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을 뒤돌아보며
가정의 달을 뒤돌아보며
올해도 5월을 소금쟁이 겉C기 하듯 무사히 보냈다. 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받아놓은 날에 전 국민이 일제히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님께 존경을 표하며 귀여운 자녀들 손을 잡고 놀이동산에서 수만명이나 되는 이웃동지들과 줄서기 게임을 하는(또 뭐가 있지?)그런 5월, 하여 국가는 본질을 흐려놓기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최면장치로 은밀하게 억압적 헤게모니를 만든다는 진부한 철학과 진부한 5월, 진저리나는 생활들,
시대와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왔다고 하면 괜히 멋이라도 있을텐데 나는 20년동안의 생을 단 한순간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견뎌왔고, 쓸데없는 5월만 뒤편에서 쫑알대는 강아지 마냥 피해왔다.
정말 나는 단 한번도 지금까지 부모님께 카네이션은커녕 그 흔한 선물하나 챙겨주지도 못했고 받지도 못했으며(쪼잔함의 극치) 뿐만 아니라 생신날에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다(이제는 말 할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문구점에서 사온 이쁜 색종이로 미술시간에 카네이션을 고이 만들어 닭살 돋는 편지와 함께 책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지만 이내 내 손으로 구겨 버린, 그래서 핑크빛 잔치분위기 대신 피같이 붉은 립스틱 자국의 동남아 여공들의 입술과 문드러신 손가락만 실컷 구경했던 나의 유년시절은 악다구니와 수세미같은 감정속에서 흰 도화지에 증오의 크레파스만을 휘날리고 있었다.
대개 가족에 대한 유명인들의 회고는 2가지의 레파토리를 지니고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과 술과 폭력으로 물든 아버지, 그리고 인내의 모성으로 아들과 딸들을 지키는 어머니가 계신, 그리고 어린 남동생을 위해 학업과 연애를 중단하고 공단에서 뒷바라지를 한다는 전형적인 노동계급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부유한 가정환경과 잘나가는 부모님들, 매일 화려한 파티를 열며 루이비통이 똥이 되길 두려워해 매번 차림새를 바꾸는 가정에서 부루주아 특유의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손목에 금을 긋는다는 그런 가정이 있는데 물론 이러한 구획짓기도 나의 자의적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사회가 합의한 여러 조건과 표약의 순열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믿는 차가운 나의 믿음대로라면 나의 삶은 이 양극단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사이의 어느 곳, 중도적 입장에 있을 것이다.(이런 비겁함) 나의 삶의 과정이 험난하다해서 우리의 불량소녀 김현진처럼 매 순간이 비명횡사하는 일상의 시간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다지 잘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고, 바다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부산에서 살았지만 끊어지지 않는 폭력과 남성성의 강요를 요구받는 곳에서 살았던 때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오히려 무기력했다. 거의 나의 무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과거의 재구성이긴 하지만 나는 우리 가족은 나를 내팽겨쳤었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 가족은 나에게 꿈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왜 미리 포기라는 법을 가르쳐줬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한스럽고 억울하며 눈물이 난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나는 차라리 온 친척들이 抵볜눗 자기 자랑이라도 하면서 왁자지껄 떠들기를 바랬다.
그러던 내가, 누군가 어버이날에 뭐해드릴 거냐고 물으면 '내가 마약을 했냐, 살인을 저질렀냐, 이렇게 살아준 것만도 고마운 거지' 라고 쏘아붙이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정식으로 달아드렸다. 그렇다고 우리 가정이 썩 화목해졌냐고 물으신다면 천만의 말씀, 결국 이건 나를 위한 일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였다. 삶도, 사랑도 결국은 타이밍이라는 왕가위의 말처럼 나는 편지는 목적지에 반드시 돌아온다는 라캉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때론 속살까지 휘집고 멀어지는 연인보다 더 모진 상처를 주는 것이 가족이지만 공통의 역사와 기억을 지녔기에 그만큼 나를 더 잘 이해해주는 사람도 바로 가족이다. 핏줄만 같으면 가족인가? 같은 피부색만이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정말 나 스스로가 혼자서 자수성가한 것처럼 믿었었지만 실은 같은 기억과 상처를 가족 모두가 함께 공유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오빠 지젝의 말을 인용함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지젝은 실재계는 계급투쟁으로 이루어졌으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눈에 띄는 투쟁이 없음은 어느 한 쪽이 은밀하게 착취당하고 투쟁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논법으로 우리가 가정의 달을 만들고 어떤 기념일을 만든다는 것은(예를 들어 노동절이나 장애인의 날 등등) 실재로 장애인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이 일반사람들만큼 나아진 게 아니라 장애인과 노동자들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요구가 일정부분 타협했기 때문에 그 잔여로써 기념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우리가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자의적인 언어를 쓰는 것처럼(언어자체가 사회의 타협점이 아닌가), 시간이 비대칭적이고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역사라는 이야기도 아닌 변명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잔여로서의 기념일을 어떻게 보낼까?
경제적으로 보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합법적으로 축적하는 이런 날들을 마냥 냉소하며 보내야 할까?
어쩌면 무수한 기념일들은 그 자체로 신성한 날들이 아니라 살면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야 하는 해방공간인지도 모른다. 어쩌피 일정부분 타협된 것이라면 새롭게 느끼고 깨닫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여러 기념일들을 우리 스스로가 쟁취해 나갈 때 서서히 기념일이 필요 없는 그런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새로운 출발이라는 건 과거의 자신을 폐기처분하는 것이라고 전태일이 말했던가? 이제 나의 삶도 생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항해의 첫발을 디디기 시작하며 다시 한번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를 지탱하게 했으며, 나를 존재하게 했고, 나의 모든 과거와 현재의 토양을 축적하게 한 영양분이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성장하고 나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해두자. 사실이니깐.
인생은 서핑보드를 타는 선수들의 하루라고 생각한다. 해안에서 보드를 들고 나갈 때는 많은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뜨거운 낯 오후 무렵이 되면 바다 한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도도한 생의 한가운데서 과거의 욕망과 현재의 타협 때문에 나는 어른이 되었을 때 스스로를 비관할까봐 두렵다. 하지만 저녁 무렵에 머금게 되는 바닷물이 마치 전장에서 이긴 자의 비늘가죽처럼 빛날 때 우리는 차별받지 않는 욕망을 여러 겹 입고 다시 해안으로 돌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산다.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은 오늘의 욕망이 된다. 비록 그것이 대충 마무리지어진 기념일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그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나는 아직 우리가족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에, 책임져야만 하기에 결코 나의 과거와 그 기둥들을 버릴 수 없다. 언젠가 내가 쟁취할 행복도 결국은 그들과 함께 나눠가져야 할것이므로.
일병 김현동 (2006/06/02 16:56:22)
아,
잘 읽었어요. 유후~
상병 안대섭 (2006/06/02 17:41:51)
그렇죠.
제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그냥 거기에 있는 사랑하는 그 사람이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상병 송희석 (2006/06/02 18:15:57)
꽤 무거운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병장 노지훈 (2006/06/05 18:26:41)
제가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하는 날이 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상당히 감명이 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