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차니즘, 니트족, 그리고 히키고모리.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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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재단할 수 없는 욕망들이 있다. 히키고모리는 대표적으로 그러한 욕망을 가진 일종의 아웃사이더적인 존재다. 물론 어떤 히키고모리들은 자본에 의해 포섭되기도 한다. 가령 안노 히데아키처럼. 하지만 대부분의 히키고모리들은 도저히 자본으로는 재단 불가능한 엄청난 것들을 욕망한다. 기존의 소비에 의한 마케팅 혹은 경제관념 같은 것들은 그런 비자본적인 욕망을 포획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히키고모리를 단순히 루저로 판단하는 관점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현 사회에서 욕망의 대상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틀어박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루저가 아니라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 또한 아웃사이더적인 욕망이다. 그러니까, 가장자리의 욕망인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심을 욕망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중심을 욕망한다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론이다. 아웃사이더들은 오히려 가장자리를 욕망하며 그래서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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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편하게 사는 것과 행복은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귀차니즘에 빠지고 히키고모리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이, 사회가, 쉽고 편하게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곳이라는 근원적인 절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유나바머가 말한 것처럼 어떤 권력과정에 포함되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앞에서 말한 권력과정이란 하나의 목표,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 그리고 달성, 그 세가지 요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쉽고 편한 것은 그런 권력과정을 인간에게 선사해주지 못한다. 단적인 예로 현대인은 그 어떤 시대의 인간들보다 쉽고 편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예를들어 원시인들보다 더 행복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쉽고 편한 삶이란, 한번 획득하게 되면 더 이상 지속적인 행복을 주지는 못하는 것인 반면에 권력과정이란 항상 상승하고 강화되는 식의 행복을 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이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어떤 감각, 그 감각이 바로 권력과정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인간은 절대 행복해 질 수가 없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유나바머에 의하면 권력과정은 크게 세 요소로 나뉜다. 쉽게 말해서 목표, 노력, 달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목표를 위해 일하며, 타인의 달성을 위해 일한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소비해가면서. 즉, 권력과정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대부분의 인간에게 권력과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자기자신이 아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쾌한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무력감은 한 개인이 해소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결정적인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입시 제도 앞에서의 무기력함,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제도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모습들, 조금이나마 안정을 얻고 싶어하는 심리 같은 것들은, 개인이 해소할 수 없는 이 무력감으로부터 귀결되는 모습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의 편린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전쟁이라도 나서 세상이 확 뒤집어져버렸으면 하는 충동적 욕망도 느끼곤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엔 니트족이나 귀차니즘 혹은 히키고모리 같은 것들을 라이프 스타일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권력과정의 부재에 의해 결국 그 논리적 귀결인 그저 쉽고 편한 삶을 선택하고 있는거라 생각한다. 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것들이 헛된 희망이라는 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은 단순히 무기력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똑똑하다고도 할 수 있다. 사회의 기만적인 술수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사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니트족이나 귀차니스트 혹은 히키고모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오히려 적극적인 가담을 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권력과정엔 항상 사회적인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게 바로 권력과정인 것이다. 파이트클럽의 타일러 더든은 타인의 목표와 타인의 달성을 위해 뼈빠지게 일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스스로 권력과정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것일 뿐이다. 그게 비록 반사회적인 방향이라고 해도 그들은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로 굴러갈 때 보다는 훨씬 더 행복했던 것이다. 사회라는 것은 한 개인이 어쩌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것이고 그래서 개인들은 어떤 큰 차원의 권력과정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차원의 권력과정을 충족시키는데 성공하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이다. 가령 CEO라든지, 정치가라든지 하는 사람들 정도. 많은 젊은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혹은 어떤 기업인지는 상관않고, 무조건 CEO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 것에는 이러한 심리가 어느 정도는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심리는 망상에 가깝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 그것은 이미 현대사회에선 굉장히 드문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술가라든가 하는 예외도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예술가가 그렇게 부러움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고 편하게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다. 연애같은 것으로 행복을 누려보려 하기도 하지만 사실 연애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연애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가 바로 니트족, 히키고모리, 귀차니즘이라는 시대적 현상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연애를 할 수 있고 거기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만큼 영리한 것이다. 또한 사회가 제시하는 권력과정에 '포섭'되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두 가지의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저 쉽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목표나 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이룰 방법이 없다면 그런 건 의미가 없다. 내 생각에 히키고모리나 귀차니즘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니트족들은 오히려 너무도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한다.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너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원하는 것이 이미 이 사회에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틀어박혀서 그저 쉽고 편하게 살고 싶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 어느 정도의 꿈이라면 노력을 통해 달성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예술가, CEO, 정치가, 뭐 사실 이런 정도의 꿈이라면 충분히 노력으로 가능하다. 물론, 상대적으로 유리하거나 혹은 불리하거나, 이런 것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불리한 것과 불가능한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내 생각엔 히키고모리가 되거나, 귀차니즘에 빠져 니트족이 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꿈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불가능성이 그들의 의욕을 빼앗게 되는 것이다. 니트족이 몇십만이 되고 히키고모리가 몇백만이 되는 사회는 그들을 단순히 비판하고 사회문제로 단죄하려 들기 전에 그들에게 과연 행복의 길을, 그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던가 하고 자기비판을 먼저 해 봐야 한다. 권력과정에 참여할 수 있고,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차니스트가 되거나 니트족, 히키고모리가 된다면 그건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의 에너지 자체가 태생적으로 부족한 것이겠지만, 행복해지려고 해도 방법이 없고, 루트가 없고, 희망이 없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니트족이 되고 히키고모리가 된다면 그것은 꼭 그들의 잘못만은 아닌 것이다.

권력과정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꼭 밑바닥 인생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이룬 사람들이 더욱 불행하다. 권력과정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야말로, 더 올라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목표가 부재하기 때문에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칼리큘라나 네로가 그랬듯이 거기엔 파멸 밖에는 출구가 없다. 그러니까, 지금 위치는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려면 권력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노예라 할지라도 권력과정을 거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반면에 세계를 전부 가진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권력과정이 없다면 불행한 것이다. 목표, 노력, 달성이라는 세 요소에서 근본적으로 차단당한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그런 불행하고 무기력한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는, 특히 복지가 구성원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지는 오히려 자살율을 높이고 있을 뿐이다. 호주에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한달에 80만원이 나온다고 한다. 서양에선 홈리스들조차 우리 기준으로는 부자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할까. 자살율이 높고 다들 마약과 술에 쩔어지내고, 그게 과연 행복일까. 사실, 복지야말로 행복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인들에게조차 그렇다. 시니바나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노인들 역시 권력과정을 필요로 한다. 은행을 터는 것이 그들에게는 행복인 것이다. 은행을 털고, 그게 만족되고 나면 또 다른 권력과정이 필요하다. 다케다 신겐의 보물을 찾으러 그들은 또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만족은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과정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자기초월, 자기극복, 상승 강화되려는 권력의지가 충족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것이다. 자기보존과 상태유지, 안전빵만으로 사람은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쉽고 안전하고, 예측가능한 것을 추구하며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권태와 불쾌한 무력감, 무기력증, 무감각함, 우울증, 그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으로 돈이나 물질에 대한 강박관념, 그런 것에서 자유로운, 그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현대인 중에서는 극히 드물 것이다. 

행복은 절망의 반대말이다. 불가능의 반대말이다. 행복은 이 세상과, 나 자신과, 승부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숨이 붙어있는 인간들은 원칙적으로는 행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 가능성들을 겹겹이 차단하고 있다. 그 불쾌한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세상엔 그 힘든 일을 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승리도 싫고 패배도 싫다, 이러면 그냥 쉽고 편하고 안전하게 사는 것이 장땡이다. 그런 심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론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온전한 자신의 선택일까, 아니면 사회에 의해 강요된 절망일까 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바쿠닌은 예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파괴는 창조의 열정이다' 라고. 니체 역시 창조를 파괴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헤세의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다.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프락사스.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 파괴작업은 사실 창조작업만큼이나 재미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파괴자체의 과정을 즐기기 때문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괴를 통해서 미래의 창조의 영역, 그 공간을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이 완성되고, 건축되고 난 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과정은 두 가지이지만, 내가 선택하고픈 유일한 과정은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리셋버튼을 누름으로서 말이다. 이것은 파이트클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리셋, 여기에 명분같은 건 없다. 사실 어떤 명분도 행위를 정당화 해 주지는 못한다. 명분없는 세상이니까. 특히나 개인과 제도 사이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재미를 위해서라면? 단지 즐기기 위해서라면? 그래서 게임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그 정도는 특별한 명분 없이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저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은 것 뿐이니까. 그건 내 좌우명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내 앞에 존재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 그저 그 위에서 생각없이 살다가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대인들은 너무 역사에 짓눌려 있다. 마치 관람객 같다. 역사의 관람객, 혹은 거대한 네트워크안의 단말기. 그런 건 행복하지 않다. 당신도 그렇겠지만, 내겐 아직도 꿈이 있다. 시스템이나 제도 앞에 굴복하지 않았고 변질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너무도 소중한 꿈이다. 이제 방법은 하나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나의 내재성을 마음껏 펼쳐 꿈을 실현하는 것, 행복의 가능성을 붙잡는 것. 만약 그 가능성이 제로라면 나 또한 정당하게 히키고모리가 되어 살다가고자 한다. 이제부터, 승부다.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5-08 15:58) 

  
 
 
 
병장 김대현 (2006/04/09 16:14:37)

명문입니다. 특히 행복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를 밝히신 부분은 정말 좋네요. 권력과정이라는 말. 
(복지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와 사람이 최소한 돈없어서 병원 못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의 복지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감사합니다. 실마리를 잡았어요.    
 
 
상병 송희석 (2006/04/09 16:15:07)

이거 칼럼아닌가요? 하하! 잘 읽고 갑니다.    
 
 
 병장 박준응 (2006/04/09 16:42:32)

좋네요. 잘 읽었어요. 
지난 번 칼럼도 그렇고, 형진씨는 웃음 속에 칼이 있는 승부사 같아요.    
 
 
상병 엄보운 (2006/04/09 18:42:56)

1. '지금까지 그 어떤 시대에도 오늘 날과 같이 기회가 열려 있었던 적은 없었다.'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글입니다. 

2. 권력 구조의 신화성이 그 치부를 드러내고, 아주 조금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괴로운 지도 모르겠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드네요. 진리를 아주 조금 알게 되었을 때는, 무지했을 때의 비해 고통의 크기가 수천만배 커진다는 말의 의미에서 생각을 시작해봐야 겠어요. 

3. 은둔형 외토리가 가능하게 된 것도 사이버 공간의 생성과 정보 접근성의 발달, 일정 이상의 평균확된 생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형진님 글은 너무 많은 생각을 이끌어주셔서 일기가 조금 겁나요. 좀 더 생각해보고 싶네요.    
 
 
병장 김태경 (2006/04/10 07:59:42)

얼마전에 디스토피아 관련 글을 써보겠다고 유나바머 선언서를 붙잡고 씨름했던 기억이 나요. 유나바머는 사회 문제의 근원을 권력과정 붕괴로 설명하고 인간의 욕망을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지요. 기계문명에 대한 글이 이어진다는 것이 형진님 글과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이야기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뭐, 거부감이 들지만 반박하기 힘든 유나바머의 글보다는 훠얼씬 마음에 드는걸요.    
 
 
 병장 김동환 (2006/04/10 09:55:21)

좋군요. 아직 개방된 말랑말랑한 생각인것 같아 저는 더 좋은데요.    
 
 
병장 주영준 (2006/04/10 10:17:46)

봄이라는 이유로, 저는 이 글에 비판적입니다. 
1. 단지 '중심'이 아닌 '주변'이라고 해서 그것이 어떤 변혁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키치에서 가능성을 발굴할 수 있고, 그것들로부터 중심과 그러한 중심이 존재하는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러한 주변이 구체적으로 지니는 내적인 에너지가 존재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변'이라는 것 만으로 어떠한 것이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히키고모리나 귀차니스트는 분명 일정한 주변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주변성이 형진 씨가 이야기하는 '사회의 기만적인 술수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측면'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저는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면 가장 반동적일 것 같은 부류라고 생각됩니다. 페도필리아-아동, 유아에 대한 성적 도착-은 마이너한 주변부의 욕망이지만 그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지는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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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대해 눈을 감으면, 정말로 혁명적인 어떤 사상을 갖추게 되거나 정말로 반동적인 어떤 사상을 갖추게 됩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소리로 들리는 것이 '사회'라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정말로 반동적인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이 혁명/반동성의 구분은 고전적인 구분이기에 형진 씨가 제기한 층위의 이야기를 분석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형진 씨의 글도 결국 관념적인 어떤 글이 아니기에 이러한 분석틀은 나름대로 타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 에 관해서는 보운씨가 제기한 3번 글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3. 1,2와 같은 이야기지만 결국 '귀차니스트'와 '히키고모리'도 결국 사회적 실재의 효과...어쩌고 하면 또 사회학주의자 주영준 어쩌고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러한 걸 뭐. 물론 사회에서 효과라는 것이 '다만 효과일 뿐. 그렇기에 의미없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효과도 주변과 마찬가지의 차원에서, 단지 효과이기에 의미가 없다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 효과의 맥락과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 없이 그것이 생성하는 의미만을 바라보는 것은 역시 위험한 시각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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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래도, 글은 재밌게 읽었습니다. 메롱.    
 
 
병장 김형진 (2006/04/10 12:24:56)

영준 // 저는 한 개개인에게 가치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면 뭐라 할 말이 없어요. 게다가 난감하고요. 가령 저는 중심이 아닌 주변이라고 해서 그것이 변혁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거나, 혹은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주변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든 사람은 중심을 욕망한다는 전제를 깔고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그게 싫은 것 뿐이에요.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것을 왜 달라야만 하나? 하는 시선으로 재단하려 드니까 억압이 생겨나는거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사회의 그 기만성이 싫어서 의욕을 다 잃어버리고 틀어박히는 젊음들이 생겨나는 것이 눈 앞에 뻔히 보이는데, 그걸 가지고 가치가 있네 없네 하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페도필리아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저한테 로리타 컴플렉스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은 절대 아니고, 아무튼. 두서가 없지만 제가 원하는 건 개개인의 행복, 개개인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탈출 같은 것인데, 그걸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 학문으로 재단하려 드는 것도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 보는 거에요. 특히 3번에 대해서는 뭐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는 거니까요. 히키고모리가 아닌 다음에야 히키고모리의 심보를 어찌알겠습니까만서도.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굳이 덧붙일 말은 없고, 좋은 코멘트를 남겨주셨으니 한번 되새겨보도록 할게요.    
 
 
병장 김형진 (2006/04/10 12:57:29)

아 그리고, 하나 더. 사회적으로 페도필리아 같은 마이너적 욕망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지도 모르지요. 그건 사회학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보면 영준씨 생각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개인의 입장에서 그건 가치 없지만은 않을거에요. 관점이 다르고, 싸워야 할 대상이 다르니까 우리는, 그렇기에 영준씨는 사회학을 하는 것이고 저는 사진을 하는 것이겠지요.    
 
 
병장 주영준 (2006/04/10 15:22:55)

글 쓰다 선부에게 걸려서 날려먹음. 나중에 기회 되면 더 이야기해봐요-    
 
 
병장 김강록 (2006/04/10 15:36:40)

형진님 사랑해요.    
 
 
병장 김형진 (2006/04/10 16:41:30)

강록님에게 고백받다니! 이거 참, 뭐랄까요. 
주영준씨에게서 온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이상으로 설레는 느낌인데요.    
 
 
병장 오해성 (2006/05/09 13:36:57)

글을 쭉 읽고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안노 감독은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히키코모리는 사회와 단절된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이고 
오타쿠는 자신의 취향과 관심분야의 극단에 치우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두 단어 모두 중심사회와 동떨어진 아웃사이더를 의미한다는 면에서는 비슷하게 볼 수 있지만 
분명히 구분지어 사용하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병장 김형진 (2006/05/09 18:55:13)

섣부른 감이 있지만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해요. 글 맥락상 정의 따위를 붙이기도 귀찮고 해서 생략해버렸지만 일단 지적해 주셨으니, 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게요. 

히키고모리, 그러니까 은둔형 외톨이는 흔히 정신의학에선 '사회적 은둔'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DSM IV(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제4판, 미국 정신의학회가 펴낸 정신질환 진단 매뉴얼)에 나오는 social withdrawl의 직역이며, 흔히 학계에서, 저항없이 사용해 오고 있는 말입니다. 학계에서 사용되는 맥락으로 볼 때 사회적 은둔자는 아래와 같이 정의가 가능합니다. 

1. 20대 후반까지는 문제(증상)가 드러난다. 
2. 자기 집에 틀어박혀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된다. 
3. 다른 정신 장애를 주 원인으로 갖지 않는다. 

안노 히데아키가 다른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야, 제 알 바 아닙니다만, 그가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일단 들어본 적이 없구요. 위에 언급한 정의 중에서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제가 용어선택을 잘못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위에 언급한 내용 중에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 어디 있습니까? 

오타쿠도 그렇습니다. 오타쿠가 자신의 취향과 관심분야의 극단에 치우친 사람이라는 해성님의 정의는 그저, 해성님만의 생각일 뿐이지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해성님의 정의해서 볼 때 오타쿠와 마니아의 차이는 대체 무엇입니까? 자신만의 정의로 개념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집니다. 오타쿠라는 말은 이미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많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오타쿠 비판에는 '현실과 허구의 혼동'이니 '현실로 돌아오라' 따위의 정형화된 틀이 있습니다만, 사실 오타쿠만큼 허구와 현실의 구분이 엄격한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 생각만은 아니고 학계의 정의가 그렇습니다. 그에 따라서 오타쿠의 정의를 한번 얘기해보죠. 

1. 허구 맥락(context)에 대한 친화성이 높은사람 
2.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허구화라는 수단에 호소하는 사람. 
3. 이중 지남력(指南力, orientaton)이 아닌 다중 지남력을 사는 사람. 
4. 허구 그 자체에서 성적 대상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 

히데아키가 본인 스스로 오타쿠라고 했다면 그건 본인 이야깁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 그를 오타쿠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요. 그 사람의 언행 같은 걸 보면, 위의 맥락에 부합하는 면이 많습니다. 헌데 오타쿠와 히키고모리의 정의가 이처럼 따로 떨어져 있을진데, ─그러니까 그는 오타쿠지만 히키고모리이기도 하다는 이야깁니다─ 그저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멋대로식 용어정의로 문제 제기를 하실 필요까지야 있을까요. 사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는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까, 용어의 선택을 통한 문제 제기시에는 가능한한 객관적인 정보 혹은 기준을 토대로 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상병 박진욱 (2006/05/10 13:40:02)

안노 히데아키가 사회에 6개월 이상 참여하지 않았냐... 그건 좀 달리 보는데요. 

가이낙스에서의 이전에도 메카닉을 잘 그리고 사람을 진짜 못 그리는(...) 사람으로서 알려졌을만큼, 나름대로 최저한도의 사회활동은 하고 있었던걸요. 프리타. 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위치일테고요, 그럼 히키코모리란 단어는 통하기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상병 박진욱 (2006/05/10 13:42:57)

사회. 를 어느 정도의 규모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애니메이션 작업은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작업입니다. 만화하곤 다르죠. 

[오타쿠 사회] 나마 오프라인을 통해 교류가 계속 이뤄지고 있다면 -거기에 일단 안노는, 결혼도 했죠?- 히키코모리. 코쿤. 찬네라. 에. 뭐 기타 유사 분류의 온라인만으로 최저한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과는 맥을 달리한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병장 김형진 (2006/05/10 14:23:35)

먼 과거의 이야깁니다. 그가 6개월 이상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근래의 그를 그렇게 볼 수는 없지요 말씀하신데로요. 계속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듯 싶어서, 그냥 짧게 얘기합니다.    
 
 
상병 전봉욱 (2006/05/11 08:23:38)

이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예측가능함을 행복이라 만족하고 있진않았는지 되돌아봤습니다. 
그리고, 
행복의 가능성이라는 말이 참 좋네요.    
 
 
 상병 강계정 (2006/05/12 16:50:02)

히키코모리는 돈을 그다지안쓰지만 오타쿠는 무지막지하게 써댑니다 이거 하난 장담하죠... 
(미소녀 오타쿠라면 달마 다 사야하는 매거진 부터 시작해서 정품피겨 나 트레이딩 피겨 원코인 등등) 

(건담오타쿠라면 말할것도 없지요HGUC 덴짱 은 우리돈으로 38만원정도하니까요...게다가 월간 하비매거진 부터 건담 관련 서적 등등등 ) 
게다가 600체 한정 완전변형 제네식 가오가이가(우리돈 800만원) 가 예약 시작한 당일 동났다난 건 무었을 의미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