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병장 이승현 03-09 17:09 | HIT : 146 



# 아래의 시는 보르헤스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마지막에 실린 골렘이라는 작품입니다. 전문은 아니고 몇 부분은 임의로 뺐습니다. 정우님의 글 중에서 언어 이상의 언어라는 말에 영감을 받아 오늘 문득 쓰게 되었는데, 글의 내용중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으시더라도 너그러이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시에 대한 감상일 뿐이니까요. 무엇보다 부족한 감상으로 보르헤스의 명성에 먹칠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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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이 크라틸로스에서 확언하듯이)
 이름이 사물의 원형이라면
< 장미>라는 철자에 장미가 있고,
 나일강 전체가 <나일강>에 있으리.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끔찍스런 원형의 이름도 있으리.
 신의 본질을 담고 
 적확한 음절과 철자에 전지전능을 간직하는.

 우리의 불완전한 표상체계로서의 언어가 아닌, 만물을 발생시키고 참된 이름을 부여한 "태초의 말씀"으로서의 언어를 상상해본다. 기표와 기의로서 나누어지지 않는, 사물의 시작과 끝, 공간적인 분절성을 모두 간직하는 창조주의 언어. 나는 그것을 달리 말해 완전성, 혹은 완전한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나의 사고, 나의 의식, 나의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실은 어휘들의 우발적이며 우연적인 조합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본질"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본질"의 끝없는 귀결은 결국 나의 불투명한 인식 너머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추측할 뿐, 혹은 달리 "신"이라고 이름부를 뿐이다.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 혹은 불완전한 이름들. 그것이 우리의 언어가 아닐까. 가능성이라는 말이 늘 한계라는 말을 다른 눈먼 손으로 더듬고 있듯이.
 꿈의 언어를 떠올려 보자. 기호와 지시, 의식의 내용을 담은 낮의 언어와 달리 상징과 은유, 왜곡된 형태의 모호한 암시를 반영하는 무의식의 언어를. 나는 그것을 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단지 일부분에 대해 의식화할 수 있을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하나의 정신적 기초로부터 갈라져 나온 의식과 무의식의 언어가 있다면,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포괄하는 또다른 언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동시에 사물의 여러 가지 양태들로부터 하나의 원형을 추측할 수 있다면,우리의 언어 또한 하나의 양태임을, 그리고 언어들의 원형적 언어를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과 별들이 그 말을 알고 있었지.
( 히브리 신비주의자들이 이르기를)
 원죄의 녹이 점점 뒤덮여,
 후손들이 그 말을 잃었다네.

 선악과를 먹은 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선과 악을 나누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선과 악은 본디 합일되어 있던 것. 아담은 이제 하나였던 것을 나누고 분열된 인식만을 갖게 된 셈이다. 창조의 근원적 비밀을 망각한 불완전함. 그것이 바로 원죄가 아닐까. 서로의 거꾸로된 반영으로서 둘이며 하나인, 빛과 어둠, 낮과 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신과 인간. 세계와 사물들에게 제 이름을 붙여 주었던 또다른 창조자인 아담은 영원한 창조의 언어를 잃고 원죄의 결과로 죽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 또한 선악과와 원죄에 대한 불완전한 해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상징의 비밀은 오직 상징 그자체로서 표현되며 숨겨진다. 단지 이에 덧붙여 기독교의 상징에 대한  어떤 해석을 기록해둔다. 
"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어 인간을 구원하고 신 자신을 구원했다. 죄가 없이는 회개도 없으며  회개가 없이는 구원의 은총도 없다는 것. 더욱이 원죄가 없었더라면 세계 구원의 극도 상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궁리와 진지함은 한정 없었지.
 어느 날엔가는
 유태 마을 선민들이
 그 이름을 찾아 지새웠으니

 신만의 지식을 알려는 갈망으로 
 유다 레온은 철자를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복잡한 변이형을 시험하다,
 마침내 신의 원형의 이름에 이르는 열쇠인

 문, 메아리, 손님, 궁전이라고
 인형에게 말하게 되었다.
 언어, 시간, 공간의 비밀을 가르치려
 자신의 서툰 손으로 빚은 인형에게.

 피조물은 몽롱한 눈꺼풀을 들고 
 소음섞인 형상과 색깔을 
 이해할 길 없이 쳐다보았네.
 그리고 시험삼아 두렵게 몸을 움찔거렸네. 

( 조물주 역할을 한 히브리 신비주의자는
 거대한 피조물을 골렘이라 불렀다.
 이 사실을 숄렘이 자신의 책,
 박식함이 가득한 어느 구절에 언급한다.)

 신성한 이름의 철자나 발음에
 아마 실수가 있었겠지. 
 그토록 빼어난 마법술에도 
 견습인간이 말을 배우지 못했으니.

 언젠가 혼자 길을 걸을 때 조용히 허공을 울리던 나의 발자국 소리를 기억한다. 그 단조롭고 규칙적이며 나지막한 소리는 구두 뒷굽이 내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곧 나를 반영하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내 마음의 템포에 따라 빨라지기도, 다시 느려지기도 하고 때론 신경질적으로 어느 때에는 평온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내 인생을 지속하는 순간순간의 나를 표상하는, 동일한 나에 대한 다른 이름들, 예를 들어 거울 속의 수많은 내 얼굴과 같은, 또  나를 부르는 내 이름의 서로 다른 뉘앙스 같은, 매번 다르며 그럼에도 늘 동일한 그 이름들은 곧 나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하나의 은유들이 아닐까. 그리고 나라는 표상은 또다른 무엇에 대한 하나의 은유인 것이 아닐까.

 피조된 손을 자신의 조물주 랍비에게 치켜들며
 그의 신앙심을 흉내내었지.
 혹은 바보 같은 미소를 띄며
 동양적인 큰 절을 올렸다네.

 랍비는 그를 다정하게 
 또한 막연한 공포로 바라보았네.
<( 혼자 말하기를)> 내 어찌 무위의 현명함을 저버리고
 이 골치 아픈 아들을 창조했던고?

 하고 많은 중생이 있거늘
 뭐하러 하나의 표상을 더 첨가했을꼬?
 영원으로 감기는 속절 없는 실타래에
 어쩌자고 또다른 인과응보와 번뇌를 제공했을꼬?>

 흐릿한 빛이 감도는 고뇌의 시간에
 랍비는 골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지.
 프라하의 그 랍비를 바라보며
 신이 느꼈을 감정은 그 누가 말해주리? //

 보르헤스가 단편들을 통해 또 이 시를 통해 전하는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꿈꾸어진 존재, 즉 피조물"이라는 인식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꿈꿀 수 있는 존재라는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인식을 내포한다. 골렘이 인간의 피조성과 창조 행위에 대한 비유라면, 또다른 골렘인 인간은 무엇의 비유가 될 것인가?

" 창조하며 창조되는 대극의 일치 저편에, 신이여 당신이 그곳에 있나이다.인간은 신의 비유이다. 인간은 즉, 신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양식에서의 신이다. 인간은 또한 우주이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 그렇지 않다. 그는 물론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소우주이다."    
( 칼 융 - 원형과 무의식 중에서)

 나의 정신은 답을 쫓고 있다. 존재에 대해, 의미에 대해, 이 하루하루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마침내 찾아올 죽음에 대하여. 답을 쫓는 나는 의혹이며 물음이다. 그리고 나는 답의 또다른 양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혹은 더욱 정묘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져야 한다. 우리는 다름아닌 의혹으로서 답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