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感氣
감기 感氣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즈음이면 나는 항상 감기를 앓는다. 세상 모든 것들이 천천히 데워질 때 나만 혼자 후끈해져서는 몸 속 고인 열기에 늦봄의 산들바람에도 소스라칠 듯 재채기를 하는 것이다. 더운 물에서 찬물로 샤워물을 옮겨갈 때까지, 내 몸은 항상 바깥 기온에 맞추지 못하고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채로 시정없이 지내고는 한다.
환절기의 시작은 언제나 코부터다. 화생방 때 호흡을 조섭하지 못하고 한 번 재채기를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콜록대듯, 한번 오한에 재채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턴 사정없다. 그 땐 이미 기온에 따른 체온조절감각이 망가진 뒤다. 그 때 가서 녹차니 뜨거운 음료를 마셔대봤자 소용이 없다. 주책없는 열기는 콧속에 올라 콧물을 곪게 만들고 코 안의 점막을 부풀려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스치는 바람 한 줄도 뜨거워진 콧줄기에 걸려 재채기를 불러오고 그 재채기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내내 반복된다. 그 열기(火)가 눈으로 올라가면 결막염(炎)이고, 곪은 것이 기도로 넘어가면 기관지염이다. 그쯤 되면 집중력 있는 독서는 이미 달나라 얘기고, 파업해버린 몸뚱이더러 파산신고서라도 날리고 싶은 기분이 된다. 1분에 한 장씩 공급되는 휴지 없이는 사회성 유지가 힘들고, 그리 코를 풀면 그 열기가 그대로 눈에 가 눈을 가렵게 하며, 벌건 눈을 내키는 대로 문지르다보면 눈을 뜬 시간보다 감은 시간이 많기에 졸리고, 그렇게 낮에 존 만큼 밤에 잠을 못자며, 다음날 잠못잔 피곤함까지 겹쳐 증세는 더욱 악화된다.
그렇게 한 일주일을 앓다보면 이게 사는 게 아니다. 차라리 이놈의 코를 그냥 통째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약을 먹어도 그 때뿐이고, 코 막혀 몽롱한 거나 약 먹어 몽롱한 거나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병의 뿌리가 되는 열기가 몸속에 여전히 더글더글하니 아무리 약을 써 증세를 누그러뜨려봤자 장마철 관목에 가지치기다. 그래서 참다못해 강구하는 특단의 대책이 바로 소금물이다. 걸게 탄 소금물을 코로 넣어 입으로 뱉어내는 것이다. 염(炎)에는 염(鹽)이 최고다. 그리고 효능이 확실한 만큼 그 염(鹽)은 지독히 쓰라리다. 목욕할 때 맹물이 코로 들어가도 하루종일 얼얼한데 소금물임에야. 정말 코가 통째 뽑혀나갈 것 같다. 그래도 일주일동안 앓은 것이 지긋지긋하니까 한다. 비올 때 뛰어가거나 걸어가거나 맞는 비는 똑같지만, 이왕 맞을 비 빨리 다 맞아버리려고 뛰어가듯이, 일주일 더 뭉갤 괴로움을 1분 안에 다 겪어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독하다. 독하니까 처음 감기 걸렸을 때는 안하다가 한 일주일 앓고 난 뒤에야 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7일×1보다 1/(60×24)일×10080(?)이 더 낫겠단 계산인 것이다. 그렇게 성이 날 대로 난 콧속의 점막을 차례로 갈아엎고 마지막 10,800개의 소금결정이 여린입천장 뒤로 똑 떨어질 때의 기분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고통이란 건 도무지 디스카운트라는 게 없다.
또 그게 끝이냐면 그게 아니다. 한번 어그러진 기운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다. 소화기로 큰 불을 끈 다음에도 잔불 처리는 중요하다. 코에 집중되어있는 열기를 정리해줘야 되는데, 그래서 하는 것이 팔굽혀펴기다. 다른 건 도저히 귀찮아서 못하겠고 하나 한다는 게 그거니까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해두는 게 좋다. 혹자는 내 운동습관을 들어 우람한 갑빠(?)가 그리도 좋으냐 이죽거리지만, 난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해 운동을 했을 분이다. 대학교 2학년 봄, 몸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해 결막염, 비염, 기관지염에 한 달을 시달리며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싸쓰”가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던 그 때,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에 궁리하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이다. 어쨌든 근육운동이란 게 원래 그렇지만 하다보면 내가 지금 뭔 지˙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을 때가 많다. 팔은 후들거리지 땀은 나지 숨은 헉헉대지. 그래도 한다. 눈코입으로 지루하게 앓던 걸 몸 전체로 부들거리며 대신 앓아두는 것이다. 그렇게 앓아두고 나면 어느새 호흡이 골라지고 숨결에 어느 정도 온기가 배면서 막혔던 코도 뚫리게 된다. 피가 돌아 온몸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그 상태라면 찬물에 샤워를 해도 거뜬하다. 그렇게 사흘만 하면 엔간한 감기는 씻은 듯 낫는다. 줄었던 기운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때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애초 감기에 걸렸던 것도 날씨 풀어진다고 노골거리는 기온에 몸까지 같이 노골거려 미리 앓아두는 일을 게을리했던 탓이란 걸 알게 된다. 파업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한겨울보담은 연중 날풀리고 꽃가루 날릴 때인 삼사월에 감기가 제일 잦다.
그래도 매년 봄마다 꼬박꼬박 감기를 앓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구나 싶지만, 그래도 내 몸은 그 때를 꼬박꼬박 기억해 해마다 앓는 날수가 줄어들고 감기 들었을 때의 대처방법도 날로 공교해진다. 크게 앓는 것보다 사람들 눈치 못 채게 조근조근히 앓는 법을 몸이 익혀간다. 크게 앓으면 힘들다는 걸 나는 까먹어도 내 몸은 안 까먹으니까. 그렇게 안 아프고 건강한 몸이 그냥 만들어지지 않듯, 전에는 밍숭맹숭 그날이 그날 같던 사람들의 일상이 사실은 아무도 몰래 제 몫아치의 고통을 앓아내고 있던 모습은 아니었을까 -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언제 덮칠지 모를 감기를 위해 스스로 조금조금씩 앓아 얼마간의 온기를 보해 두듯, 보일러 튼 아랫목의 따스함도 그렇게 보이지 않게 앓아온,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누군가의 이름이 있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나에게도, 소금물질 하기 싫어 몽롱한 알약만 먹고, 운동은 하나 않고 우아하게 몸 덥힐 보약만 처먹다가 암이나 중풍에 걸려 자빠질 날이 언젠가는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대충 살게 되기 전까진 적어도, 나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조금씩 앓아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티나게 앓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감기 나아간 끝물에 서고 보니 그렇다. 앓는 건 그렇게 앓는 게 아닐까.
- 20060509, cryingkid
병장 노지훈 (2006/05/10 04:13:15)
군대와서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것은 매일 조금씩 앓아서 일까...?
병장 한상원 (2006/05/10 04:22:04)
저는 조금씩 앓아버리니 그것조차 일상처럼 아무런 깨달음이 없어서, 확 앓아요. 마음으로, 몸으로.
대현씨 글처럼 생각해보니, 과연 감기는 기운을 느끼는 계기가 되는군요.
병장 김동환 (2006/05/10 08:37:04)
코로 소금물을. 상당한 스킬이 필요하겠는데요.
감기나 호흡기 질환에는 양파가 좋대요.
상병 조주현 (2006/05/10 09:03:34)
저도 감기기운이 오면 운동에 찬물샤워에 더욱 열을 올리지만..
소금물을 코로...라니, 항복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5/10 09:31:21)
요즘들어 김대현님글투가 많이 바뀌는걸 느끼네요. 무슨 깨달음을 얻으셨나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일병 김지민 (2006/05/11 08:50:36)
감기엔 지지
병장 박진우 (2006/05/12 08:58:40)
나는 사람을 앓아요.
오래된 열병마냥 은근하게. 그리고 꾸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