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주(觀酒) 
 
 
 
 
금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틀 동안은 늦잠을 잘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에 절로 흐믓한 미소를 감출수가 없다. 아침 알람으로 대신 울어주는 핸드폰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지정으로 바꾼지 오래지만 그래도 꼭 토요일 아침은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잠을 청하게 된다. 나는 원래 잠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일주일 내내 버티던 힘이 간당간당 다 떨어지는 주말이 제일 피곤하다. 
옛날에는 가을쯤 해서 겨울잠 들어가는 반달곰마냥 이것저것 먹어 살도 오동통하게 찌우고 그것도 모자라면 약도 한 재 먹고(나이를 못 속여 한 삼년쯤 전부터 먹고 있다) 그러면 겨울지내기가 그리 팍팍하지는 않았는데 추운겨울 다 지나고 만물이 소생한다는 화사한 봄이 올 때 쯤 기력이 다 떨어져 비루먹은 망아지마냥 비척거리며 잔병치레를 시작한다. 이상하게 소화력도 떨어지고 분명 일조량으로 보면 요맘때 제일 하얀 얼굴이어야 하는데 썬 크림도 못 바르고 피서 다녀온 사람처럼 얼굴도 얼룩덜룩해지는 것이 분명 예삿일이 아니라 겁이 덜컥 나서 일년에 한번 드나드는 한의원을 가게 되었다.

‘간 기능이 많이 떨어졌네요’
‘저 요즘 술 안 먹은 지 오래 됐는데요’
‘그게 아니라,,, 원래 위장은 강하고 간이랑 심장이 약한 체질입니다. 신경증이 있어 스트레스도 심하게 받고...’
한의사가 진맥을 여러 번 짚어가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사실 나는 대학 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학기 내내 장학금을 받았으며 졸업하기 전에 취업이 되어 교수님의 배려와 축하 속에 학창시절을 마감했다는 이런 장한 학생은 결코 아니었다. 
요새 대학도 그러하겠지만 내가 학적을 두었던 시절은 과 태반이 넘게 알콜 중독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술을 마셨다. 처음 술에 입을 댔던 것이 고등학교 수학여행이었는데 담임이 마지막 날 차안에서  한 캔 씩 돌렸던 맥주로 그 미지근하고 찝지름한 술맛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백일주의 유혹도 뿌리치고 고이 고교시절을 마무리한 후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음주 사건 이후로(언젠가 밝힌 적이 있다) 발군의 실력을 보였는데 나의 주 종목은 맥주였다. 아무래도 첫정이 무서웠던가 보다. 그런데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맥주를 양껏 마시기엔 주머니가 너무나 가난해서 가끔 교수님께서 기분이 좋으시거나 시골에서 유학 온 친구들 FM 장학금이 올라오는 날 방값에다 외상값 갚고 몇 푼 남은 돈으로 두루치기 안주에 소주잔 기울이는 옆에 꼽사리 껴서 맥주를 한 병씩 얻어먹고는 했다.

졸업한지 삼년쯤 뒤 후배라며 학교 축제에 참석해 주십사 하는 전화를 한통 받았는데 그 후배가 전화를 끊기 전 이런 말을 했다.
‘선배님 꼭 뵙고 싶어요. 선배님 전설이 있는 것 아세요?’
‘무슨 전설?’
‘4기 회장이신 태규 선배님에게 술내기로 이기신거요.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어요’

실상 그 전설이란 것이 이렇다.
그날은 강의가 일찍 끝나고 맥주내기 배구시합이 붙었는데 우리 편이 이겼는지 저쪽 편이 이겼는지 모르겠고 낮술로 시작한 맥주 판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와 개교 이래로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이름을 떨치던 태규 선배와 술내기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고 대충 술값 떨어지면 그만 마시겠지 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호주머니를 털어 술을 사는 바람에 점점 박스가 쌓여갔다. 같이 시작했던 동기들 모두 나가떨어지고 무섭게 마시던 맥주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해 이제 곧 끝장을 보리라 비티고 있는데 우리가 하도 왁자지껄하게 떠드니 근처에 오셨다가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시던 교수님께서 술내기가 붙었다고 하니 두말 안하시고 맥주를 한 박스 시켜 주시고 가셨다. 나는 벌써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벌써 치사량에 가까운 빨간불이 웽웽 돌았지만 아. 이건 또 무슨 오기인지 그렇게 지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나가서 입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명백히 규칙위반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기고 싶었던 철없던 신입생이 아닌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맥주잔을 내밀자 선배가 잠시만 쉬자며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했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선배를 찾으러 동기가 나가더니 선배가 화장실에서 쓰러져 잔다고 했다. 바래다준다는 사람들을 다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눈을 감으면 천정이 뱅뱅 돌다 이마에 부딪치는 환각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다 잠이 들었는데 하루 반을 꼬박 앓다가 일어났다. 주말을 보내고 학교로 가보니 거짓말 좀 보태고 과장 좀 해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강의를 들어오시는 교수님 마다 나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잠시 동안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셨고 그 자리에 없어서 소문만 무성하게 들었던 동기들은 못내 안타까워하며 한잔 하자고 꼬드겼지만 정작 본인은 술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지끈거려 한 달 동안 술자리를 피해 도망을 다녀야 했다. 덕분에 여름 방학동안 교수님 특별 추천으로 탁주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녀석들 때문에 일주일을 못하고 쫓겨났던 일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은 후배가 저러다 죽을까봐 짐짓 모른 체 선배가 져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사랑해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으로 요 몇 년 사이 그 간 기능이 어쩌고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관주(觀酒)의 경지에 밀려 주량이 말이 아니게 줄어 이제는 소주반병이 치사량에 가까운 마지노선이 되고 말았다. 옛날 그렇게 술 좋아하던 태규 선배가 피를 토해 병원에 갔더니 위가 헐어 탁구공만한 구멍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마지막 술잔을 바라보며 울었다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이제는 몸살 한번으로 일년 액땜을 하고 사흘 밤 까지는 아니라도 이틀 밤 샌 정도로는 표도나지 않을 체력이었는데 철마다 약을 먹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제 그만 괴롭힐 때가 된 것이다. 젊다는 치기만으로 너무 오래 동안 술을 괴롭혀 왔던 것도 사실이고 더불어 나의 몸도 많이 힘들어했던 것이다. 아직도 술은 서먹서먹한 사이를 매끄럽게 만드는 최고의 윤활제이기도  하고 말로 사과하는 대신 미안한 마음을 듬뿍 담아 건네기 좋은 선물로도 좋고 오래 못 만났던 친구를 만나 기울이는 한잔은 단숨에 그 세월을 뛰어넘는 타임머신 같은 괴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이제 조금 다른 의미로 사랑해 줄때가 온 것이다. 

내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내 간이 주인 때문에 힘이 든다며 철마다 신호를 보내온다.
둘째 이제 사소한 잘못이라도 술 탓이라고 돌리기에 내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다. 
셋째 맥주와 소주 말고 다른 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넷째 딱 기분 좋을 만큼 취할 수 있는 선을 알았다. 
다섯째 술값을 아껴서 사고 싶은 책이 있다. 
여섯째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 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일곱째 그보다도 더 한때 사랑했지만 그런 식으로 괴롭혔던 술을 이제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관주(觀酒)도 술을 마시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혼자 집에서 영화를 볼 때면 육포를 안주삼아 맥주를 한잔씩 하고 저녁을 먹으며 반주 삼아 와인 한잔을 마시고 좋은 친구가 놀러오면 매실주 한 주전자에 김부각을 꺼내 놓는다. 
그런데 사실 이 자리를 빌어 밝히자면 주당들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소주와 그다지 친해지지 못했다.  일단 소주에서 풍기는 그 화학주 특유의 냄새에 적응이 어려워서 주로 맥주와 섞어 마시는 폭탄주에 맛을 들였는데 점심이나 저녁 밥 먹기 전에 반주로 한잔씩 곁들일 때가 최고다. 


사족하나
건어물 최씨와 소개팅을 했던 후배는 그 최씨가 친구결혼식에 갔다가 낮술을 먹고 와서 영화관에서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칼에 자르고 와서 내게 화를 냈다.
그 최씨도 진작 술을 놔줘야 할 때를 놓친 것 같다.
 

  
 
 
 
 병장 노지훈 (2006/05/11 11:21:52)

조회수 0 나이스~ 
선리플 후감상    
 
 
일병 변화수 (2006/05/11 11:31:32)

두주불사라. 진짜 번쾌만큼만 술을 마실줄 알면 무서울게 없을텐데. 
맥주 두잔에 얼굴이 빨개지는 현실이 넘 싫습니다.    
 
 
병장 김형진 (2006/05/11 13:12:07)

저 또한 일적불음(一適不飮)인지라.    
 
 
일병 이건룡 (2006/05/11 13:13:25)

보다 산뜻하세 과업에 임할 수 있게 되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병장 주영준 (2006/05/11 13:38:56)

책마을 메딕 하지연님.    
 
 
 병장 박진우 (2006/05/12 09:51:03)

술,술,술. 
고놈의 술이 문제군요. 흣.    
 
 
병장 김의연 (2006/05/12 15:07:07)

문득 바이브의 술이야...가 생각나는 군요...별 연관성은 없지만서도..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