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 법가와 유가사이, 순자

'나'에게 책마을 그리고
  현실의 대지에 굳건히 다리를 내딛고 서 있어야 세계를 보다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글귀는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라는 것이었지요. 학습은 의도적으로 좌경의 논리를 담아야 하며, 그것의 반영인 실천은 세계의 논리와 부합할 수 있어야 현실에 눈감는 오류를 막을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는 1할도 이해못했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적어도 3할 정도는 알 수 있을것 같아요.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자기계발서에 기웃거리고, 경영 경제 서적을 홀짝거리고, 영어 단어를 끄적이던 저에게 책마을은 그저 생경한 곳이었습니다. 저마다의 논리로 무장한 채 현실을 넘어선 고담준론들이 가득한 이 곳은 유아에게는 낯선 학교의 내음새였고, 어린아이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한 예술품이 자리한 박물관이었습니다. 당시 이해못할 거대담론을 쏟아내시던 선배님들을 보며, 경외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저토록 진중한 토론이 정작 한 개인의 삶에는 어떤 순기능으로 작용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웠습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만, 제가 적어보고자 하는 이야기 또한 그러합니다. 스스로를 우편으로 규정했기에 좌경의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에 더 거침없을 수 있고, 뿌리 깊은 현실의 논리를 가졌기에 공리공론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선배님들처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고민을 할 능력은 가지지 못했고, 다만 '나'라는 개인의 앞날에 도움이 되는 임시 방편만을 습득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현대사는 다시 쓰는 개인사이며, 개인사를 돌아보면 '개인'의 앞날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내 공동체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 고취라는 거창한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고전을 통해 당대 사회에서 개인의 당면 과제는 무엇이고 구체적인 실천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정도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원전을 읽을 능력은 아직 요원하기에 신영복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학습해보고자 했습니다.


순자, 하늘은 그저 하늘일뿐
  일반적으로 '유학'이라 함에 있어서 공자와 맹자를 필두로 한 수많은 제자백가들의 이론이 난무합니다. 이런 가운데 굳이 '순자'를 독서 후기의 주제로 택한 이유는 순전히 그의 사상이 가장 저릿한 자극으로 다가왔으며, 절실히 와 닿았기 때문이지요. 당대 사회에 대한 순자의 문제의식을 먼저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는 유가의 이단이었습니다. 학문적 권위나 유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남아있는 자료가 매우 소략합니다. 일반적으로 유학은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의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천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의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사회 질서와 제도는 '법치'를 의미하며, 도덕적 측면은 개개인의 '성인화'에 다름 아닙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의 도덕 완성이 곧 사회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순리 입니다. 그러기에 본인이 학문의 길에 정진하는 것이며, 수많은 제자를 키워 그들을 감화시키고 나아가 대중을 갱생의 길로 이끈다는 거시적인 목표를 갖게 된 것이지요. 정통적인 도덕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사람들은 그 하늘의 뜻을 따라야 덕을 행할 수 있다라는 '도덕천'의 기치를 높이 세우게 됩니다. 반면 순자는 당시로서는 과격한 이론을 들고 일어납니다. "하늘은 그저 하늘일뿐" 땅에 있는 인간사와는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은 다음에잘 나타납니다.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위 글에서 드러나다시피 순자의 하늘은 그저 하늘입니다. 자연에 도리가 있다고 하여, 하늘과 땅에 질서와 법칙이 있다고 하여 사람의 본성이 그곳에 있기에 그것을 자연스레 따라야 한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자의 도리를 운운하며(이 또한 유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를 중요시 합니다. 


인간의 능동적 참여, 인본주의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이나 사회의 척박함은 하늘(때로는 이 하늘을 천자라고 해석하여 민중과 괴리된 통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합니다)이 해결해주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철저히 인간의 의지로만 극복할 수 있다고 하지요. 이러한 관점은 춘추'전국'시대 당시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 그리고 천문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개인 사상의 발전이 사회 사상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반증이 될 수 있지요. 바로 이러한 점에서 노자, 장자의 입장과는 근본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적극의지와 능동적 참여를 전제한 고민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노자나, 삶 전체를 소요하며 일생을 보내자는 장자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오히려 은둔적 성질의 인격 수양을 넘어선 사회성의 발현으로 '예'의 실천을 강조하기에 이르릅니다. 순자가 말합니다.

"하늘이 위대하다고 사모하는 것과, 물자를 비축하여 그것을 잘 마름질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하늘에 순종하여 그것을 칭송하는 것과 천명을 마름질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 저는 당연히 후자입니다.

  주변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이야기 하면서 현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나는 자유지상주의자'라고 이야기 하면서 좌경화 되어가는(사실 여부의 판단은 개인에게 달렸지만) 한국 사회를 평가하기에 여념이 없지요. 어느 집단에도, 어느 사회 공동체에도 속하지 아니한다면(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두를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자신은 공격받을 위치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지요. 난립하는 '자유기고가'들이 그러한 부류들이며, 사회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가로맡을 걱정을 하지 않는(혹은 할 필요가 없는) 수많은 한량들이 그러합니다. 천리를 막연히 이해하기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정제된 언어와 맛깔스러운 언어로 포장하여 혹세무민 하는 것은, 현장의 땀어린 노력어린 몸짓보다 우월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의 언행은 공자왈맹자왈이라는 단어로 폄하되며 공리공론이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적어도 순자는 자신의 학파(직하학파)를 분명히 하였으며, 제자를 모으며 학론을 설파하며 유가에서 나온 갈래라고 스스럼없이 인정하였습니다. 다만 공자, 맹자에서 나아가 '예'의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으며 이 점은 한비자 등의 법가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성악설의 올바른 이해, 교육론
  순자가 하늘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성악설'의 위치가 바로 이곳이지요. 하늘의 뜻을 전제하고 선을 강조하는 맹자의 체계에서는 본성으로 돌아가고 그 가능성을 확충함으로써 충분히 예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함을 하늘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는 순자로서는(하늘은 하늘일뿐) 당연히 인간의 적극적 참여가 요구되며, 교육이라는 외적 기능이 요구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 또한 학창시절 윤리시간에 사상 부분을 배우면서 "성선설=맹자,루소 성악설=순자,홉스 성무선악설(백지설)=고자,로크" 이렇게 도식적으로 단순 암기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아주세요)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봤다는데에 무리없이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악설을 이렇게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하늘의 뜻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없지요. 결론적으로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사회학적 개념입니다. 순자의 교육론과 예론, 제도론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 중략...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위의 글에서 순자는 사람은 사법의 도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순자의 성악설을 신자유주의적 담론 환경 하에서 빈번하게 거론하며 무리하게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를 가정하고, 시장 원리를 뒷받침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는 성악설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담론은 이기심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개인의 역할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인간 본성을 이기적인 것으로 단정해버리고 1980년대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환경에 편승하여 재빠르게 신자유주의를 합리화해버리는 논리를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논리는 전국사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것의 일환 입니다.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만 한다는 논리입니다. 전제되는 이기심만에 근거하여 그가 힘주어 주장한 '예'와 '교육'의 의미를 간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악설은 그의 교육론을 위한 수단이었을뿐 그 자체로 완결된 구조를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의 교육
  '나'는 비교적 순탄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큰 무리 없이 집 근처의 초,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또한 집 가까운데에 배정되었습니다. 단지 남녀공학이라는 이유로, 예쁜 누나들과 예쁜 동급생들이 있다는 이유로 특목고로의 진학을 꿈꿔보기도 했습니다만 그래서 입학 시험도 치뤄보았지만 먼 일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모범생인척 노력하던 학생들의 대다수가 그러하듯, 테두리 안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였습니다. 학생회 활동을 했고, (집단)축구를 좋아했고, 교우 관계는 원만하였으며, 교실의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척도 했습니다. 교직원을 그 조합원으로 하는, 양측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는 두 단체 소속의 교사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였고 스스로를 진보적인 지성인이 되어간다고 '착각'했었습니다. 즐겨찾기에 추가되어 있는 '오나의뉴스'를 즐겨 보면서 비판적인 담론 형성에 박수를 보냈고, '한민족'신문을 함께 보며 해방 후 이 사회는 중도라는 축이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었구나. 라는 생각도 자라났었지요. 마침 새내기 였던 2004년은 잊을 수 없는 한 해 였습니다. 역사 상 최초의 사태 때문에 광화문 네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고 그 정점에 서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적 술자리에서 가까운 누군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보수층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상'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냈고, '정상'적인 노력으로 노동자가 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모 도당의 전 대변인이 이런 유명한 말씀을 했었지요. 
  "대학 나온 사람이 밀림의 왕이 되어야한다."
  그(녀)의 평소 호전적인 언행으로 미루어 보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은 사실이지만, 곰곰히 생각을 하다보니 크게 '나'가 가진 생각과 다르지 않기에 더 놀랐습니다. (스스로를 좌경적 인간이라고 기만했기에) 자신이 가진 보수적 경향에 놀라기도 했고, 그(녀)의 생각에 반박할 논리를 찾기에는 가진 경험과 지식이 일천했으며 굳이 반박할 필요를 못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나라 교육 체계의 근간을 뒤흔들 이유도, 그 이후의 사회도 상상하기 어려운 걸 보면 가진 생각이 고루하고 편협한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순자의 성악설에 그리고 그의 '예'과 '법'을 위시한 교육론에 반기를 들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인 동의를 하는걸 보면 그가 유가적 굴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사회의 교육론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보수적이라는 얄팍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앞으로의 나날들에서 계속 잘박거리고 덜그럭 거리게 되더라도 앞서 언급했던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얻으려 노력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