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베스트-독서후기] 공중그네, 자유를 말하다.
상병 윤현상 2009-07-11 06:17:14, 조회: 219, 추천:0
하나.
“원인을 알면 간단하지. 저질러 버리면 돼. 그러면 낫게 돼 있어.”(p.176)
누구나 한번쯤은 다 거치는 방황기가,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찾아왔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혹은 내 존재의 의미가 무엇일지를 설익은 머리로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사춘기 소년의 치기어린 반항과 제도권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엄한 감시와 훈육으로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여야 했던 나에게, 중학교 입학과 함께 찾아온 부모님의 실직과 창업은 억눌렸던 욕구를 분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학원은 함께 노는 아이들이 뭉치는 집합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고, 부모님의 무관심을 틈타 학교를 하루 이틀 안가는 것쯤은 크게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고 해치우던 그런 시기였다. 매일 밤 학원을 땡땡이 치고 아파트 단지를 쏘다녔고, 잡으려는 학원 선생님들과는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벌이며 그 행위 자체를 즐기곤 했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본능적으로 강요와 억압,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탈출해 ‘자유’를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형성된 내 정체성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라는 것으로 뿌리 깊게 박혀버렸고 언제나 그 감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일례로 중학교시절 내 성적표는 언제나 ‘수’아니면 ‘미’였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내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한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자유의 부재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본권을 그 어느 때 보다도 보장한다는 현대에, 왜 사람들은 자유를 이토록 갈망하는가? 왜 우리는 주어진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면서, 그토록 자유를 찾아 헤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프롬에 따르면, 근대에 들어 신분제가 허물어지고 시장경제가 발달하며 형성된 시민사회에서 확장된 자유는, 부르주아, 쁘띠 부르주아, 하층계급에게 각기 다른 영향을 미쳤다. 부르주아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생활을 향유하며 그들이 얻은 자유를 만끽했다. 하층계급은 애초에 가진것도 잃을 것도 없었기에 자유의 획득이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그들에게 자유는 변화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 늘어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쁘띠 부르주아들은 달랐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부르주아였지만, 경제력은 그만큼 뒷받침 되지 못했다. 자유의 대가로 그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으며,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들 대부분은 쁘띠 부르주아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우리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경제적 이유로 일부는 또 다른 이유로 자유를 속박하고 안정을 찾는다. 이 안정에는 지배적 규범이 요구하는 척도를 지킨다는 전제가 붙어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라부의 정신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처럼 욕망을 억누르고 있으며, 강박증을 앓고 있다. 이라부의 행동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그가 자신이 지닌 자유의 활용에 적극적이며, 사회가 규정하는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내면에 감춰져있던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둘.
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소위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내가 속해있던 과 학생회,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 친구들, 그리고 동아리까지 모두 같은 성향이었다. 나 스스로도 그편이 잘 맞고 익숙했다. 그렇지만 나와 몇몇 친구들은 학생회도, 동아리도 오래지 않아 그만두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선배들의 사상적, 의무적 강요에 질려 있었다. 동아리원이라는 이유로 공감할 수 없는 집회에 출석을 요구받는 것이 싫었다. 저학년이라고 일방적으로 교육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 속해있던 동아리/학생회의 성향차이로 인해 우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그들의 상호비난과 질책이 싫었다. 우리는 이 모두에서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절대 저렇게 되지 말자고, 우리는 강요하지 않고 동등하며, 모두가 ‘자유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생각했었다.
3학년이 되면서 만들어진 모 학회에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곳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따로 없는, 학년에, 나이에 상관없이 말을 놓고, 함께 읽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공부하는 곳이었다. 다음으로는 사회과학 세미나가 뒤를 이었다. 3학년 말에 시작한 이 세미나는 책 한권을 선정하고 그 책을 읽고 공부하고 싶은 사람만 참여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다음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오지 않아도 좋고, 그 다음 책이 읽고 싶으면 다시 나와서 읽으면 되는 ‘하고 싶은 사람만 하는’ 출입이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4학년이 되면서 이 모든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또 하나의 ‘모임’을 만들었고, 어쩌면 그간 노력의 절정이라 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입궁을 했다.
그렇게 1년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설탕을 나가 그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잔뜩 기대를 품고 간 그 모임에서,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어왔던 친구들이 서로를 상처 입히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급기야 한 친구는 “이제 하고 싶은 사람만 하자는 얘기만 들어도 진력이 나. 대체 그러면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건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은 지금껏 우리가 해 온 일들을, 내가 그간 살아온 방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그간의 노력들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더 슬펐던 것은, 친구의 그 말을 납득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평소랑 다른 걸 써 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평소랑 다른 거?”
“틀에 박힌 뻔한 일이 강박관념을 야기하는 것 같거든.”
...(중략)...
“그러니까 일단 간판을 내리는 거야. 그럼 홀가분해 질텐데.”
...(중략)...
“어쨌거나 인간에겐 변화가 필요해.”(pp.285~286)
중요한건 하고 싶은 사람만 한다거나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이었고, 정체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변화였다. 대학 3년 동안 만들고자 했던 ‘자유로운 그 무엇’은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의무와 강요가 만연한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이었고, 그 과정이 힘들어도 즐겁게 임할 수 있었던 건 그 행위가 기존의 공간을 파괴하고 새롭게 재정립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우리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공간은, 만들어지자마자 또 하나의 작은 규범으로, 권력으로 작용했고, “하고 싶은 사람만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자”는 명제는 강요가 되고, 또 다른 억압기제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인간에겐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변화는 강요된 변화여서는 안 된다. 강요된 변화는 우리가 밟아왔던 실패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기반에 둔 변화와 수정만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45:42
상병 이재용
단체란 존재의미 자체에 이미 규범이 포함된 게 아닐까싶은데요. 아무리 어느정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한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모인 이상 그 단체의 지속성에는 최소한의 지배적 규율은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뭐 아무튼 왠지 현상님이 만드신 저 모임, 왠지 "무정부주의자들의 정부"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흥미본위로 읽기 쉬운 공중그네에서 이런 글을 뽑아내시니 생각없이 공중그네를 쭈욱- 읽어버린 제가 왠지 부끄럽군요. 2009-07-12
17:23:31
병장 송원호
그냥 웃으면서 본 책에 이런 생각들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2009-07-14
12:53:24
상병 윤현상
재용/ 저는 한번도 제가 하는 일들이 무정부주의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재용님의 말을 듣고보니 내심 뜨끔하군요. 어쩌면 제가 속한 모임의 성격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에 그 안에 무정부주의적인 속성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모든 혁명가들이 한번쯤은 무정부주의를 추구했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으음. 복잡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