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個性)'은 왕(王)이시니라.
한국 청소년개발원이 지난 3월 초부터 4개월간 한국·중국·일본의 중, 고, 대학생 청소년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충격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대답한 비율은 일본이 41.1%, 중국은 14.4%, 한국은 10.2%에 그쳤다고 한다. ‘외국으로 출국하겠다’는 응답은 한국이 10.4%로 가장 높고 중국·일본이 2.3%, 1.7%였다. 일본은 극우의 물결을 선도하는 정치권의 현직 총리가 2차대전 패전 당일인 어제(8월15일)에 A급 전범이 두루 포진되어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는 시국인지라 퍼센트가 높은건 이해할수 있는 결과다.
그러나, 건장한 대한민국 남자라면, 징집되면서까지 2년 혹은 그 이상의 군 생활을 치러야하는 사회적 상황속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군생활을 무사히 마쳤음에도, 혹은 군생활을 해야함에도 이런 낮은 수치의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여기 또 다른 20대에 대한 보고서가 있다. 요즘들어 20대의 국산차 대비 외제차 구입 비율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여 드디어 3,40대의 국산차 대비 외제차 구입 비율을 넘어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구입대수도 단연 선두다. 백화점 명품관에는 이제 주고객층은 20대로 맞춰진지 오래다. 젊은이들은 ‘된장녀’라는 트렌드가 여실히 보여주듯 자신의 개성을 뽐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소비를 해 나간다. 맘에 드는 옷이 있다라면, 가격이 얼마가 되었던간에 구입하고 보는 것이다. 카드를 긁던, 부모한테 용돈을 받아쓰건간에.
이 두가지 기사엔 큰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젊은 청소년들의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에 따른 성향이 현실에 반영되어 나타났다는 결과인 것이다. 국가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우선이 되어 살아가라고 권하는 사회, 세계화에 발맞춰 개인적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전체보다는 '나'를 위해 투자하라는 신자유주의, 과소비라는 말까지 써가며 소비를 억제하던 때가 엊그제-불과 십년전이다.-같은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과소비를 장려하는 추세이니 젊은이들은 그래서 쓴다.
'나를 위해서.'
이러한 젊은이들의 과소비는 계속적으로 진행될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인지라, 기업들은 자신의 제품을 팔아제끼기위해 급급할 뿐이다. 소비자들의 지갑따윈 생각지 않는다. 그저 내것만 팔면 그만인 셈이다. -그래놓고 우리더러 뭘 왈가왈부 한다는 건지.-
과소비가 한풀 꺾일 지점 또한 뻔히 예상된다. 수입의 양은 동일한데 소비는 늘어난다. 그러려면 경제적 근본이 없는 젊은이들은 카드와 금융대출에게 손을 벌리게 된다.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빚더미에 어린 나이에서 벌써 채무자가 될테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면서 개인 파산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4,50대가 주류였던 개인 파산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질테고 20대에 개인 파산을 신청하는 경제적 파탄자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게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면 그제서야 불을 끄려는 정부적 차원의 계몽 붐이 일지도 모르고, 금리를 왕창 인상해버려서 소비를 수축시킬지도 모르고. 뭐, 그런건 알아서들 하세요.
혹자는 첫 기사의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서 국가관과 안보관 교육을 강조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가지치기일뿐, 문제의 본질에는 전혀 가닿지 못하는 안일한 대처다. 근시안적인 대책만으로 발등에 떨어진 불은 껐을지 몰라도 발 밑에 활활 타오를 예정인 큰 불은 보지 못한다.
젊은이들이 나라에 충성하는 정신이 흐릿해지고, -시간이 되면 나라를 지켜야하는 군대에 입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과소비를 유지하는 이유, 그것의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네 비자율적 교육의 문제점에 있다.
이번달인가, 저번달의 ‘인권’ 잡지를 읽었다. 특집 기획으로 제복관련 집중 취재가 나오더라. 그 중 ‘교복’ 파트의 글을 읽으면서 심히 감동 받았다. 젊은 우리의 문제가 여기에 있었구나. 라며.
대안학교에 다니는 고등학교 1학년의 여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교복을 없앤다고 해서 옷을 사입는 것 때문에 가정경제에 어려움을 미치지는 않을거라고. 물론 처음엔 매일 옷을 다르게 입고 온다는 강박관념에 옷에 투자하는 돈이 늘어날지는 몰라도, 그걸 꾸준히 유지하지는 않을 거라고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 나중엔 그게 귀찮아져서 똑같은 옷을 며칠씩 입고 오기도 하고 한다는 거다. 그러면서 어른들을 예로 든다. 어른들도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는건 아니지 않냐면서. 그러면서 그녀는 교복자율화에 찬성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미칠듯이 증가되는 '개성중시' 위기를 타개하려면 교육이 제기능을 해야한다. 일단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율화를 시작으로 학생들에 대한 제도적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선택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학생들은 올바른 선택을 할수 있는 힘이 길러진다. 올바른 소비를 할수있는 힘이 길러지고, 올바른 국가관을 체득할수 있는 힘이 길러진다. 강요한다고 해서 억지로 세뇌되어진다고 믿는 옛날하고 달라진 우리들이다. 우리는 많은 사실을 알고 있고, 그 많은 선택지에서 고르길 원한다. 그저 ‘교복’ ‘짧은 스포츠머리’ ‘서울대’ ‘공부’ 라는 획일된 선택지만을 고르기에는 우리의 피끓는 청춘이 감당해내지 못하고, 인터넷 등으로 유식해진 우리의 높아진 지적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개성' 이라는 것을 학생때도 체험하게 하면서, '개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목숨걸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개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학생들은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 나면 그것에 목숨을 걸어버린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 라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의 실천중에 이런 방법이 있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 홀로 앉아 자신의 이름을 2,30분 동안 계속 불러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나면 자신의 이름이 갑자기 낯설어 진다. 이름에 붙어있던 사회적, 관습적, 개인적 찌꺼기들이 떨어져나가고 자신의 이름을 진실되게 독대할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에 '개성'을 추가하라는 나의 요구 또한 이러한 것과 맞닿아있다.
우리는 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과소비를 하기 시작하는가? 왜 카드깡을 해서라도 비싼 명품 옷을 사입으려고 하는가? 왜 자기 개성을 위해 소비를 마다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민족적 유전자를 전승해주는 국가라는 집단에 염증을 느끼고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으려는건가?
중, 고등학교때부터 강요되온 교복문화. 그것부터 우리의 집단 불신과 개인주의는 심화되는 걸지도 모른다. 청개구리처럼 억압당해온 것들만 골라서 하고싶은 청소년기, 사춘기때에 학생들이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뿐이었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도 억압당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행위 또한 억압당한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어른들의 관용적 시선을 받는 위치이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려는 폭력적인 억압의 위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수능이 끝나고 나서부터 머리를 볶는다. 머리를 염색하고, 머리를 기르고, 졸업식때는 교복을 불태우고, 교복에 계란옷을 입히고, 교복에 튀김옷을 입힌다. 운전면허를 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배우고 싶었던 춤이나 요리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등록한다. 그것 들중에 ‘공부’는 거의 없다. 지겹도록 해왔다는 거다.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쓴다. 그러나 돈을 쓰는 방법은 교육받지 못해온 우리네 아이들은 그저 과소비에 열중한다.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는 길에 돈을 쓰는 것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길에 돈을 쓰는 것이 옳은 줄로 알기에 돈이 없어도 무조건 ‘지르고 본다.’
신자유주의의 기름질에 우리는 더욱 더 불타오른다. 미친듯이 써제낀다. 그저 ‘뽀대가 작살나면’ 그만이다. 그저 ‘간지가 좔좔 흐르면’ 장땡이다. 그저 ‘조낸 뽐뿌질 당하면’ 사는거다. 아는게 많아지고, 소수의 인원만이 공유하던 명품들이 민간, 서민시장에 그 정보가 유출되기 시작했다. 명품의 이미지의 허울을 뒤집어 쓰고싶은, 소위 말하는 ‘사서 얻는 개성’을 원하는 아바타 시대의 젊은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산다.
명품을 사고, 외제차를 사고, 미니홈피 스킨, 폰트, 게임, 효과, 음악을 사고, 하이엔드급 IT기기를 사고, 비싼 DMB 휴대폰을 산다. 사놓고 잠시 후회하는 듯 하나, ‘이건 나를 위해, 나의 개성을 위해 산거야.’ 라며 애써 자위한다. 그래놓고 카드 빚을 메우기 위해 뼈빠지게 고생한다. -안 그런 연놈들도 있고.-
그러나 이건 총체적 문제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인위적인 손을 대서 고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닌, 전세계적 문제라는 것이다. 세계화에 발맞춰 나가야하는 대한민국님께서 이런 문제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실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화라면 얼싸좋구나 그저 흘러가는 대로 세계들과 같이 문제에 당면하고픈, 그러고서는 남들 다 벗어난 문제에 느지막이 위기의식을 느껴, 이건 세계화의 물결 때문에 어쩔수 없는 거야 라며 애써 자위하고.
그래서 나의 해결방안도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갈지도 모를일이다. 청소년기의 억압을 풀어주었더니 초반에만 강렬할줄 알았던 ‘개성’표출이 점점 심각해져서 겉잡을수 없는 커다란 불길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고 말이다. 인간 일은 아무도 모를 일이니 이거 참.
하루 바삐 흘러가는 세상속에서 한번쯤 늦춰질줄 알았던 세상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무시하고 더 재빠르게 흘러간다.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가며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진위유무를 판단하기도 힘들고, 어떤 결과물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번 유보시키면 그 유보는 가속도 붙은 사회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 이상의 판단을 할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유보들을 양산해낸다.
미리 앞서 보는건 이제 늦은 걸지도 모른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방편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미시적, 거시적인 단어 조차도 폐기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미시적은 바로 한시간 뒤의 일어날 일을 가르켜버릴지도 모르고, 거시적은 바로 다음날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있을만큼의 속도를 가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테니까.
그래도 한번쯤,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빠른 세상의 일부를 떼어다 놓고 스스로 판단해보자.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물론 경계허물기가 진행되고 해체가 판 치는 사회에서 선택지는 두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주관식일지도 모르고.
그래, 차라리 주관식이라고 생각하자. 정답은 없다. 이렇게 보면 내가 정답이고, 저렇게 보면 저 사람이 정답이니까. 어찌되었건 나의 글이 당신의 정답에 조금이라도 일조했으면 한다. 당신이 판단내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나의 글을 조금이라도 참고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답을 내렸으면 하는게 작은 바람이다. 이번 글은 그래서 씌여졌으니까. 이유는 제시했으나, 정답인지는 확답하지 못할듯 하다.
그냥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