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는 건 손해다
천성이 군인이라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여기에 있는 현역 군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이나, 앞으로 군대를 가야할 남성들이나, 가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나 군대 가는 게 손해라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국방부에서 아무리 요즘 군대가 편해졌다고 설레발을 치고 훌륭하신 분들이 군대에서 많은 것을 얻었느니 배웠느니 떠들어대봤자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2년 혹은 그 이상을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한 채 위에서 까라면 까야하는 조직사회의 말단으로 편입되어 자신의 뜻과 개성과는 무관한 일을 해야 하는 군대라는 조직에 끌려가야 하는 것은, 분명 손해다.
남성들이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 ‘국방의 신성한 의무’라는 국가의 허위의식을 차용하는 것은 사기다. 병역법이라는 강제가 없었다면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스스로 입대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현역과 예비역의 대부분은 군대에 끌려간 것이지 나라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간게 아니다. 물론 애국애족심과 군인정신이 투철하여 성실하고 자랑스럽게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이라면, 2년동안 썩은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성실히 의무를 이행한 사람이라면, 굳이 누구에게 보상을 바랄 이유는 없다. 보상은 의무의 이행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손해에 따라오는 것이니까. 따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고 갈 예정이 아닌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누구 덕에 발 뻗고 자는 줄 아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건, 반칙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신체조건을 가진 한국 남성의 대부분에게 지워지는 국방의 의무는,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부과되는 손해에 불과하다. 일단 솔직하게 시작하자.

손해보상은 손해를 입힌 측이 하는 것이다
한국 남성이 군대에 가는 것은 국가가 그것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군대에 가지 않는 누구도 군인들에게 나 좀 지켜달라고 부탁하거나 강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의무와 강제는 워낙 강고하고 폭넓은 것이며 역사가 오래된 것이기에, 그 자체를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여성의 생리적 현상인 ‘임신’과 남성의 사회적 부담인 ‘병역’을 동급으로 놓고 이야기하는 어이없는 인식은 오직 한국에만 존재한다) 이는 결국 의무이행으로 인한 손해를 입지 않는 것을 특혜로 보게 하고, 손해를 입힌 눈에 보이지 않는 주체보다 특혜를 입은 눈에 보이는 이들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에서 안티페미니즘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군대’인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손해보상은 손해를 입힌 측이 하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입은 손해는 국가에게 보상해달라고 하는 게 맞다. 당신을 군대에 보낸 것은 여성이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국가니까.
물론 페미니즘이 여성의 불평등한 위치를 논하면서 남성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려고 하기에 남성들이 자신이 남성이기 때문에 입었던 대표적인 피해를 예로 들면서 이를 방어하려고 하는 심리는 충분히 근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인 근거만 될 뿐, 논리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강조하면서 그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측면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과 싸우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다. 여성, 페미니스트에게 군대얘기를 들이대는 것은 이와 똑같다.
군가산점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최초의 입법취지가 어떠하였든 간에, 그 상징적 의미는 군복무로 인해 입은 손해를 취직과정에서 보상해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를 채용하는 국가는 그 보상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는다(국가가 손해 보는 점이 있다면 가산점으로 인해 점수가 낮은 군필자를 채용하기 때문에 가산점이 없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직원을 채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뿐이다). 그로 인해 탈락한 여성/미필자가 그 손해를 보상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입히지 않은 손해를 보상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손해를 봐야하는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이들이 군가산점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이 논리와는 달랐을 것이다. 그 손해자체가 합격점 만점 이상이라는, 극복 불가능한 것이기에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지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정도였다면 법적 판단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여성들이 그 정도를 감수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

역차별의 문제
손해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의 문제가 아닌 역차별, 즉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집단에게 유리한 조건을 확보해줌으로써 실질적인 평등을 이끌어내는 장치로서 군가산점제도를 바라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전제조건은 역차별로 인해 혜택을 보는 집단, 즉 2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취업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2년간의 군복무는 자기계발이라는 기회비용의 상당한 지출을 요구한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2년 썩을 동안 여자들은 어학연수하고 학원 다니고 자기계발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불만은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는 능력의 차별성의 근거는 되어도 취업의 기회에 대한 차별성의 근거는 될 수 없다. 가산점제도가 없어진 지금의 공공기관이나, 원래 없었던 사기업에서 남녀의 취업자 비율을 살펴본다면 답은 금방 나올 것이다. 취업 이후 승진의 기회까지 고려한다면 군필자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애초에 남성과 여성은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군필자는 여성에 비해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보상은 어디서 받아야 하나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얘기다. 대부분의 조직사회는 군대와 닮아있고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더욱 그러하다. 하기에 군대에 다녀왔다는 사실 하나로 군필자는 조직사회에서 목청을 높힐 수 있다. ‘군대가야 사람 된다’, 여전히 군필자가 인간으로 대접받는 세상이다. 손해가 일반적인만큼, 그에 대한 보상도 일반적이다. 다만 손해는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데 비해, 보상은 직접적이지 않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이러한 보상을 위해 군복무를 택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여전히 군필자들은 억울하다. 하지만, 억울하다고 해서 엉뚱한 사람한테 보상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나 고생한 것 좀 알아도’ 정도가 군필자가 할 수 있는 항변이고, 사실 그 정도는 다들 알아준다.

극단적 페미니스트 - 고생한 것도 몰라주는 매정한 것들?
공무원채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대부분의 남성 군필자들이 군가산점제도의 폐지에 분노한 것은 아마도 군복무에 대한 일말의 보상마저 없애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와중에 군가산점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군대에서의 고생을 우습게 보는 예의없는 것들이 되어버렸고, 실제로 TV토론 등에서 나온 몇몇 여성의 돌출발언은 이러한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나, ‘군복무에 대한 보상이 필요 없다’와 ‘우리의 희생으로 군복무에 대한 보상을 충당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또한 어떤 페미니스트가 군대에 대해 어이없는 얘기를 했다는 것과 일반적인 페미니즘(물론 이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에 종파가 수백개고 유학에도 수많은 학파가 있었듯, 페미니즘도 단일한 사상이 아니다), 혹은 극단적인 페미니즘이 군대를 우습게보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군복무에 대한 ‘일체의 보상을 반대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주체와 논점이 모두 빗나간 이야기다.
몇몇 돌출적인 발언은 사실 지엽적인 문제이고, 그 개인 혹은 상황의 문제일 수도 있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수세에 몰려 극한 상황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익숙하니까. 그럼에도 이를 빌미로 삼아 논쟁의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은 반칙이다. 군가산점제도 찬성론자, 내지 안티페미니스트 중에서 뻘소리를 하는 사람도 결코 적진 않다.

마무리
징병제가 존속하는 한, 아무리 생활이 편해지고 월급이 올라도 징집대상자들은 자유를 제한당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손해의 보상을 국가가 아닌 여성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한강에서 뺨 맞고 엉뚱한데 가서 화풀이하는 격이다. 장기적으로는 자유의 제한을 없애는 쪽, 즉 모병제로의 전환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