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과 실천 사이의 간극 - 학생**에 대한 제 논의들을 읽고 , 홍명교>
보름전 일이다. 4박5일간의 설탕 중 가장 중대한 일정은 어느 결혼식에 가는 일이었다. 결혼식 날짜를 알게 된 날부터 나는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도 잘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 선배였던 W의 결혼식이었는데 대학시절의 지인들에게는 아무런 연락이나 언질도 없이 무작정 그곳에 갔던 것이었으므로 결혼식장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 심장이 멎을것만 같은 떨림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4년간 가족처럼 지내던 대학시절의 선후배,동기들과 어느 가을밤의 도망과 함께 모든 연은 끊어버린 상태로 지난 3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후로 간간히 몇몇 후배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계속 잠적상태였으므로 나의 행방 그 자체는 K대 스포츠권학생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미스테리, 불행한 사건 그 자체였다. 식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맞는 그 얼굴들을 생각하니 지금도 심장이 멎을듯하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신부인 W를 만나는 것도 4년만이었고 97학번부터 05학번에 이르는 여러 선배들, 후배들도 몇년만에 만나는 것이었으므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우리들의 모습에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것은 내가 상상하던 미래가 아니었다. 내가 예측했던 2009년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우리가 예견하던 2009년은, 학생** 7년차에 마지막으로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며 사회진출을 고민하고 또 영예로운 지난 7년을 뜨거운 마음으로 후배들에게 돌려주는 그런 시간이었다. 나는 모 대학 학생회관의 골방이나 학교 주변의 넓은 투룸 자취방 같은 곳에 있어야 했다.
W는 05년도 정경대student union회장으로, 몇년만에 다시 P*가 K대 스포츠의 아성인 정경대학에서 학생회를 수권한 그 해의 주인공이었다. 낭랑한 목소리, 항상 웃는 얼굴, 그리고 내면에 품은 독한 그 무엇까지, 그녀의 존재 그 자체로 우리는 정경대에서의 스포츠 확장에 희망을 보곤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때까지의 다른 활동가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말투나 행동, 감수성까지! 모든 과거의 관성들과 절연하고야만, 건강한 활동가의 전형이었다. 지금은 공중파 방송국 PD로 여전히도 그 PD라는 이름은 유지하고있다지만(웃음) 나와는 멀어진지 오래다. 예전에는 한솥밥을 먹으며 숨은방에서 뒹굴어져 머리를 쥐어짜내고 밤새도록 토론을 하던 우리도 이제는 영영 다른 모습이었다. 신부만이 아니라, 식장을 찾은 다른 옛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꿋꿋하게 고학번 활동가로서 버티고있는 열명남짓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스포츠와 멀어진 채 살고있었다. (물론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인으로서, 노동자로서의 스포츠를 고민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회사원이 되었거나, 공익요원이거나, 나처럼 궁인이거나, 대학원생이거나 취직준비중이었다. 몇몇은 아예 오지도 않았다. 저마다 각각의 갈등들이 있었다.
결혼식은 너무도 독특했는데, 관악 최초 여성 총학생회장이던 ##씨의 사회로, 주례도 없었고, 결혼식장에서 흔히 들리는 음악소리나 축의금함도 없었다. 신랑 신부는 나란히 입장해서, 각각의 어머니들이 연단 위에서 기다렸다가 낭독하는 눈물의 편지를 듣고, 낭랑하게 행복의 다짐을 했다. 식의 중간에는 학교 후배들의 몸짓 공연까지 이어졌는데 2003년의 연합 메이데이때 주제곡이었던 <우리하나되어>(그때 K대에서는 전국 학생스포츠판을 바꾸겠다는 포부로, P*와 N*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합선본을 꾸려 메이데이까지 함께 했더랬다)와 총학생회선거때 ㅈ파 선본 주제곡이었던 <꿈찾기>까지. 감회가 새롭기도했고, 좀 생뚱맞다고 느껴지기 까지했다. 그리고 마지막 대학 선후배 단체사진을 찍었던 그 풍경까지. 이로써 나는 어떤 결별의 순간 같은 것을 목격하게 된 셈이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장송연을 보고 온 기분이었다. 목격해서는 안되었을지도 모를 '오늘'의 우리들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지난 3년간 나는 상상 속에서만 학생**의 풍경을 간직해왔을뿐 이처럼 화려한 스펙타클로 목격하진 못했다. 이 텅 빈 실체의 스펙타클을.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열정적인 모습으로 살아있던 이들의 진짜 모습을 보고만 것이다. 지난 주에 나는 올빼미 게임을 다녀왔는데, 돌아와서보니 책마을에서 이렇게 활발하게 논의가 이어진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기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 필요를 느낀다. (빈약하나마)
1. 게슴츠레의 글에 대해
우선 예찬씨가 올려준 게슴츠레의 글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반복적으로 보던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 구구절절하고 장황한 설명을 썼는데, 일신상의 어떤 두려움 때문에 생략키로 하겠다.) 그리고 스스로 알튀세에서 발리바르로 나아가는 학생들임을 자임했던 우리들은 항상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우리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들이 알기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오직 우리만이 알튀세의 사상을 학생**적 실천을 벌이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냥 잘 되지는 않았다. 그때 즈음 나는 게슴츠레같이 생각하고 있는 외부자들이 꽤 많다는 것도 알고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인식의 지평은 무한히 거대하면서 실천적으로는 움직이기를 꺼리는 이들이다.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진흙탕에 들어가는 순간 더러워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게 있으니 어떤 이들은 영원한 논평자로서만 남고싶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그때의 답답함이란 우리 활동력의 미약함, 그리고 전국적이지 못한 운신의 폭. 두가지이다. 요컨대 우리는 항상 판의 변화란 전국적이며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스포츠'로서만 가능할 것인데, 우리는 N*들처럼 전국 곳곳에서 너른 인자폭을 갖고있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는 적극적 활동가가 300여명 남짓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로는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내 청춘 꼴아박자는 심정으로 1,2년씩 지방에 내려가는 선배들도 많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꽃을 피운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우리 풀 안의 인자들에게, 그리고 다른 그룹들에게 대학내 시민권의 확장을 위한 **을 제언하고 정식화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우리는 등록금 납부거부운동도 적극적으로 했고, 별의별 수는 다 써보았으며, 학내 시설관리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강사들과의 연대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도 했다. (고대 시설관리노동조합과 '불철주야'-불안정노동 철폐를 주도할꺼야! 활동은 그 노력의 소산이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를 학생회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수년간 노력했다. 남학생수가 훨씬 많은 지역에서 "여성주의 학생회"를 공공연히 공약으로 주장하고 설득한 것은 그것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때의 신심어린 노력들은 때때로 스포츠의 확장으로, 관성적 활동의 탈피로 나아가기도 했으며 뭔가 새로운 길을 보고있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과의 연대를 넘어서 지역**으로서의 학생**까지 사고했었으며, 근방의 작은 철거촌이나 공장과의 1단위 1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뚫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게슴츠레가 상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더 축소되었는가. 왜 그때 우리가 부푸른 꿈으로 안고있었던 다섯개 학교의 총학생회는 지금 거의 모두 무너졌으며 활동가들은 더 줄어들었는가? 이것이 바로 내 고뇌의 주제이다.
2. 박원익씨의 글에 대해
원익씨의 글도 참 잘 읽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2003년 겨울부터 2004년까지'舊전*협' 사람들이 주장하던 바와 일치한다. 그들은 학생회의 해소를 주장하며 취미나 처지, 관심사, 사건 등으로 사안별로 뭉쳐서 각각의 자치회의를 구성하여 그 안에서의 직접민주주의로 학생사회를 전변시키자는 주장을 했었다. 실제로 그들은 K대 법대학생회를 해소하기 위한 학생회 수권까지 했었는데, 과도기적으로 그들이 시도한 여러가지 실험들은 모두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성 자체를 포기하는 모험까지 감행했는데, 그것은 그저 변화가 아닌 운동의 기각으로만 귀결되었을 뿐이었다. 우리 선배들은 이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말로는 참 좋은 말인데, 관념주의자들의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처량하게 말했다. 이들의 실험은 전국적인 규모의 선도도 아니었을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이들은 지나친 낙관주의에 경도된 네그리주의자들이었다.
나 역시 학생**의 종언의 증거가 '일반학생들의 무관심'이라는 대타자에 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원익씨가 말하는 '에고이스트의 연대'의 구현이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이 주장은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한 차원에서만 머물러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주장은 매개없이 방향전환을 했는데, 우리에게 요청되는 정의감이 "다른 거시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그들의 단순한 삶과 욕망이 왜 '일상적인 것'으로부터만 발동된다는 것인지 납득되지 않는다. 나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 그것이 주장되는 맥락 안에서 거시적인 시야가 기각되어야 하는가? 문제는 left wing**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ㅈ익화이다! 전자는 회원 배가 운동으로서만 충족되지만, 후자는 오로지 일상에서부터 광장에까지 트여있는 섬세하고도 거시적인 시야가 갖춰진 가운데 모든 이데올로기의 장치 안에서 적극적으로 운신하는 것을 사고하는 것으로써 가능하다. "외부에서의"라는 차원은 오로지 발동되는 찰나의 차원에서만 그쳐야하며, 그후로부터는 외부에서 안으로, 안에서 외부로, 안에서의 꿈틀거림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왜 항상 외부자가 되어야하는가? 그것이야말로 혁신을 멈칫거리게 하는 관성이 아니었던가? 여러분들이 '외부자'가 되어 말한 많은 것들이 이미 그 내부에서 관성이 되고 또 반, 합을 거친 경향들의 반복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대체로 원익씨가 제시한 방향이 동반된 어떤 활동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도 '활동가'의 몫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욕망의 판을 열어놓는 건 원기왕성환 몇몇이 굳이 "활동가"이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멈출 생각이 없으며,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반드시 존재하고 확장되어야만 하는 실체에 대해 집중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08년 이후 광장과 한예종 안에서 벌어진 여러 변화들이 나에게 이런 생각을 들게 했고, 이것은 점점 더 확신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요컨대 게슴츠레의 제언과 원익씨의 주장은 두 가지 층위에서 공존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위에서 내가 언급한 몇가지 충돌지점을 제외하고말이다.
3. 윤현상씨의 글에 대해
셋째로 윤현상씨의 글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 인적 재생산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의 문제가 기간 학생스포츠의 오래된 관성이 여전히 계속되고있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관악의 스포츠는 내가 외부에서 지켜보던 것부터 더 문제가 심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미 우리의 논의는 그 너머의 것으로 옮겨져있지 않은가. 학생스포츠의 주장들이 '내 이야기'로 와닿지 않는건 너무도 당연하다. 이미 몇년전부터 관악 학생들의 절반이상이 강남 출신이 아니던가? K대 ㅈ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것이 '내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학생스포츠가 당사자운동으로서 존재하던 시절은 이미 90년대 초반을 경과하며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주류적인 분위기로 관성적으로 남아있다면, 그건 일신하지 못한 습관의 얄팍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5~10년전부터 '미래노동자'로서의 대학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관악 사회대 일부에서 남아있을텐데 나는 그들이 꽤 오랜기간 관악 사회대에서 대중**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있다.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한다는 주장은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이미 6년전부터 목이 터져라 그렇게 하자고 주장해왔다. 선거 패배를 각오하고서라도.
신화가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사실명제와 더 이상 학생스포츠가 거시적인 것, 사회적인 문제에서 시선을 떼야한다는 주장은 연결되지 않는다. 만약 학생스포츠의 신화가 다시 도래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엘리트, 예비지식인으로서의 존재를 자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부류로서 이 땅의 억압들을 깨부수기 위해 다른 억압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 '연대'해야한다고 자각했기 때문일것이다.
"개개인의 욕망에 중심을 둔 사상의 내면화"라는 말은 차라리 아무말도 하지 않는것과 같은 말이다. 이는 다분히 해체주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건 이미 역사가 증명하지 않았는가?
윤현상씨는 또 학생**이 시민운동을 위한 전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학생**이라는 '부문운동'이 아예 없어져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다른 합당한 근거들을 마련해야하지 않을까? 학생**이 부문운동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전제하기 문이 이 논의들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던가?
윤현상씨가 놓치고 있는 두번째는 '시민운동'의 물질성이다. 아마 현상씨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이라는 이름이 갖는 체계의 물질성을 잘 알것이다. 그들의 색깔은 노랗고, 대체로 케인즈주의자들이며, 비폭력주의자들이다. 그런데 기간 학생**은 이와는 아예 다른 색깔과 노선, 뿌리를 갖고 있다. 대다수 학생** 활동가들은 시민운동가들이 변절한 개량들이며 때때로 아주 자주 열려지는 광장의 욕망들을 왜곡하고 변질시킨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가들은 대체로 학생**가들은 지금 이 광장, 이 거리에서 무엇을 욕망할수있는가에 대해서 말하지만, 시민운동가들은 모두들 "내년에 있을 선거"로 모든 주장을 귀결시킨다.
그 물질성을 논외로 치더라도, 학생**이 시민운동의 전단계가 될 이유는 찾기 어려워보인다. 학생으로서, 발언해야할 것들에 대해 찾는 것이 학생**의 과제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도 교육비의 전가와 실업문제, 국가교육의 문제에 대해서 말할수있지 않은가? 왜 전단계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전단계를 밟고있는 학생들을 알고있다. 그들은 모모 단체 대학생모임에만 참가하며, 그 모임에서 착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학교의 문제 대신 시민단체들의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학교 광장 대신 종로 거리에서 전단지를 뿌린다. 아마도 전단계가 된다면 이런 종속적 관계 쯤은 각오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대중적인 **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이미 뭔가 포기하고 시작하자는 말이 아닌가.
4. 학교발전이데올로기, 배제의 공포와 포섭의 환상
아래 논의들에서 삐져나온 문제가 하나있는데, 나는 이것을 "학교발전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정리해보고싶다. 학교가 발전해야 나도 발전한다는 이데올로기. 국가발전이데올로기와 닮은 모습이 아닌가. 이는 도리 없이 부딪히고 깨부수어야할 지배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20대를 옥죄고 있는 배제의 공포와 포섭의 환상. 내가 어쩌면 그 질서에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의 적대를 만들고, 또 나는 그래도 포섭될 수 있겠지, 라는 환상이 또다른 공포와 적대를 낳는다. 이건희 명예철학박사학위수여식 사태와 보건대 사태 이후에 벌어진 그 끔찍한 목소리들이 바로 그것 아닌가? 여기에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가? 이것은 우리가 이미 직면해있는 현실이며 더 경악스러운 미래의 징조이다. 이를 외면해서는 안되며, 부정하거나 포기해서도 안된다. 부딪쳐야한다. 다른 욕망으로. 그러나 그것이 굳이 개인적이고 미시적이어야한다는 강박은 버려야한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일수도 있으며, 동시에 거시적이고 전국적이며 정세적이다.
5. 간극
여기에는 어떤 간극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원익씨가 품은 고민 같은 것들이 절실하게 느껴지며, 동시에 별다른 큰 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갑자기 03-04년의 법대 네그리주의자들이 실패한 이유가 확연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그렇게 실천하면서도 좀 더 내부적으로 레밍스러웠어야 하지 않았을까? 개별적인 욕망이 발화되는 것은 온전히 자율성에 내맡겨질 수 있는가? 누군가는 민주주의나 욕망이라는 코드에 대해 크게 착각하고 있다. 나는 왜 다들 '오늘날에는' 욕망이 단순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경계 안에서만 유효하게 발동된다고 전제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있다. 그거야말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지 않았나. 마치 그 간극이 만들어낸 형상이라는 껍데기 속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을것처럼 말해온 것처럼 말이다.
병장 윤현상
빈약하나마, 라니요. 오히려 너무나 빈약한 제 글에 대해서 지나치게 성의있는 답변을 해 주신게 아닌가 싶은것을요. 저는 지난 새벽에 이 글을 읽고나서, 밤새 제대로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제가 그간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기획하는 일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였죠.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제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게요.
인적 재생산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학생스포츠의 오래된관성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것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그것뿐이라면, 학생스포츠가 지금 이상황에까지 이르지는 않았겠죠. 명교씨가 잘 설명해주신 것처럼 그렇지않은 학생스포츠도 많으니까요. 저 또한 그 관성에서 탈피한 운동을 하려 했던 것이기도 했구요. 단언하건데, 저는 기간 학생스포츠 내부에서 어떠한 논의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1학년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시기에 N*, 애*연의 생각과 방식에 크게 실망했고, 그해겨울 선거참여를 끝으로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기 때문이죠. 저는 그 이후에 과 수준의 소규모 운동에 참여했을 뿐이기 때문에, 제 의견이 관악 스포츠 전체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만, 저는 제가 그들 내부에 있을 때 느낀것들과 이후 외부에서 그들의 발언을 바라봤을 때 느낀 것들을 기준으로 글을 작성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때때로' 그들이 그것이 '우리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개개인의 욕망에 중심을 둔 사상의 내면화"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말해 대해서는, 저는 명교씨가 이 말을 한 맥락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를 수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저는 이 경험과 관련해서 예전에 조악한 글을 한 편 책마을에 쓴적 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에 또 같은 말을 반복했군요. 어쩌면 관성에 젖어있는 것은 정작 저 자신일지도 모르겠어요.씁쓸하네요(웃음).
다음부터 이야기 할 것에 대해서는 제 글솜씨가 부족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저는 신화와 관련해서, 거시적인 것, 사회적인 것에서 눈을 떼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에요. 제 글 중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거대담론은 여전히 유의미하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해야하죠. 제가 미시적인 것에 집중하자고 말한 것은, 학생운동이 페미니즘과 같이 스스로의 행동의 준거로써 작동하는 미시적인 틀과, 동시에 사회적인 것에서 발언할 수도 있는, 그런 양극성을 포괄할 수 있는 틀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시민운동에 관련해서, 우선 밝히고 싶은 것은, 저 또한 노랗고 케인즈주의적인 그들과, 또 모모단체 대학생 모임에 참가하는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운동이 시민운동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학생운동이 그 이상으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지요. 명교씨 글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지만, 열정적인 학생운동가들이 학생이 아니게되면서, 그들의 열정과 욕망이 너무나도 쉽게 사그라드는 모습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운동과 멀어지는 모습을, 저는 그동안 가슴아프게 바라 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지금 저는, 저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학생운동가들이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도 그들의 생각을 펼칠 공간이, 정당에 예속되는 형태가 아니라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그것을 '시민운동'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었어요. 지금에 와서 읽어보면, 온전히 오독될만한 글이었지만.
이것은 여담이지만, 맨 첫문단은 수정되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던 것 같아요(웃음). 그 설명 없이도 충분히 명교씨의 느낌을 알 수 있었는걸요. 그리고 ##씨를 글을 통해서나마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관악에 마지막으로 울려퍼졌던 호소력있는 그 무엇이었죠.
상병 홍명교
윤현상/
우리 모두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죠. 다만 저는 자책감이나 자기부정, 외부자적 시선으로 관념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말들은 또 다른 반경향적 지평 위에 놓여있을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말하고싶었을 뿐이예요. 저 역시 그런 관성과 습관들로부터 탈피하지 못해 얼마나 씁쓸한 시간을 보냈는지... 그러니까 저는 잘난 체 하고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답니다. 오히려 저는 그 진흙탕의 가장 떼어버리고싶은 찌꺼기였죠.
그리고 몇가지 오해가 있었다는게 확인되어 기쁘네요. 그리고 나만 아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멋대로 ##이라고 썼던게 또 이렇게 예상치못한 곳에서 마주치게 되어 신기하네요. 결혼식 끝나고 제가 도망가려니까 뒷풀이 갔다가지 왜 또 도망가냐고 부르던 ##씨의 모습이 생각나요. (웃음) 카리스마있는 1인의 아우라에 의해 움직여지는 학생**도 이제 종언을 고한거겠죠?
병장 김예찬
이 글을 읽고 06학번인 저 자신이 얼마나 이전 학번 세대와 큰 단절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선배'라 부를 수 있는 세대로 부터 어떤 '경험'을 물려 받지 못했다는 것 역시 저 같은 세대의 비극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K대 같은 경우는 05학번을 기점으로 이러한 단절이 생겨난 것 같은데, 이러한 단절이야 말로 결정적인 의미에서 학생 사회 종언의 증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