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서문 
 병장 이건룡 06-18 13:10 | HIT : 122 



 최근 생활이 점점 탁해지는 것 같다. 우울에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보아도 흐린 날씨만 불뿐이지만 불길한 전조를 예감하는 것도 쉬워졌다. 쌓여온 우울한 전조들 탓에 발랄한 삶은 동떨어진지 오래인지 의심해본다. 축구를 하여도 당시만 기쁘지 돌아오면 맞이하는 것은 불길한 그늘과 정적이다. 쉽게 말하면 요새 정이 팍팍 떨어지는 행위를 묵인을 많이 한다. 최근 후임들의 표정을 그리 썩 달가워하지 않으니 이 기분을 살리어 '<계몽의 변증법>의 서문'을 옮겨 본다. 꽤나 서문 치고는 장수가 많아 옮기는 데 버거웠지만 '책마을'사람들과 같이 읽어 볼 이들도 있으니 힘내며 적었다. 관심 있는 분을 환영하며 손가락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없이 옮겨 내었다. 치졸하지만 분명 강조하건데 누구나 관심 있는 글이라 생각이라 믿는다(*<계몽의 변증법>은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 하이머의 합작이다. 1947년에 발간한 것을 그들이 1969년 재 발간한 것이다. 국내에선 문학과 지성사 재 번역하기도 하였으며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중에 선별된  책이기도 하다. 테오리아는 그리스어로써 '이론'이라는 뜻이다).


 계몽의 변증법 서문

 완성된 초고를 프리드리히 플록에게 바치려 하는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의 50회 생일 까지 작업을 모두 끝낼 수 있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과제를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의 힘이 그 작업을 감당하기에 모자람을 느꼈다. 우리가 이 과제에 착수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다만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졌는가라는 인식이 이었다. 우리는 현재의 의식에 너무나 친숙했기 때문에 기술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했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우리는 현대 응용 학문에서의 눈부신 발명들이 초래한 상황을 '이론'으로 형성해내는 작업이 어쩔 수 없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분과 학문들의 범위 내에서 다른 이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과정 속에서 수행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최소한 주제 면에서 보아 우리는 전통적인 분과 영역들, 즉 사회학ㆍ심리학ㆍ인식록을 떠나지 않고자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하나로 묶은 단상(斷想)둘은 그렇지만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포기 했어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문적으로 전수되어 내려온 것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검증하는 작업 시 - 이런 작업은 실증주의적인 정화론자들에 의해 쓸모없는 허섭스레기로 판정되어 망각되어지도록 요구된 부분들에 특히 해당 된다 - 인식의 한 계기를 이루는데, 시민 문화가 붕괴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학문 활동 뿐만 아니라 학문의 의미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철같은 파시스트들이 위선적으로 예찬하는 것, 도한 순응적인 휴머니즘의 전문가들이 순진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 즉 '계몽의 지칠 줄 모르는 자기 파괴'는 사유로 하여금 남은 순진성마저 폐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어떤 사상도 상품으로 또한 언어는 상품을 위한 선전이 되는 것이 현재의 공적 상황이라면, 이러한 전락의 과정을 추적하려는 시도는 통상적인 언어적ㆍ사상적 요구들을 고분고분 따를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이러한 세계사적인 추세는 결국 '사상'이라는 것을 완전히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것이 단순한 학문의 자기 망각적 도구화에서 초래된 장애물이라면 사회 문제에 관한 사유는 최소한 공식적인 학문에 저항하는 노선들에 가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선들 또한 전체적인 생산과정에 사로 잡혀 있다. 그들은 그들이 목표로 삼은 이데올로기만큼이나 그들 자신도 변질되어 있다. 승리한 사상이 옛날부터 겪을 수박에 없었던 것을 그들도 겪고 있다. 승리한 사사상이 기꺼이 비판적 요소로 포기하고 단순한 수단이 되어 기존 질서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예전에 선택했던 긍정적인 무엇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18세기에 뻔뻔스런 자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주었던 철학은, 산더미처럼 쌓여 불태워진 책과 인간들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밑에서 이미 자신을 자시 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콩트의 변명적인 학파는 비타협적인 백과전서파로부터 승계권을 빼앗아 와서는 이들이 저항했던 모든 것과 손을 잡았다. 비판을 긍정으로 변조시키는 것은 이론의 핵심까지도 건드리게 됨으로써 그 진리를 증발시켜 버린다. 오늘날은, 물론 가속력을 얻은 역사가 그러한 정신적인 발전마저 추월하며, 사실 관심은 다른 데 있는 공식적인 대변자들이 그들을 양지바른 곳으로 나가게 만들어준 이론을 세간의 입방아 속에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기 이전에 폐기 시켜버린다. 

'사유가' 자신의 죄과를 돌아보건대, 사유는 학문적 내지 일상적 개념어의 긍정적 사용뿐만 아니라 저 저항적 개념어의 긍정적 사용 또한 박탈당하고 있음을 본다. 지배적인 사고 방식에 부합되지 않는 표현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으며, 수명을 다한 언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리는 사회의 메커니즘에 의해 효과적으로 채워진다.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영화 산업이 행하는 '자발적인 검열'과 같은 것이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하나의 문학 작품이 겪어야 하는 과정, 즉 작가의 자동적인 사전 배려뿐 만 아니라 출판사 안팎에 독자, 발행인, 편집자, 유령저자가 벌이는 작업들은 어떤 철저한 검열도 능가한다. 이들의 기능을 완전히 무력화하여는 노력은 어떤 훌륭한 개혁에 의해서도 도달할 수 없는 교육 체제의 야망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을 단순히 확인하거나 상식적으로 그럴듯해야 한다는 한계 내에 엄격히 머물지 않을 경우 인식하는 정신은 사기나 미신에 떨어지기 쉽다는 견해 속에서 사기와 미신이 마음껏 설칠 수 있는 척박한 토양이 마련된다. 예로부터 금지가 오히려 마약 같은 독극물로의 접근을 부추겼듯이 이론적 상상력의 차단은 정치적 광기에 김을 활짝 열어준다. 아직 인류가 그러한 광기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인류는 내적ㆍ외적 검열의 매커니즘에 의해 저항 수단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작업이 당면하고 있는 난관Aporie은 바로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첫 번째 대상, 즉 '계몽의 자기 파괴'임이 증명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자유가 계몽적 사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의 - 아직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 전제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뒤엉켜 들어간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나 사회 제도뿐만 아니라 이 계몽 개념 자체가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다. '계몽'이 이러한 퇴행적 계기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계몽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진보'의 파괴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진보의 적에게만 내맡겨져 있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맹목적으로 실용화된 '사유'는 지양시키는 힘을 잃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진리에 대한 그의 연결 끈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의해 교육된 대중으로 하여금 그 어떤 전체주의의 손아귀에 떨어지도록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경로, 집단적인 편집증과 흡사한 그들의 자기 파괴적 속성, 그리고 모든 이해를 초월한 저 부조리 속에서 현대의 이론적 이해가 얼마나 취약한가가 드러난다.  

 계몽이 신화로 퇴보하게 된 원인은 이러한 퇴보를 위해 고안된 민족주의적ㆍ이교적 또는 다른 현대적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직된 '계몽'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 단상들의 모음집에서 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계몽과 지니리라는 두 개념은 정신사적 개념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이 시민 사회 전체의 현실적인 운동을 개인이나 제도 속에서 구현된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표현하는 것이라면, 진리란 이성적 의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성적 의식이 현실 속에서 드러난 형태를 일컫는다. 현대 문명 의 적자(嫡子)가 가지는 불안, 그것은 '사실' - 이것을 인지하려 들 경우 이 단어 자체가 과학이나 장사나 정치에서 일반적인 쓰임에 의해 충분히 상투화 되고 손상된 것이지만 - 을 놓칠 것 같은 불안으로 이 불안은 사회적 일탈에 대한 불안과 직접적으로 동일 항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이나 문학이나 철학이 충족시켜야 할 '투명성'의 개념 또한 비슷한 쓰임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이 개념은 '사실'이나 지배적 사고방식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사상을 애매하고 까다로운 허식주의 또는 잘해야 추상적이고 시의성 없는 것이라고 터부시함으로써 '정신'을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에 가두어버린다. 구제불능의 상황에서 빚어진 대표적 현상은, 닿아 빠진 언어를 가지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개혁가가 그의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마모된 범주들과 함께 그 뒤에 숨어 있는 사악한 철학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분쇄하고자 하는 기성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거짓된 '투명성'은 심화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 '신화'는 선명하게 밝혀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둠 속에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예로부터 신화의 특징은 친숙성과 함께 개념화의 노고를 피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이탈된 상태는 사회적 진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경제적인 생산성의 증가는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 장치와 이를 운용하는 집단으로 하여금 국민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엄청난 우월성을 갖도록 해준다. 개인은 경제적 세력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 된다. 이 세력은 자연에 대한 사회의 폭력을 일직이 예견하지 못한 정도 가지 밀고 나간다. 개인은 그가 사용하는 기술 장치 앞에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그 대가로 이 장치에 의해 과거 어느 대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 받는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에게 분배되는 재화의 양이 증가할 수록 대중의 무기력과 조종 가능성은 커진다. 하류층의 생활 수중이 향상되었다는 것 - 물질적으로는 괄목할만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보잘것없는 - 은 '정신'이 온 사방에 확산되어 위선적이 되고 천박하게 된 데서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정신'의 진정한 속성은 물화에 대한 부정이다. '정신'이 문화 상품으로 고정되고 소비를 위한 목적으로 팔아 넘겨질 때 '정신'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와 유치한 오락의 범람은 인간을 영리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바보로 만든다.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헉슬리, 야스퍼스, 오르테가, 이가세트들의 문명 비평가가 의도했던 '가치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인류가 완전히 배반당하지 않으려면 '계몽'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과거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약속된 희망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는 과거의 파괴로서 지속된다. 19세기에는 존경할 망한 '교양'이 특권이었다면 - 교양 없는 사람들의 그만큼 증대된 고통을 대가로 지불했지만 -, 20세기에는 모든 문화적 가치를 거대한 용광로에 녹여버림으로써 그 교양은 매각되었고 그 자리에 위생적인 공장의 작업 공간이 들어섰다. 문화의 매각이 경제적 성공이 아닌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데 기여하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매각은 문화 옹호자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현재의 여건 속에서는 행복의 재화들 자체가 불행의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과거 시대에는 사회적 주체의 결여로 말미암아 그러한 재화의 양이 국내 경제의 공황 시에는 소위 과잉 생간으로 작용했다면, 오늘날 그것은 사회적 주체하는 권좌에 오른 저 권력 집단의 능력에 힘입어 파시즘이라는 국제적 위협을 만들어 낸다. 진보가 퇴보로 전화되는 것이다. 위생적인 공장의 작업 공간, 그리고 이에 속한 모든 것, 또한 국민차나 체육 궁전, 이런 것들이 형이상학을 무자비하게 해체시켜 버린 것은 별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르나, 사회 전체로 볼 때 이것들 자체가 형이상학이 되어, 그 뒤에 실제적인 불행을 숨기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장막이 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이 단상들의 모음집은 출발하고 있다. 

 첫 번째 논문은 그 다음의 논의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서 '합리성'과 사회 현실의 뒤엉킴, 그리고 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자연과 자연지배의 뒤엉킴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여기서 행해진 '계몽'의 비판은, 맹목적인 지배에 연루된 상태에서 '계몽'의 긍정적 개념을 마련해 줄 것이다. 

 첫 번째 논문의 결정적인 부분은 크게 두개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이 명제들은 두개의 「부연설명」에서 특수한 대상들을 중심으로 논의된다. 첫 번째 「부연설명」은 시민적ㆍ서구적 문명을 대변하는 최초의 증인인 <오디세이>를 중심으로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을 추적한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개념은 '희생'과 '체념'인데, 이 개념들을 통해 '신화적이 자연'과 '계몽된 자연 지배'의 같음과 다름을 보여주고자 한다. 두 번째「부연설명」은 '계몽'의 무자비한 완성자인 칸트와 사드와 니체를 다룬다. 이 「부연설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모든 자연적인 것을 오만한 주체 밑에서 굴복시키는 것이 궁극에는 맹목적인 객체성과 자연성의 지배 속에서 어떻게 정점에 이르고 있는가다. 이러한 경향은 시민적 사유의 모든 대립들, 특히 도덕적 엄격성과 절대적 무도덕성의 대립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없앤다. 

'문화 사업'에 관한 장(章)은 계몽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로 퇴보하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와 라디오에서 이러한 퇴보의 전형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여기서의 계몽은 무엇보다 생산과 분배에서 효과와 테크닉을 조종하는 권력을 신격화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러한 모순은 다룸에 있어 문화 산업은 그 자신이 스스로 요청하는 것보다 좀 더 진지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상업적 속성에 대한 호소, 완화된 진리에의 고백이 이미 오래 전에 거짓말에 대한 책임 회피의 변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분석은 생산물 안에 객관적으로 내재하는 요구 - '심미적 형상'이 되고 이로서 '형상화된 진리'가 되려는 - 를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문화 산업은 저 요구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서 사회의 허상을 보여준다. 다른 장들보다 문화 산업에 관한 장은 단상으로서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반(反) 유대주의의 요소들'을 명제별로 다른 장(章은) 계몽된 문명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야만 상태로 희귀하는가를 보여준다. 자기 파괴로의 실제적인  머릿속에서 뿐만 아니라 - 경향이 '합리성' 안에는 처음부터 -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의 철학적 원(原)역사가 구상되었다. 그 비합리성이 지배적인 이성자체와 그 이성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세계로부터 추론되었다. 반 유대주의의에 관한 장은 '사회연구소'와 펠릭스 바일에 의해 창설되고 유지되는 연구 재단 - 그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의 연구 뿐 아니라 히틀러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추진된 독일 이민학자들의 이론적 작업의 상당 부분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 의 경험적 연구와 직접적인 연관하에 있다. 처음의 세 명제는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초창기부터 많은 학문적인 문제에 관해 공동작업을 해온 레오 뢰벤탈과 함께 집필했다. 마지막 부분은 스케치와 구상들을 묶어놓은 것으론 일부는 앞에 논의된 논문들의 사고 범위에 속하는 것들로서 마땅한 자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며, 다른 일부는 향후에 작업할 문제들의 윤곽을 잠정적으로 그려 본 것이다. 그 대부분은 '변증법적 인류학'과 관계된다. 

 로스엔젤레서, 켈리포니아, 1944년 5월 

 이 책은 전쟁 중에 완결된 텍스트에 어떤 본질적인 변경도 가하지 않았다. 차후에 덧붙여진 것은 오직 '반유대주의의 요소들'의 마지막 명제다. 

1974 년 6월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중간에 나온 백과전서파는 아마 18세기 달랑베르와 드디로의 합작인 백과전서가 연관 되었다고 생각된다. 드디로의 <달랑베르의 꿈>을 최근에 일독 했는데 그들은 당시 우세하던 종교세력에 비판적이며 특히 드디로는 초기의 유물론주의자이기도 하다. "모든 이세상의 사물들은 (구성하고 있는) 백가지 원소로 환원될 수 있다."는 블랑키의 말을 빌리듯. 



 병장 배진호 
' 계몽'이라.. 흥미로운 글이군요.. 충분히 그 손가락은 보상받을 만한 노력을 했다라고 
 생각이 되는군요. 
 하지만 중요한 건 중심이 크게 보이지 않는군요. 
 요점 말이죠.. 수많은 거대한 맥락들은 눈에 보이는데 말이죠. 

 음 어쨋건 이 글을 보고서 드는 의문은 
 아니 드는 생각은 
'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라고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 하지만, 그 어느것 하나 
 자유인것 없다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세계의 경제속에 들어가는 동시에 자유무역을 하는것이 
 되지만 세계의 틀에 휩싸여서, 아마도 얽매여 버리고 속박되어버리고 
 마는 세계의 속국이 되리라는 것이지요.. 

 어쨋건 계몽이라... 자신을 찾는것,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 해야하는 것일진데, 그것을 책으로 써서 가능하게끔 하려는 
 시도부터 조금 힘든 노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우선적으로 책은 읽혀야 그 사유가 전달 될테니 말이죠.. 
 즉, 어떠한 사상보다 만화책 한권의 사유적 힘이 더 클수도 있다라는거.. 
 그게 제 생각이네요.. 생각은 전달 되어야만 그 가치가 있다라는 것이죠.. 
 물론 그 고귀한 생각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죠.. 06-18   

 병장 김광철 
 백만불짜리 손가락이군요~? (웃음) 06-18   

 병장 이건룡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글은 고자세로 읽을 만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이론은 시대의 부정을 껴안은 유물론적인 사고로 가득 차 있으니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사유의 성좌는 우울함과 불길함 등의 암운이 짙게 가려져 있다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미완의 역사적 사고는 (푸리에적) 유토피아의 즐거움과 유용함을 목적 삼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으며, 서문 내용에 의하면 좌초된 미지근한 자유는 이미 자유라는 아우라가 깡그리 부서져 버려 나뒹구는 '허섭스레기'에 불과합니다. 자유와 마찬가지로 계몽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읽어 보고 그들의 사유를 거쳐 역사의 쓴맛을 사유하는 것이 본 책의 의도라고 미리 점치어 보고 있습니다. 

 아도르노의 사유와 밀접한 벤야민은 종교까지 유년기 시절의 꿈에 대해 '기분전환' 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데 하물며 만화를 통한 사유는...... 물론 생각은 전달 되야 하며 의사전달은 통해야 말이 되겠지만 보다 거대한 집단의 꿈속에서 잠자는 이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그만큼 '파괴'적인 각성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06-19   

 병장 배진호 
' 거대한 집단의 꿈속에서 잠자는 이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그만큼 '파괴'적인 각성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음 글 쓴 의도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군요. 
 새로운 잠자는 이들을 '깨우고' 싶어 하셨던 것이군요. 

 모든 글에는 목적과 의도를 내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 글은 약간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글이었군요. 
 어쨋건 그 역사의 쓴맛을 사유하는 것은 저도 한번 해보고 싶군요. 

 하지만 분명 제가 말한 의도는 알고 계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의 참여를 유도해 내기위한 몇가지 방편을 이야기하고 
 있고, 건룡님은 소유 몇몇의 엘리트들을 끌어 내기 위한 방안들을 
 이야기 하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어짜피 글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서로는 서로의 
 이익에 만족하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잠자는 이들은 언제 깨어나련지 모르겠군요.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아마도 맛있고 달콤하고 커다란 물고기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 그리고 흥미로운 글이라 함에 대한 뜻은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06-19   

 병장 이건룡 
 진호님의 생각은 잘들었습니다... 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