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관하여
병장 이승일 05-17 00:29 | HIT : 477
인간관계에 관하여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내가 말하려는 관계는 모든 인관관계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여러 형태의 관계 중 하나에 속한다. 나는 이 특정한 관계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인간관계의 유형이라고 믿는다. 이제 이 관계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내가 말하려는 관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무엇보다도 일반적이고 진부한 것이다. 때문에 '인간관계에 관하여' 라는 거창한 제목에 비해 내용은 실망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진부한 것을 구태여 말하려는 이유는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함축 -내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중요한 함축 - 을 조금이라도 끄집어내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나는 편의를 위해 이 관계를 Λ (람다)라고 부르겠다. 이렇게 기호로 표시하는 이유는, 그 관계를 직접 말할 경우 다소간의 선입견을 갖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1.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Λ
Λ 는 하나의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이 인간과 맺는 관계"라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생각은 아직 충분히 명료하지 않다.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를 구분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1) 인간이 서로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
2) 인간이 서로 다를 필요가 없는 인간과 맺는 관계
내가 말하려는 인간관계 Λ 는 이 중 두번째를 의미한다. 한 인간이 자신과 다를 필요가 없는 인간과 맺는 관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Λ 는 타인과의 관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를 반사적reflexive 관계라고 한다.) 따라서 Λ 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 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갖는 관계의 특성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매우 특수한 위치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痢??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하여 단지 '외적으로' 밖에 접근할 수 없다. 사물이건 인간이건 간에, 우리는 대체로 대상의 외향이나 행동 등을 통해서 그것을 인식하고 평가한다.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내적인' 것들까지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내적인 것이란 이유와 목적을 가진 <마음>이다. 나는 -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내 행동 뿐 아니라 그 행동의 이유와 목적을 알고 있다. 나는 내 행동을 유발하는 마음을 알고 있다.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명료하게 알고 있다. 내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셨을 때, 나는 정말로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신 것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만약 다른 이유가 있었더라도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신경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이 이러 저러한 뉴런의 정보전달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때의 '때문에' 는 원인을 의미할 뿐 이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뉴런의 그 어느 곳에서도 이유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 신경과학은 인간 행동에 대한 다른 방식의 묘사일 뿐 그것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한 혼동이 신경 과학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혹은 반대로 신경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맹신을 초래한다.)
자, 이렇게 외적인 행동 뿐 아니라 내적인 마음까지 열람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대체로 호의적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거지에 대해서 호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매우 냉혹하다. 나 자신의 실패와 무능력에 대해서, 나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혹하다.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실패를 반복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신의 불성실에 대해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자기 계발' 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좋아한다. 뭔가 좀 모순적이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성들에 만족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역시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은 자신의 개별적인 특성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 라는 인격체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호한 것 같지만 매우 명료한 사실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교도소에 있는 죄수나 장애인, 기타 커다란 결함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가 아주 나쁜 속성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자기 자신의 결함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은 분명 자기애에 대한 반증이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 때문에 괴로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궁극적으로 좋아하는 대상, 즉 '나'라는 '인격체'는 구체적인 특징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잘났기 때문에 나를 더욱 좋아할 수가 있다. 그리고 내가 못났기 때문에 나를 덜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잘남' 과 '못남' 은 일종의 양념 같은 것이지 주 매뉴는 아니다. 나는 내가 잘났건 못났건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인격성과 구체적인 특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페미니즘과 인격성' 이라는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인격성과 구체적인 특성들 간의 관계가 무한집합과 유한집합간의 관계와 같다는 것도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관계가 바로 관계 Λ 이다. 이것은 나와 나의 구체적인 속성이 맺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 라는 인격체가 맺고 있는 관계이다. 그리고 나라는 인격체는 외적인 방법에 인식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방법에 의해 알게 된 것이다. 이유와 목적을 지닌 하나의 마음으로서의 나, 그것이 나의 인격체이다.
2. 타인과의 관계 Λ
이제 관계 Λ 를 나 이외의 인격체에게로 넓혀보자.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에 비추어보자면 '나 이외의 인격체' 라는 말에는 모순적인 면이 포함되어있다. 인격체란 이유와 목적을 지닌 하나의 마음이라고 하였고, 이것은 내적인 방법에 의해 접근가능하며, 내적인 접근을 허용하는 대상은 오직 나 자신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 이외의 마음은 확인할 수 없으며 나 이외의 인격체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타인이 마음을 갖고 있음을 대체로 의심하지 않는다. 타인은 나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같은 말을 하고, 내 물음에 알맞게 응답하고, 알맞게 행동한다. 이 모든 증거들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마치 내적으로 접근하는 것 만큼' 확실하게 타인이 하나의 인격체임을 증거한다. 나는 증명이라는 말 대신 증거라는 말을 썼다. 증명은 100% 확실한 것이지만, 증거는 충분히 확실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의 존재를 충분히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나는 타인의 마음, 즉 나와 다른 인격체에 대해 관계 Λ 를 '충분히' 맺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다. 이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구체적인 속성들이 아니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내 구체적 특성들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타인이 가진 구체적인 속성들은 분명 관계 Λ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더 Λ 하고 덜 Λ 함을 결정할 뿐이다. 내가 만약 타인을 정말로 나와 같은 인격체로 인정한다면, 나는 그의 여러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할 수 있다. (이것이 이상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어째서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주의할 것은, 우리가 타인의 단점들을 좋아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나의 단점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매우 괴로워하고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고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Λ 하는 타인의 단점들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가능하다면 고쳐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단점 때문에 완전히 포기하지 않듯이, 그 사람을 그 단점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Λ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우리는 타인을 질책할지언정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한편 Λ 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만약 '갑'이라는 사람이 '을'이라는 사람과 Λ 라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보자. 즉 '갑Λ을 ' 이라고 해보자. 갑은 자기 자신이 마음을 갖고 있듯 을도 이유와 목적을 가진 인격체임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좋아할 것이다. 그의 잘나고 못난 특성이 아니라, '그' 자체를 말이다. 한편 을은 '병'이라는 사람에게 Λ관계를 갖고 있다고 해보자. 즉 '을Λ병' 이라고 해보자. 자, 그렇다면 갑은 병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 갑이 정말로 을을 Λ 한다면, 즉 을의 마음을 좋아하고 존중한다면, 을이 존중하는 병의 마음도 존중하지 않겠는가? Λ 는 구체적인 특성들에 의해서 구성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갑은 병이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물론 그러한 특성 때문에 을이 병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덜' 좋아할 수 있겠지만(혹은 '더'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을을 존중한다면 그가 존중하는 병 역시 존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갑Λ을' 이고 '을Λ병' 이라면 '갑Λ병' 이라고 말이다. Λ 의 이러한 성질을 '추이성transitiveness' 라고 부른다.
3. 관계 Λ 의 완성
이제 어떤 유한한 인간 집단 내에서 관계 Λ 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적극적이라는 말은 다음을 의미한다. "집단 내 임의의 개인은 다른 모든 개인과 관계 Λ 를 맺는다." 다시 말해 집단 내의 모든 맴버와 Λ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은 논리적으로 다음을 함축한다. "만약 aΛb 이면 bΛa 이다." 이러한 관계를 대칭적symetric 관계라고 부른다.
만약 Λ에 관한 <프로파간다>가 적극적으로 수용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1. Λ 는 반사적 관계이다. 즉 aΛa 이다.
2. Λ 는 추이적 관계이다. 즉 aΛb & bΛc →aΛc 이다.
3. Λ 는 대칭적 관계이다. 즉 aΛb → bΛa 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수학에서 '동치관계' 를 이루는 조건이다. 동치관계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동일성 관계 '=' 가 있다.
우리는 Λ 가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면, Λ 가 동치관계의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하나의 동치관계는 임의의 집단에 대해 하나의 '동치류equivalent class' 를 구성한다. 동치류란 '동등한 것들의 집합' 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만약 어떤 집단에서 관계 Λ 가 적극적으로 수용되면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은 의미에서 동등하게 되며, 그 집단은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된다.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관계 Λ 는 <사랑>을 의미한다. Λ(람다) 는 Love 의 머릿글자를 표시한 것이다. 나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명제가 한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될 경우,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가 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 자신과 같이' 라는 부분이다. 이 점으로 인해 사랑은 반사적 관계가 된다.
이 글의 논지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남을 사랑하는 것도 훨씬 쉬워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그것을 충분히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삶만이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심지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 병장 김지민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11 09:26)
병장 진규언
몇자 적어보다가 두말없이 <가지로> 추천합니다.
" 자기 자신의 결함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은 분명 자기애에 대한 반증이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 때문에 괴로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요새 저 자신의 심대한 결함들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입력양'이 있어야 '출력양'이 있을텐데 당최 머리속에 들어가는게 없으니 좋은 생각들이 아무것도 뽑아져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상하고 슬픕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그마한 실천이라도 해야할텐데 이조차도 못하고 있어서 스스로에 대한 환멸감마저 들려고 하는 중입니다.
이것들에 대해 저 대신 변명해주셔서 참 고마워요. 아울러 명명해주신 관계 Λ 가 발현하는 사회라니, 꿈꾸어 봄직한 세상입니다. 진짜 '사해동포주의'가 되겠네요. 가까운데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항상 말뿐입니다. 05-17
병장 안수빈
가지로!! 가지로! 05-17
상병 박준연
Λ를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실천에 옮기게 할지가 관건이겠군요!
관계의 최고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말하던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가 떠오르네요. 05-17
병장 강세희
접근방식은 조금 다를지언정 그러한 인간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동일하기에, 더군다나 언제나 그렇듯 승일씨 특유의 논리학적 방식으로 설명해 주셔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관계맺음이 과연 각 개인의 깨닮음과 실천적 노력으로 가능한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저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 질서 하에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명제가 모든 개인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외적 조건 또는 접합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05-17
병장 이승일
규언 /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대부분 무능해서가 아니라 유능해서라고 생각해요. 유능한 사람일 수록 버리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지요. 제 생각에 실천은 꾸짖는다고 되는게 아니라 정말로 그게 좋다는걸 알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좋은걸 선택 안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정말로 좋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을 뿐이죠.
세희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 부분이 사실 핵심입니다. 저는 세희씨가 반대로 생각해보시길 권하겠습니다. 온 세상이 그것을 받아들이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사회를 상상해보자는 말이지요. 저는 후자를 염두해두었기 때문에 '인류 전체' 라고 하지 않고 '어떤 집단'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인류 전체가 받아들인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그럴지도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니까요.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 경우에만 선택한 사람들의 사회는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전체는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없어도, 개인은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시대에 살고 있건 말입니다. 이 사실이 변한적은 제가 보기에 역사상 단 한순간도 없습니다. 05-17 *
병장 강세희
승일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선택의 문제는 완벽히 동의합니다. 어떤 집단의 삶의 모습에 사람들이 긍정하는만큼 그 집단은 자발적으로 더 확장될 것이라 믿으니까요. 저의 논지는 개인을 강제하는 절대적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발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접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선택을 통해 이러한 확장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승일씨도 힘들어 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집단'은 지금과 같은 모습의 '인류 전체'의 부분집합으로 등장할 수 없을 테니까요. 05-18
병장 이승일
세희 / 오, 놀랍게도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은 개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여왔습니다! 역사상 기독교 만큼 넓은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된 사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