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인간론
병장 박수영 06-18 11:03 | HIT : 187
코드인간론
아무튼 이 정도로 훌륭한 실험장도 없을 것이다. 한국 전역에서 선발된 완벽히 무작위적인 40인의 인간들이 한 집단에 모여있는 것이다. 부여되는 식사는 같고, 잠자리도 같으며 영위하게 되는 생활레벨도 거의 완전히 동일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흥미로운 것이다. 이 생활관이라는 공간은. 이 자그마한 실험장을 통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코드인간론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
1. 집단의 분화 (306 → 훈련소)
집단의 분화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실험장 중에서도 '자대 집단'이 아닌 '306 보충대 집단'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자대 집단'의 경우 구성원의 보충이 입대 날짜에 따라 순번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새로운 사람이 자대 집단으로 옮겨가도 그곳에는 이미 그 집단에 적응한 39명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경우 그 집단의 분화는 이미 진행되어 있고, 새로 도착한 '나'가 끼어드는 방식이겠지.
그와 달리 '306 보충대 집단'의 경우 아무런 분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완벽한 초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기분에 따라서는 춘천 보충대던, 논산 훈련소던 아무런 상관은 없겠다. 그리고 친구나 기타 지인이 있을 경우, 완벽한 초기 상태라는 것에는 위반되겠지만, 그 정도의 오차는 너그러이 눈감아 주도록 하자.)
다들 경험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부모님 친구들 애인과의 감동적인 빠이빠이 신을 경험하고 나면 남아 있는 것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1천명의 인간 군상들. 그나마도 같은 건 어디까지나 '장정'이라는 사실 뿐이고, 그 이상의 유대는 무엇 하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만이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낯선 사람들과 갑자기 교류를 시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첫 날밤 낡디 낡은 생활관 침상의 퀴퀴한 향이 뿜어져 나오는 매트리스에 몸을 뉘일 때, 40명의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이 되지 못하고 개인인 채 저마다의 생각과 이질감을 느끼며 잠이 든다.
다음 날이 되면 첫날보다는 집단의 분위기가 훨씬 수월해지게 된다.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이 빡빡머리 남정네들보다 자탔?처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벽을 보다 쉽게 허물게 한다. 이때부터 조심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의 시도가 시작된다. 개인마다 방법은 다르지만 보통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서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 대화의 포인트 : 출신 살던 지역은? 다니던 학교는? ]
서로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할 때에 사람은 누구라도 출신을 물어본다. 아직 어색한 두 사람을 보다 긴밀한 유대로 엮을 수 있게 하는 것. 그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이고 범용적인 것이 출신이다.
같은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 지역,학교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과 결부시켜서 대화의 흐름을 보다 원활히 할 수 있을 뿐더러,(아는 사람이 같은 출신이라는 식으로 유대감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혹시라도 같은 출신이라고 하면 두 사람은 보다 큰 유대를 가지게 된다.
[ 단순한 같은 처지의 군입대 2일차 → 같은 지방 출신(유대감 증폭)]
게다가 이런 교환 중에서 대화의 상대가 아니었던 나머지 38명이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가능하다.
"어! 나도 OO 사는데!"
"아 그래요? 혹시 XX 고등학교 아세요?"
"오. 저 그 학교 다녔어요. 혹시 모 아무개 아세요?"
"어?! 알아요!"
이런 과정들을 거쳐 완전히 별개의 개인이었던 집단 내에서는 '출신'이라는 코드를 이용해 몇 개인가의 그룹으로 분화되게 된다. 물론 이 그룹은 그렇게 견고한 그룹은 아니다. 당연하려니와 같은 장소에 살았던 사실로는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동일한 상태에서는 그 정도의 유리함으로도 보다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겠지. 그래서 서로의 어느 정도 기본적인 정보를 파악한 다음의 커뮤니케이션은 이렇게 심화되어 가기 시작한다.
[ 대화의 포인트 : 취미 어떤 거 좋아했어요? 리니지 좋아해요? ]
지연과 학연만으로는 대화의 깊이에 한계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가장 큰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코드인 '취미'를 탐색하게 된다. 취미의 영역의 교집합이 크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서로 마음껏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다. 교집합이 작다면, 아무래도 서로의 대화는 서로 시들시들해지게 되나, 경우에 따라서는 한 명이 일방적인 화자로, 다른 한 명이 일방적인 청자로써의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 306에서의 짧은 시간으로는 보통 이 과정이 채 진행되기도 전에 집단의 파탄을 맞이한다.
금요일 운명의 뺑뺑이를 거쳐서 다들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장정은 훈련병이 된다. 훈련병으로써의 시간은 5주가 주어져있으므로, 이제는 그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게 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이제 같은 소대가 된 훈련병들 사이에서는 집단으로서의 유대감이 보다 강하게 싹 트게 된다. (전우애….라고 봐도 상관은 없겠다.) 이곳 역시 첫 하루 이틀 정도는 낱알 같은 개인의 모임이었다가, 점차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교류를 통해,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획득하게 된다. 기본집단은 역시 바로 옆에 있는 동료들이다. 이때에는 굳이 저 멀리 떨어진 다른 분대원들과 친해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서로가 가지고 있던 취미 보따리를 점차 풀어 젖히기 시작한다. 1주, 2주가 지나면서 나름대로 '훈련병 짬밥'을 먹으면 분대를 옮겨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할 수도 있게 된다. 이때에는 서로가 가지는 '출신'은 부차적인 요인이 되고, 각자가 지닌 코드가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 지가 특정 집단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저마다 옹기종기 모여서, "너는 얼마나 따먹어 봤니?(물론 과일이다)"로 떠드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리니지해서 얼마나 돈 좀 만져 봤니(물론 게임머니다)" 로 떠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경우 개인이 가진 코드의 스펙트럼이 특정분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맞는 이야기가 나오면 얼마든지 다른 집단으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 있다. 이때 자(子)집단은 어느 정도 형체를 띄기 시작하지만, 그렇게 견고하지는 않고 각자의 소속감은 자(子)집단 보다는 보다 큰 카테고리인 모(母)집단에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코드야 어찌되었든 힘든 훈련병 생활을 함께 거치면서 얻게 되는 유대감이 보다 서로에게 보다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특별히 더 친하고, 약간은 덜 친한 관계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서로의 코드의 정합성에 의존한다).
마지막으로 힘든 훈련소 생활을 마친 훈련병들은 자대 던전의 탐사를 위해 기나긴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전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싸이월드 주소를 주고 받는 다거나, 연락처를 교환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의미없는 교환에 그치고 마는데, 그것은 이곳에서 형성한 짧은 5주간의 유대가 자대에서 형성하게 되는 새로운 유대에 밀려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2. 분화된 집단의 아이덴티티 형성 (자대)
자대 던전으로 처음 온 신병은 아무튼 정신이 없다. 코드고 뭐고 없다. 기존의 훈련소에서 자신의 동료들이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동등한 초기 스텟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던것과는 다르다. 자대 던전에는 당장이라도 마왕을 때려잡을 듯한 용자수준의 스탯을 갖춘 플레이어에서 초보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춘 사람들이 몰려있다. 이미 이 자대에서의 생활에 익숙해 져있고 저 마다의 탄탄한 집단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이곳에서 완전한 신입인 신병으로서는 적응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곳에서 신병이 새롭게 형성하는 대인관계는 크게 두 부류다.
1. 수직적인 관계의 선,후임관계
2. 수평적인 관계의 동기관계
이 두 가지는 모두 신병이 여태껏 경험해온 관계와는 다르다. 첫 번째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분대장을 제외한 병 상호간에는 평등하다고 말하나, 이것은 심지어 간부님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계급에 따른 차등적 권리 부여는 아무리 평등하다고 부르짓는 부대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심한 부대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능력의 고하와는 무관한 오로지 짬밥으로서 구분되는 계급사회 하에서 신병은 자신의 위로 압도적일 만큼 많은 상관을 모시게 된다. 1개월 선임, 2개월 선임, 이등병 1도, 일병 막내, 일병 꺾인 사람, 일병 1도, 상병 막내, 상병 꺾인 사람, 상병 1도… 이미 병장은 신의 경지에 머물러 있다. 이 새로운 계급제 하에서의 적응은 상당한 복종심과 아무 이유없는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적응은 누구라고 하더라도 곤란함을 겪게 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수평적인 관계는 특별한 이유없이도 끈끈한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모든 것이 위, 아니면 아래인 조직에서 유일한 자신과 동등한 상대라는 것은 출신, 취미 어떠한 코드에도 관여치 않고 보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준다. 함께 선임한테 갈굼도 받아보고, 나중에는 갈궈보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자신의 계급은 점진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어느정도 계급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낼 수 있는 시기가 오게되면 이제 부터는 다시 코드적인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급적인 관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 보통 전, 후 3~4개월 이내의 비슷한 짬밥 라인에서 다시 코드적인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좋던 싫던 이 사람들과는 적어도 1년 6개월 이상을 함께 밥먹고, 작업하고, 일하고, 자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잘 놀아보세~. 하는 마음이 당연히 생겨나게 된다. 여기서 대인관계는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1. 보다 희미해진 선,후임 관계 (앞,뒤로 3개월까지는 이제 반쯤 동기다)
2. 동기와의 수평적인 관계 →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의 수평적 관계 형성
이 정도에 형성된 자(子)집단의 아이덴티티는 306, 훈련소 때와는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그때의 자(子)집단이 어떤 말캉말캉한 무정형의 집단이었다면, 이곳은 보다 집단으로서의 특징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좋든 싫든 수 백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인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이 찰떡처럼 철떡철떡 맞았던 것은 아니었겠지. 처음에는 어떤 사소한 계기였다.
이를 테면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친구들의 집단이라고 해보자. 그것을 제외하면 처음에는 그다지 코드적으로 썩 잘 부합된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함께 축구를 하면서 서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고, 친하게 되면서 이들 집단은 보다 나아가게 된다. 이제는 '코드' 이외의 프로세스에서도 집단성을 띄는 것이다. 식사를 할 때도 함께 하고, PX를 이용해도 함께 한다. 그러면서 각자가 지닌 '정합적이지 못한 코드'들을 점차 동일화 된 집단에 발맞추어 제거하거나 추가하거나 변용시켜간다. 그러면서 이 집단에 대한 충족감과 소속감은 더욱 커져간다. 그리하여 내무실에는 어느 정도의 다양한 집단이 존재하게 된다. 물론 같은 내무실, 같은 사무실과 같은 초월적인 모(母)집단으로서의 소속감도 존재하나, 이제는 자(子)집단으로서의 카테고라이징 역시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하게 된다.
3. 자(子)집단 간의 교류 그리고 Major vs Minor
이렇게 형성된 자(子)집단이 유일하지 않은 이상에야, 생활관 내에서 서로 간에 교류를 하게 된다. 내기 축구 경기를 한다거나,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잡담을 한다거나, 요즘 내무실에서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의 여배우의 몸매 품평회를 연다던가 하는 것으로 집단의 국지적인 요소에서 조금은 탈피하여 서로 집단간의 공통적인 코드를 찾아 공유한다. 이것은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자(子)집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며 동시에 모(母)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재정비하는 기회가 되어 준다. 하지만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자(子)집단끼리 공유해야 할 코드가 존재해야 비로소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축구를 어느 정도 좋아해야 하고, 드라마 정도는 봐줘야 한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코드적 버라이에이션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할 지라도, 그것에는 분명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이 집단들이 가지고 있는 주력코드가 주류(major)에 가깝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떤 서로간의 교집합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화, 코드는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에 상호 교류하므로, 주류로 통칭되는 코드끼리는 서로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주류라는 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문화적 코드를 향유하기 때문에 주류인 것이다. 따라서 모(母)집단의 내부에서 형성하게 되는 자(子)집단의 대부분은 해당 국가나 사회에 향유하는 문화 중에서도 주류의 코드를 향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구성원은 이 커다란 코드의 영역 안으로 포함이 된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 넓은 그물로도 포섭되지 못하는 비주류(minor)계의 구성원이 분명 존재한다.
40 명의 구성원 중 5명 정도는 비주류계를 형성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끼리는 그다지 어떤 자(子)집단으로서의 결집력을 보이지 못한다는 접이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코드적 취향이 워낙 상이하기 때문에 긴밀히 협력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각기 아웃사이더인 상태로 집단에서 겉돌게 된다.
주류 사회의 입장에서 이들은 단순한 이해불가의 대상으로써 생각 되어진다. 취미 하나, 생각 하나 공유하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주류로 포섭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미 갖추어진 멤버만으로도 즐겁게 생활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주류적인 흐름에 포섭되지 못하는 그들을 어떤 의미로는 '낙오자'라고까지 생각해버리고 만다. 예를들어 '코스프레'라는 비주류적인 코드를 생각해보자. 생활관에서는 이러한 대화가 주고 받아졌다.
주류 A : 너희 코스프레 하는 애들 어떻게 생각하냐?
주류 B : 스프레? 그런 거 병X 같은 애들이나 하는거지. 조X. 구리다니까
쥬류 A : 솔직히 이해가 안되지. 나잇살은 먹어가지고 만화 캐릭터나 따라다니고 쪽팔리지도 않나?
주류 C :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그런거나 하겠냐? 그런 게 아니면 마음에 위안을 못느끼는거야. 불쌍한 애들이라니까?
비주류 D : (븅X들. 니들이 여배우 궁둥이 보면서 침 질질 흘리는 것 보다는 백배 낳아)… (열불이 뻗치지만 자는 척 한다)
A,B,C 의 입장에서는 평소에 대화도 나누지 않던 상대인 D가 코스프레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류의 입장에서 가차없이 비주류 코드를 향해 포문을 연다. 문화간에 가치적인 우열은 없다고들 하지만, 위력적인 우열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주류 D는 여기서 '나 코스프레 했소~'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변변한 항변조차 하기가 힘들다. 이미 생활관의 주류를 이끌고 있는 35명 사이에 '코스프레 = 돌+아이'이라는 담론이 형성되어 버리는 것이다.
D 는 애써 귀를 닫아버리고 그들 주류 집단과는 더욱 벽을 쌓는다. 주류 집단은 힘이 월등하므로 비주류가 담을 쌓던 말던 관심도 없다. 이렇게 해서 소외되는 인원이 탄생한다.
4. 각자 품고 있는 한계점
이렇게 해서 형성된 양자간의 보이지 않는 대립은 점차 모(母)집단을 좀 먹어 들어간다. 주류 자(子)집단 끼리는 결속하여 비주류를 은근슬쩍 밀어내고, 비주류는 마찬가지로 굳이 주류와 어울리며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분열이 생긴다. 이것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타 코드에 대한 일방적 배타성이다. 그렇게 열심히 사회시간에 문화 간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웠어도 말 뿐이다. 서구문화는 동양문화보다 우월하다라는 명제에 다들 분노를 표현하겠지만, 정작 스스로는 교집합을 형성하지 않는 코드를 향해 스스로의 우월성을 주장하려고 안달이 나있다.
주류(major) 코드의 한계는 [대중적 = 우월성] 이라고 쉽게 판단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기존의 고급문화 대 대중문화간의 대립구도에서 고급문화가 힘을 상실해 버림으로써, 대결구도는 '주류 대 비주류'의 구도로 변화에 갔다. 기존에는 '자본적, 예술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되는 문화가 강자였다면, 지금은 '대중적, 인기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되는 문화가 강자이다. 구성원이 많기 때문에 힘이 있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정해놓은 가치 잣대에 부합하지 않은 비주류(minor) 코드들을 무가치 한 것,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몰아 붙인다.
비주류(minor)코드의 한계는 주류 코드를 이해하려는 노력자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사람들 속에서 사는 이상에는, 어느 정도 주류(major)를 이해해야 할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언어'라는 걸 당연히 배워야 하듯이, 문화적으로도 '언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문화적인 '언어'란 가장 대중적인 코드를 의미한다. 아무리 애니메이션 골수 매니아라고 해도, 개그콘서트나 웃찾사 쯤은 봐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주류 코드와의 최소한의 대화 통로 정도는 열어 주어야 한다.
'주류'는 무조건 우리의 적이다. 우리는 우리들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메롱.
이라는 주류에 대한 획일적이고, 반사적인 배타성이 또 다시 스스로를 고립된 공간으로 몰고 간다.
결국은 집단의 문제이다. 사회에는 60억의 사람들이 있고, 아무리 비주류(minor)의 코드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거기에는 또 집단이 있다. 비록 소수라고 할 지라도 비주류의 자(子)집단은 스스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총 인원 40명의 조그만 집단에서 주류는 여전히 주류겠지만, 비주류의 경우에는 대부분 집단을 형성하지 못한 채 개인으로 고립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도 비주류는 사회에서처럼 똑같이 배타적인 태도로 주류를 배척하고, 주류는 비주류를 비난하고 무시한다. 그래서 타격을 입는 것은 이제는 개인이 되어버린 비주류이다. 그는 상처입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이 조직에 개탄하며 하루 빨리 밖으로 나가 다시 비주류의 그룹을 만나길 갈망한다.
그래서야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질 않는다. 정말로 서로가 해야 할 것은, 주류는 비주류 코드에 대하여 관대함을 가지고 인정해주고, 비주류는 주류 코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그러면서 천천히 주류에게도 비주류만의 멋진 점을 조금씩 설득해 나가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
덧붙여서.
인간 사이의 관계를 좌우하는 요인은 많이 변화했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담론도 힘을 잃었고, 코드가 남았다. 각자 취미가 맞고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쉽게 만나 집단을 형성하고, 거기에서 재미와 충족감을 찾는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코드도 뭣도 아닌 사람이다. 비주류던 주류던 상관없이 결국 마음에 맞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획득한다.
아… 이 사람은 나와 말이 통하는 구나… 하고
분명 그런 관계에 코드적 정합성은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해준다. 하지만 조금은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가 그 코드를 향유한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 마저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째서 서로간의 코드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상대편을 적대시할 이유가 되는 것일까? 서로간의 관계가 적이 아니면 아군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다들 아니라고 부인하겠지만 막상 분화가 완성된 조직 안에서 보이는 인간관계란 결국 적과 아군의 관계로 상당히 뚜렷하게 나누어져 버리고 만다.
너는 싫은사람. 너는 괜찮은 사람.
각자의 개성이 개인만의 색과 스펙트럼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그것을 우리는 각기 다른 시선으로 개인을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그런 관계. 이러한 관계가 우습게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서로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와 거리감을 가진 상태에서 오히려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가끔씩 슬퍼지곤 한다.
## 이글을 작성하기 위해 어떠한 서적도 참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의 전개나 이론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사과드립니다. 사실 어떠한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기에 안타깝네요. 조금 더 깊이 있는 글을 적고 싶었지만...
* 병장 김청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18 17:43)
상병 이성헌
진심으로 동감하는 인간관계론...가지로. 06-18
상병 박준연
수영씨 글은 간지가 흐르다 못해 넘치고 있어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잘 읽었어요~
단, 저는 코드보단 이데올로기나 사상으로 (...)
가지로 1인분 추가.. 06-18
병장 박효승
잘 읽었어요. 가지로. 06-18
병장 이주형
이미 가지로 3명 채웠네..
개인적인 질문. L을 꿈꾸던 아이 이야기는 언제 후속편이 나오나요? 06-18
병장 배진호
흐흣 그나저나 흥미로운 글이네요! 06-18
병장 허익준
... "오타쿠가 덕후로서 놀림을 받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풀어놨군요. 이 글, 가지로 추천입니다.
... 덤으로 제 블로그로 좀 퍼가도 될련지요? 06-18
병장 김청하
아니 이 분들. 가지로는 <꺽쇠> 붙여서 해야 인정된단 말입니다.
안그러면 찌글한 촌장이 못 보고 지나치는 수가 있단 말입니다, 네. 06-18
병장 박수영
성헌/ 감사합니다~
준연/ 간지라뇨...흐흐 사실. 제가 이데올로기나 사상에 약해서리.
효승/ 감사합니다.
주형/ 윽. 기억 한 구석에 쳐박혀 있던 L을 꺼내시는군요. 긁적. 언젠가 쓰기는 해야할 텐데 말이죠. 너무 재수 없어보이는 것 같아서 안쓰고 있었다는.
익준/ 예. 물론입니다. 저자 정도만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어용
청하/ 허허. 님아 이러시면 곤란... 06-18
병장 진규언
어제 취침하러 내려가기 직전 하도 졸려서 못 읽었지만, 내심 '내일이면 책가지에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하청했지요. 역시나, 잘 읽었습니다. 06-19
병장 임창욱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