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론서 찬가 - 찌질이를 위한 변명 


 제법 오래 전부터-아마 한 작년 말쯤 부터-나는 부대 안의 누군가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인문학 강의를. 시설대에서? 그렇다. 시설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던 목공반 작업병에게 나는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초기에는 철학 일반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하다가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 까뮈를 추천하였고, 그는 까뮈에 거의 기절해버렸다. 다음으로는 니체. 고병권의 입문서와 몇 가지 쓸 데 없는 입문서에 또 다시 그는 마치 '새내기 첫 세미나'처럼 흥분했다. 뭘 좀 알아야겠다는 그는 내게 철학 개론서를 요구했고, 나는 당연스럽게 '철학과 굴뚝 청소부'를 추천했다. 무서운 속도로 철굴을 읽어낸 그는 결국 짜라투스트라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 까뮈나 니체보다는 내가 자신있는 정치경제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는 '판돈이란 무엇인가' 따위나 이진경의 근작 '판돈을 넘어선 판돈'따위를 읽고 있다. 최근에는 정치경제학에 아주 푹 빠진듯 하다. 아쉬운 일이다. 과외 초기에만 해도 나는 그가 철학보단 정치경제학을 공부해보기를 바랬는데, 지금의 내 정신 상태로 정치경제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분 무리니까. 철학 쪽이 나을텐데. 이것이 부대적 차원에서의 내 근황이다. 

 그는 요즘 '원전'에 목말라 있다. 정치경제학의 원전들을 읽고 싶네, 니체 전집을 지르고 싶네. 하는 이야기를 한다. 굉장한 학구열이다. 한때 심적으로 고생을 좀 했던 인간인지라, 인문학의 제 문제들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일 줄 아는 친구다. 개인적으로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감수성'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있어서는, 게다가 몇 달째 공부다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에게 개론서를 좀 더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왜냐면. 

 나도 그렇게 공부했으니까. 

 개론서의 짜집기로 만들어진 찌질이. 그것이 내 학적 정체성이다. 예전에 누군가가 '뻔한 소리 듣고 싶지 않다.'는 칼럼을 썼을 때 나는 아무런 답글도 달지 못했다. 그것은 나를 향한 글이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몇 권의 개론서. 감수성. 뻔한 이야기들. 나를 이루는 것은 그것이 전부다. 원전? 문학 부류의 원전이야 몇 권 읽었다만-소위 '고전'들은, 어린이용으로 편역된 것이 아니라면 모두 원전이 아닌가-철학으로 오면 그저 에세이, 실존주의 쪽 두어 권, 사회과학으로 오면 팜플렛 한두 개. 내가 읽은 원전이란 그것이 전부다. 언젠가 서울대에서 '서울대생이 읽어야 할 필독서 100권'인가를 선정했을 때 나는 충격받았다. 쌍칼. 대체 이걸 어떻게 다 읽는담. 못 읽어. 자격지심에 빠졌다. 그러나 얼마 전에 그러한 자격지심으로부터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논거를 찾았다. 이전부터 올리고 싶었지만, 최근 한 달 간의 여파로 다른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틈이 나지를 않았는데, 오늘에야 이렇게 쓰게 된다. 어제 두 시간 조깅의 결과로 정리된 생각을.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화답이다. 그 글에 대한. 

 자. 니체로 예를 들어봅시다. 당신, 니체를 알고 싶은가? 알고 싶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인문학에 대해 초보적인 관심만 가진-지식, 이라고 썼다가 고친다. 초보적 지식이란 그 범위가 쉽게 규정될 수 없으니까-그런 사람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일단 대표작이라는 '짜라투스트라'를 읽는다거나, 초기작인 비극의 탄생, 같은 것을 읽으면 되나? 그래.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대충 니체가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자신의 철학을 구성해냈는지에 대해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잘 알 수는 없을테지만.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니체의 원전만 가지고 니체가 철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철학자인지를 알기는 상당히 힘들다. 물론 철학사 전반에 걸쳐 있는 무수한 원전들을 탐독한 끝에서라면, 니체가 어디쯤 어떻게 존재하는 인간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테지만, 그런 것이 군대 안에서 가능하기는 힘들다. 하다못해 강유원이 제시한 철학 공부의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인 '서양철학사 50번 읽기'도 울타리 안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니체를 알고 싶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모든 철학은 형이상학이다. 라고 누군가 그랬다. 칸트 아니면 헤겔 아니면 내 친구 아니면 나다. 형태의 배후에 존재하는 관계성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니체라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기존 서구 철학을 극복했는지, 혹은 연결했는지, 그리고 이후에 어떤 식으로 해석되는지, 그는 어떻게 살아갔는지, 이러한 '감각 뒤에 존재하는 관계성'을 파악하지 않고서,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이해를 하지 않고서 어떤 것을 알 수는 없다. 정말 천재적이라서, 하나를 보고 열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원전을 읽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소모적인 일이기도 한 것이다. 자. 당신이 철학에 관심만 있다고 치자. 그리고 몇 가지 정도 주워들은 말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경제적 문제에 대해 분노가 폭발한다고 치자. 그래서 그쪽 분야로 이름난 몇 몇 경제학적 저서를 펼치면 당신은 그저 보다 분노할 수 있을 뿐이지, 무엇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전은, 어려우니까 원전이다. 원전 하나 읽는다고 당신이 무엇에 대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관계적이고 맥락적이라는 사회학도의 슬로건을 굳이 내밀지 않아도,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훌륭한 개론서를 읽는 일은, 특정한 철학체계에 대한 관계적 이해를 넓혀주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에 대한 진지한 접근-거창할 필요는 없고, 그저 '흥밋거리'나 '취밋거리'보다 조금 진지한 정도의 접근-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개론서를 추천하련다. 나도 아직 그 레벨을 못 벗어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무수한 '원전들'을 하나 하나 직접 읽어가면서 자기 스스로 '관계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그동안 읽은 것들을 재평가하고 재파악하는 일이겠지만, 군생활을 전후로 한 사람에게 그것은 쉽지 않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행정적으로 나의 전공인 교육학의 영역에서 이야기해보자. 그나마 발표라는 걸 해 본 기억이 있는 '루소'에 대해서. 자. 루소를 알고 싶다. 아니, 발표해야 한다. 에밀 정도는 읽어줘야 한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루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로크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로크와 루소의 기반에 깔려 있는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프랑스 혁명에 암시를 준 루소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고찰도 필연적이다. 게다가 루소 특유의 도취적이고 중언부언하는 표현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그가 중증의 알콜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또한 그의 낭만파적 기질에 대한 몇 가지 소소한 에피소드도 그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요소가 된다. 그것과 별개로 인간-아동에 대한 그의 낭만적 파악에 대해서는 발달심리학 이론을 뒤져보는 것도 중요하다. 와. 책마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전공에 대해 전공자인 척 해 본다. 아무튼 그러한 것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개다. 하나. 그와 관련된 세상의 모든 원전을 읽는 것. 둘. 그의 몇 몇 주요 저서들과, 그를 둘러싼 여러 책을 읽는 것. 대학 초년생 시절 사회계약론을 읽다가 집어던진 추억을 가진 어떤 교육학과 학생은 결국 에밀에서 끝을 보기로 결심하였다나 뭐라나. 어떤 철학에 대해서, 그것이 처한 관계성을 파악하는 것은, 그것이 독자적으로/본질적으로 가지는 내적 정합성이나 감수성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물론 원전들의 탐독을 통해서 그러한 것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원전을 한 번 읽는 일은 굉장한 심적/체력적/시간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니까. 

 내가 직접 겪은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보자(조금 재미없을 지도 모른다. 개별적 예시는 항상 그렇다). 일전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특별히 와닿는 것도, 특별히 기억되는 것도 없었지만 한 가지 지점에서 굉장히 놀랐다. 무의식이 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언어적 표현-매우 넓은 의미에서 '비유법'-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압축과 치환, 그리고 수 많은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은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며 표현한다. 대충 읽은지라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지만. 그래. 오오. 그리고 아마 그런 메모를 남긴 기억이 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 만큼이나, 문학적 표현/수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이 것을 읽으면 좋겠다'라고(짧게 표현하기 참 힘든데, 꿈은 플롯에 내에 존재하는 몇 가지 요소들-그러니까 사람이나 사물, 사건 등-을 생략하는 것 이상으로, '플롯 안의 한 도막' 전체를 생략해버리는 식으로 무의식을 표현하기도 한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내가 문학에 일천해서인지 몰라도 그리 자주 보지 못한 것 같다. 큰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핵심은 언어와 무의식의 유사성이다.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게 왠걸. 잠시 생각해보니까 라깡(소쉬르일지도 모른다. 잠을 유도하는 약이 아직 덜 깨서, 지금 머리가 좀 어지럽다)의 전제는 언어와 무의식은 유사하게 구조화되어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했고, 그러한 전제의 영감을 프로이트로부터 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느 개론서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마 그 개론서로부터 어떤 암시를 받지 못했더라면, 그저 인문학 딜레탕트에 불과한 내가 프로이트의 원전을 읽으므로써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성에 대해 그리 쉽게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뭐. 내가 라깡(혹은 소쉬르)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나는 개론서를 예찬하고자 한다. 조지 오웰이 카탈루냐를 예찬했던 것처럼. 나와 같은 찌질이들을 변명하고 싶다.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위해 변명해 준 것처럼. 얼마 안 된, 읽어본 원전이라 감히 제목을 패러디하련다. 

 물론 개론서 역시 충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개론서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글들, 내지는 생각들은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만큼 그것은 정말 객관적으로 맞는 말들이다. 특정한 대 사상가 이후로 이루어진 일련의 계보가 존재하는 몇 몇 사상의 경우-맑스나 프로이트가 대표적이다-이후의 계보의 파악함에 있어 개론서를 정리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관계성'-개론서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을 마음대로 그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니까. 또한 개론서로는 결코 원전이 가진 정서에 닿을 수 없다. 그것은 확실하다. 루소에 대해 다룬 어떤 책이 루소를 보다 쉽게 파악해 줄 지는 몰라도, 루소의 명저 '에밀'이 담고 있는 특유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개론서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들에 나는 분명히 동의한다. 그러나 개론서도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다, 는 그야말로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이다. 분명히 다들 개론서를 읽기는 할 것이다. 처음부터 '자본'을 독파하며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런데 왜, 다들 원전에 목말라 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서울대생이 읽어야 할 필독서 100권'의 권위에 눌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만일 내가 그러한 원전을 읽는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개괄적 파악이 충분히 끝난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 요즘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만 해도 그렇다. 분명 청소년 필독서이고, 그 덕에 교보문고에서 이 책을 샀을 때 그녀로부터 온갖 야유를 받았지만-뭐야. 쪽팔리게. 대학생이 고교생 필독서나 사고-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물론 오페라의 유령 같은 건 좀 미리 읽었으면 싶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결말을 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할 수 없다. 예전처럼 질러대기를 할 여력을 나는 잃었으니.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개론서 읽는 자신을 자책하지 말지어다. 라는 것이다. 공학수학 안 풀려서 정석 다시 공부하는 게 쪽팔리는 일이 아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