 감지하게 된 것은 고모네 집에서였다. 나는 방학을 맞아 며칠 고모 집으로 놀러와 있었고 마침 할머니도 역시 고모 집에 있을 때였다. 웬일인지 할머니는 날짜가 한참지난 신문 한 장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곁에서 놀고 있던 고모의 외동딸 지혜를 조심스레 부르더니, 신문 광고판을 가리키며 묻는 것이었다.


" 지혜야 요기 써있는 글자가 뭣이 다냐?"
" 에이...... 외할머니는 어른이 그런 것도 몰라? 여.름.맞.이.바.겐.세.일 이잖아."
 한글을 막 깨우친 다섯 살짜리 지혜는 할머니가  짚은 글자들을 자랑스레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 여......름......맞.......뭐시라고?"


 그때야 나는 알았다. 마을에서 사내 뺨치는 배짱으로 소문났던, 호랑이 할멈이 되어 개구쟁이들에게 호통을 치던, 당당한 여장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대신 거기에는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 핀잔을 듣는, 낡은 신문의 광고판 한 귀퉁이를 손으로 짚으며 떠듬떠듬 읽어 내려가는, 왜소하게 쪼그라든 어느 늙은 노파가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실핏줄 같던 미세한 균열들은 점차 눈에 보일 정도로 넓어지고 있었고, 결국에는 전체를 무너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붕괴의 순간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는 점심식사 후에 심한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소화제를 먹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할머니는 통증으로 정신까지 혼미해진 듯이 보였고 결국 구급차를 불러야했다. 정밀검사가 이어졌으며 입원은 이상스럽게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퇴원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와 처음으로 마주본 그녀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4



 그녀의 병명은 위암이었다. 길어야 6개월이라고 했다. 의사는 병원에서 할 수 일은 없다며 퇴원을 권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갑작스런 비극에 모두 놀라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런 결과는 어차피 그녀가 서울로 올라올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거나 다름없었으므로. 조그만 개미구멍 하나가 결국엔 거대한 댐 전체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기에 나는 전혀 놀랄 필요가 없었다. 


 퇴원한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원 전에는 입을 거의 열지 않던 그녀가 퇴원 후에는 유난히 말이 많아졌다. 그러나 두서가 하나도 없이 횡설수설했으며 발음도 불명확해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종양의 독한 기운은 이미 그녀의 정신마저 게걸스럽게 삼켜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매일 의사가 처방해주는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는데, 그 양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점차 아기가 되어 갔다. 진통제에 수면제성분이 들어있는지 그녀는 하루에 열 시간이 넘게 잠을 잤고, 깨어나면 그 해독할 수 없는 웅얼거림을 반복하며 갓난아기처럼 칭얼거렸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에는 큼지막한 기저귀가 채워졌으며, 식사시간마다 우리들은 그녀의 끝없는 반찬투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엄마가 어르고 달래서 직접 떠먹여 줘야 겨우 입을 벌렸지만, 그나마 떠 먹여주는 것도 반 이상 도로 뱉어버리곤 했다. 다만 그녀가 아기와 다른 한 가지는 포동포동 살이 오르는 대신 무섭게 말라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때때로 살은 다 없어지고 뼈만 남아서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투병생활이 길어질수록 우리가족은 모두 기진맥진해졌다. 오직 그녀만이 달뜬 얼굴 한 채 쉼 없이 웅얼대고 있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녀가 죽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그녀가 마음대로 집을 나가버려서 온 아파트단지를 뒤지며 난리를 쳤을 때, 우리는 제발 그녀가 죽어주기를 바랬다. 기저귀에 한가득 누런 똥을 싸놓아 온 집안이 역한 냄새로 진동하곤 했을 때, 우리는 코를 틀어쥐고 그녀가 빨리 죽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기저귀를 차고 며느리가 떠주는 요구르트를 천연덕스럽게 넙죽넙죽 받아먹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을 때, 우리는 그녀를 어서 데려가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토록 간절한 염원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죽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말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던 어느 날, 그녀는 내 앞에서 조용히 스러졌다. 퇴원한지 꼭 6개월 만의 일이었다.          




5




 웬일인지 그녀는 울상이었다. 볼과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은 더욱 쭈그러들었고, 그 무언가가 금방이라도 터져 흐를 듯이 두 눈동자를 부풀리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영전사진 속의 그녀는 그렇게 울상인 채로 조문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문객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녀의 얼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조심스럽게 부의금을 상자에 넣은 뒤 경건한 표정으로 영전 앞으로 가서 절을 하거나 기도를 하고 우리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고 그것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녀의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상인 그녀의 얼굴과 마주 보며 나는 좀 우스웠다. 심각한 얼굴을 한 조문객들의 위로를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애써 웃음을 내리눌러야 했다. 그녀의 관을 덮고 있는 흰 천에는 빨간 십자가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고모가 가져와서 덮은 천이었다. 한편 영구靈柩 앞으로는 그녀가 그토록 아끼고 항상 윤이 나게 닦아놓았던 제기들이 황금빛 반짝임으로 시시덕거리며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붉은 십자가와 황금빛 제기. 둘은 그렇게 서로 시치미를 뚝 떼고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 기묘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구멍을 간질이며 비집고 올라오는 키득거림을 가까스로 꾹꾹 눌러 삼켜야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바싹 말라 모래처럼 바스러진 후에도, 도무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성이 차지 않았는지 그녀의 영전까지 모순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던 것이다.


 고모가 예닐곱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빈소로 들어섰다. 장례예배를 드리러온 목사와 교인들이라고 했다. 검은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와 몇 명의 여자들은 손에 두툼한 성경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영전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를 했다. 그런데 황금빛 제기에 시선이 닿은 한 남자의 표정이 문득 굳어졌다. 예배를 제사 도구 앞에서 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망설이던 아빠는 고모의 성화에 못 이겨 제기들을 치우는 것을 허락했다. 말끔히 치워진 그녀의 사진 앞에는 제기들 대신에 두툼한 성경책이 한권 펼쳐졌다. 그리고 그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장례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목사는 그녀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고 말했다. 설교가 끝나자 마지막 순서로 찬송이 이어졌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고모는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진혼곡은 어딘지 모르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함과 서글픔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진혼곡의 슬픈 곡조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삼촌의 양미간에 잡힌 찡그림을 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삼촌은 교인들이 제기를 치울 때부터 문 옆에 기대어 서서 예배가 끝날 때까지 팔짱을 끼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삼촌은 고모가 교회 때문에 제사를 소홀히 한다며 항상 못마땅해 했었다. 할머니가 고모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고모와 큰 말싸움까지 했고, 아직까지 둘의 관계는 좀 서먹한 편이었다. 그런 삼촌에게 장례예배가 달갑지 않은 건 당연했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와 교인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삼촌은 구석에 치워져있던 제기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던 조회 시간 체육선생의 고함소리처럼 옹골진 고집스러움이 배어있었다. 그 황금빛 그릇들이 있어야할 자리는 처음부터 여기였다는 듯이 삼촌은 하나하나 정확하게 들어서 마치 도장을 눌러 찍듯 그녀의 사진 앞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삼촌의 고집스러운 손놀림도 펼쳐있던 두툼한 성경책만은 고모의 울음 섞인 만류로 끌어내리지 못했다. 그녀의 영전사진 앞에서 제기들과 성경책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우습다기보다 차라리 부조리한 풍경이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울상인지 알 것도 같았다. 


 발인(發靷)날이 되자 관은 납골당으로 옮겨졌고 그녀는 불길 속에서 타올랐다. 이미 마른 모래처럼 무너졌었던 그녀는 이제 정말로 한줌의 재로 화(化)하였다. 영전까지 따라와 모순으로 가득채운 그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녀는 한 번 더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죽어서도 울상이었던 그녀는 다시 한번 바스러짐으로써 이제는 정말로 평안히 죽을 수 있으리라. 엄마와 고모는 비취빛 단지에 담겨지는 그녀를 보며 오열했다. 심지어 아빠마저 안경을 벗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아빠의 모습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어떠한 감정의 파문이나 출렁이는 흐느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나는 다만 약간 얼굴을 찌푸린 채 비취빛 단지를 고요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재가 되어 비취빛 단지에 담겼다. 이것은 명백하고 타당한 사실이다. 쓸데없이 찔끔거려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조한 의식으로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들의 무수한 흐느낌을 뒤로한 채, 오직 곧고 앙상한 줄기만이 나의 의식을 겨누고 있었다. 그렇다. 드디어 나는 성공한 것이다. 끝없는 가위질의 연속이었던 지루한 가지치기 끝에 비로소 나는 강해졌다. 사막 같은 세상을 견뎌 내기 위해서는 몸 안의 습기 찬 감정들을 모두 탈수시켜 버려야 한다. 사막은 조금의 습기라도 보면 참지 못하고 덤벼들어, 무엇이든지 앙칼진 두 손으로 꽉 눌러 짜버리기 때문이다. 사막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오아시스를 기대 하는 것은 너무나도 나약한 생각이다. 오아시스를 만나기란 쉽지 않으며 그나마도 대부분 말라버린 지 오래였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사막과 같이, 사막처럼, 사막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모래와 같이 메마른 서걱거림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뜨거운 햇볕을 견디는 선인장의 두껍고 거친 껍질과 날카로운 가시를 닮아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곧고 앙상한 줄기를 지팡이 삼아 사막을 무사히 횡단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해지지 못한 자는 날카로운 햇볕에 꿰인 채 천천히 말라가겠지. 그리고 결국 한줌의 티끌로 변해 사막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사막과 같이, 사막처럼, 사막의 일부가 되겠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항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까.


 이제 더 이상 종소리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 당황스럽고 익숙지 않은 액체를 흘리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녀가 첫 번째 죽음을 맞았던 그날의 이상스런 경험은 한번이면 족하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앞으로 다시는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6




 그녀의 첫 번째 죽음은 늦여름의 삼복더위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을 무렵, 킬킬거리며 우리 집을 노크했다. 그날 심야의 열대야로 잠을 설쳤던 나는 뒤늦은 새벽잠에 혼곤히 빠져 있었다. 그런데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가 눈꺼풀을 억지로 추켜올렸다. 엄마의 다급한 음성이 날카롭게 귀를 후벼 팠다. 직감적으로 사태를 파악한 나는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거실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은 무섭도록 샛노랗게 변해 있었고, 지금까지 그녀를 애써 지탱하던 생(生)의 나사못은 헐거워져서 금방이라도 튕겨나갈 듯이 위태롭게 삐걱대고 있었다. 엄마는 옆에서 소리치며 안간힘을 썼지만 샛노란 얼굴은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순간 그녀의 얼굴에 가느다란 파문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 벌린 입술 사이로 그 파문의 동심원 한 자락을 가득이 머금은 채, 샛노란 얼굴은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숙여진 그녀의 입에서는 갸르릉거리는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몰래 감추어두었던 자신만의 보물을 혼자서 꺼내어보는 어린애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고 수줍은 듯이 그녀는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자신의 마지막 영혼을 내뱉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눈과 마주한 내 앞에는 처음에 보았던 황무지가 펼쳐졌다. 황무지는 이제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앙상하게나마 생명을 유지하던 나무들은 모두 스러지고 있었고, 소리 내며 굴러다니던 돌멩이들도 급속도로 풍화되었다. 모든 것이 고운 모래와 먼지로 화化했으며, 모든 것이 그녀의 얼굴처럼 노랗게 변색되었다. 이제 그녀의 눈에는 황무지의 신음은 사라지고 대신 끝없는 사막의 정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노란 모래로 펼쳐진 홍채의 지평선 너머로 검게 타버린 동공이 저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덜미의 기분 나쁜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도 깨끗하다. 모든 것이 어떤 감정의 굴절도 없이 명징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녀는 죽었다. 이것은 명백하고 타당한 사실이다. 더 이상 종소리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아무리 침을 흘려도 음식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바싹 마른 그녀의 시체는 생각 외로 무거웠다. 그녀는 모든 회환과 상념을 앙상한 육체에 차곡이 쌓아둔 채, 숨결을 타고 떠난 것이다. 나의 여물지 않은 팔뚝으로 두껍게 퇴적된 슬픔을 들어올리기에는 힘이 부쳤다. 힘겹게 그녀를 방안으로 옮겨서 반듯하게 눕히고 눈을 감겼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깊은 샘을 보았다 아니 보고 말았다. (만약 보지 못했다면 훨씬 좋았으리라.) 그것은 다리 사이의 깊고 어두운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때 그 곳에선 모든 것이 샘솟았었지. 세상 모든 만물이 그 곳에서 솟아올라 흘러가곤 했다지. 아빠와 나도 그곳에서 뛰쳐나와 맨 처음으로 세상과 조우했다지. 사막을 횡단하다 지칠 때면 우리는 어린 사슴 같이 헐떡거리며 그 오아시스로 돌아와 메마른 목을 축이곤 했었지....... 그러나 내가 본 샘은 바싹 말라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을 길어내던 심연조차도 모진 사막의 열풍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닥을 드러낸 존재의 시원을 보는 나에게 묘한 떨림이 덮쳐들었다. 조심해야 한다. 까딱하면 종소리의 농간에 또다시 휘말릴 것이다. 그녀는 죽었으며 샘은 말라버렸다. 이것은 타당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빌어먹을.......


 그러나 기어코 나는 또다시 뭔가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목덜미 쪽이 아니다.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지도 않는다. 이건 뭐지? 목줄기가 아닌 뺨의 둥근 곡선을 타고 무언가 뜨끈한 것이 흘러내리고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래서 당황스럽고 익숙지 않은 액체가 나의 눈에서 솟아나고 있다. 그것이 흘러내려 남기는 뺨 위의 자국마다 왠지 모를 뜨거운 기운이 피어나서 얼굴을 붉게 데웠다. 그 화끈거리는 뜨거움 속에는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다량의 '부끄러움'과 약간의 '서러움'이 함유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극소량의 '그리움'도 그 속에서 요동치고 있을지 몰랐다. 이놈의 종소리는 끝까지 말썽이군. 나는 부옇게 흐려오는 시야를 감추기 위해 멋쩍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이며, 안간힘을 다해 어지럽게 자라난 곁가지들을 하나씩 쳐내기 시작했다. 오직 곧고 앙상한 줄기만을 남겨야 한다. 71세의 그녀는 15세의 소년이 보는 앞에서 2004년 8월 11일 7시 15분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이것은 명백하고 타당하다. 그렇다. 슬픈 배경음이나 훌쩍이는 관객 따위와 전혀 상관없는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인 것이다.......   




 나와 마주한, 밤이 깊은 사막의 말라버린 오아시스 위로 눈물을 머금은 차가운 동공이 떠오르고 있었다.










 병장 배진호 
< 가지로>... 저도 해도 되나요? 
 하아 멋진 글이네요. 그리 어렷을적은 아니지만, 아마도 저희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군요. 저희 할머니도 꽤나 고집이 쎄셨던 분이셨는데, 
 아마 돌아가시기 약 3년 전 부터 말도 없으시고, 힘도 없으시고... 
 그렇게 마치 아이 같이 살다가 고이 잠드셨거든요... 

 문제는 제가 그 상황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도 못했다라는게... 
 아마도 훨씬 더 슬픈일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분명 할머니의 그 어릴적 사랑은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죠. 06-21   

 일병 이재민 
< 가지로>.. 기성작가의 글이 아니길 기대합니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완성도를 보여주며, 또 그만큼 기성작가들의 어투와 화법을 놀랍도록 잘 따라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여튼 마지막 문단에서는 일종의 떨림도 느껴지는군요 06-21   

 병장 김선목 
< 가지로> 병영문학상 출품하시는건가요? 
 출품하셔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한편의 단편소설을 보는듯하네요. 
 그나저나 글 서두에 적혀있는 
" 철없던 시절, 끄적거린 雜文......." 
 이부분에 털썩... 
 철없던 시절에 끄적거린게 이정도라니요...(울음) 06-21   

 병장 진규언 
 이미 3표를 넘어 사표이지만 <가지로> 추가합니다. 광철님은 얼마 남지 않으신 그날까지 아예 옆 게시판에서 글을 쓰시는게 어떨런지요. 여름날 책마을의 복이 될듯합니다. 06-21   

 상병 김현진 
 어울리지 않은 장소가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 또한 공간 속 오브젝트 중 하나일 뿐이니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지로>는 매너지요. 06-21   

 병장 양각산 
'2 개월여간 침묵을 지키던 김광철 선수, 4일동안 3번의 추천글 선정으로 사상 초유의 '최단기간 가지로 헤트트릭' 기록을 세웠습니다! 정말 대단한 골 결정력이 아닐수 없네요.' 

... 라는 캐스터의 해설이 들려오는 듯한 대단한 광경이군요. 책마을 짬밥이 얼마되지 않아, 전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기록임에는 분명한 듯 합니다. 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