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인사] 나에게, 소통을 보낸다.  

상병 손근애  [Homepage]  2009-02-13 10:52:51, 조회: 112, 추천:0 

매일 동일한 시각, 동일한 목소리가 잠을 깨운다. 살짝, 눈을 뜨자 강렬한 빛이 눈 앞으로 쏘여져 다시금 질끈 감아버리고 침구를 머리까지 덮어버렸다. 이틀 전 추위속의 운동을 다녀온 몸은 저리고, 일어나기 싫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하지만-그럴 순 없지. 이곳에 있기로 결정하면서부터 당연하게 따라온 책무.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을 떠올린다. 그래, 그렇게 그 책무에 등 떠밀려, 간신히 머리끝까지 덮어버린 침구를 끌어내렸다.
훅.
한순간 무척 옅은 농도의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그 한순간의 내음은 순식간에 전신의 감각을 깨우고 의식적으로라도 상향조정되고 있던 기분을 저 아래까지 떨어뜨렸다.
비, 비 냄새다.
걷잡을 틈도 없이, 머릿속으로 많은 영상들이 지나간다. 트라우마에 가깝게 형성되어버린 무채색의 기억들은 미처 정신도 차리지 못한 나에게 아찔함을 안겨주었다. 흔들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겨우 부여잡고 앉은 채로 품속에 파묻자 힘겹게, 한마디가 입술을 비집었다.
이래서-비가 싫어.

어릴 때의 기억은 비 오기 직전의 세상처럼 무채색에 가까웠다. 불행하진 않았지만-아니 외려 단란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화려한 세상의 색깔이 잘 채워지지 않았다. 주변은 아스라한 빛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이 뿜어낸 묘한 분위기로 채워져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길어지는 그림자에 먹히기 싫어서 어린 나는 본능적으로 빛을 향했다. 마치, 빛을 갈구해 그쪽으로만 자라나는 식물들처럼.
무채색이었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던 건, 주변에 늘 널려있던 책이었다. 어머니는 한글을 굉장히 일찍 깨친 편인 나에게 사정상 당신의 대리 교육자로 책을 선택하셨고 늘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책을 가져다 주셨다. 손을 뻗으면, 책이 닿았고 누우면, 머리에 책이 닿았다. 그림자를 피해 안간힘을 쓰던 나에게 유일한 발광체가 주변에, 그리 가깝게 놓여져 있었다는 건 행운이었다. 
발광체에 가까이 있자, 내 그림자가 길어졌다. 길어진 내 그림자는 나를 좇아오던 그림자들과 나를 대신해서 상대하기 시작했고, 나는 내 분신이 싸우기 시작해서야 겨우 안정을 찾았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완전한 휴식이었다. 책은 그렇게, 나를 버티게 준 힘이었고, 흔해빠진 말이지만, 구원이었다.

근애야, 어디 안 좋냐. 형, 어디 안좋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걱정스런 어조다. 급격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정신상태가 바닥에 부딪힌 충격에서 벗어났다. 
아닙니다. 아니다. 괜찮아.
고개를 돌리자, 평소보다 10여분이나 늦어진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차, 해야할일이 많은데. 잠깐 혀를 차고 재빠르게 준비하면서 이미 머릿속에 가득차 있는 상념들을 떨쳐내려 애썼다. 어릴 때야. 지금은 내가 비를 싫어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 아침부터 왜이러는 거냐.

다음에-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건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변명으로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기보다는 함께 남아서 있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울먹이며 아쉬워하는 내게 그들은 책을 안겨줬고, 기약 없이 기다리는 동안 그들이 주고 간 책을 읽으면 그 그리움을 덜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친 듯이 책에 파고들었다. 공포로써 시작된 독서는 저변이 확대되면서 가장 진실된 놀이로 변해갔고, 그와 동시에 필사적이 되었다. 한 노인과 커다란 물고기와의 사투 속에서의 인간적 고뇌와 절망, 희망을 담담하고도 생생하게 그려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가슴을 먹먹해했고, 주홍글씨와 죄와 벌을 읽으면서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양심, 그리고 편견들에 대한 깊은 고뇌의 텍스트를 받아들이며 숨이 막혀하기도 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확실히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리 열광하게 되었었을까.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냄새를, 그런 텍스트라도 읽으면서 채우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늘, 비오는 날이면 있는 일이지만 겪어도 딱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물론 익숙해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감각이 무뎌진다는 뜻이니까.
사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스위치를 누르자 일련의 형광등이 한 번에 불을 밝히면서 난장판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인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 오전에 해야 하는 일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바깥을 본다.
후드드득. 
살짝씩 떨어지는 빗방울. 돌풍에 휘말리는 나무들. 흠칫, 물론 아직 해가 뜨진 않았지만 비오는 날만의 특이한 무채색의 바깥은 기억속의 그것과 무서우리만큼 흡사하다. 애써 외면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꾸물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누군가의 얼굴이 불현 듯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이건, 기억들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아가 형성될 때에 미친 듯이 파고든 독서는 나를 사뭇 진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다는 평이 주변에서 쏟아졌고, 많은 독서로써 얻어진 얄팍한 지식들의 범위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독서로써 자라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괴팍 내지는 독특이라는 단어로 정의되게 되어버렸다.
아이답게 노는 법을 익히지 못했고, 진지하기만 한 나는 유희의 즐거움을 늦게야 알았다. 나에게 굉장히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함에 있어서는 적당한 위트와 유머, 그리고 센스가 활력제가 된다는 것도 늦게서야 안 나는, 안타까워서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서야 추구하기 시작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더라. 그 찌푸린 얼굴의 주인공은, 이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그가 해준 말, 그가 보여준 행동들, 그가 알려준 문화. 그리고.........그가 권해준 책.

그렇게 예기치 않은 웃음을 짓고 나니, 몸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조금씩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책상에 놓여있는 책을 본다. 에너지 버스. 
누님은 복귀하는 나에게 이걸 챙겨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기분에 많이 좌우되는 동생인걸 아는 누님이기에, 유쾌하게 살길 바랐던 것일까. 

회색조의 기억 속에서 유일한 소통의 버팀이 되어 주었던 누님이었다. 어린애 같은 성품을 가졌지만, 그런 누님이 있었기에 올바르게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늘 소통에 목말라하던 서로였지만 자신보다도 나에게 이것저것 꺼리를 던져주었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소통의 루트를 찾았고, 그 사이의 조그마한 구멍으로 소통하게 되었지만.

기분이 나아진 참에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한다. 그들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면서 버릇처럼 즐겨찾기로 책마을에 입성한다. 내가 꿈꾸던 밤에 또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눈살을 찌푸리기보다, 하나의 유쾌한 해프닝으로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사람들을 알아간다. 일방적인 소통이지만, 당장은 해갈할 수 있었다. 반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욕심이 생겨났다. 왜 나는 저들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책마을이라고 하기보다도 에너지 마을이다. 모두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 공간을 바라보고 하나 같이 이 마을을 아끼는 모습. 조심조심, 하나씩 글을 읽어나간다. 그리고, 덧글을 달았다. 
이 넘치는 활력에 조금이나마 끼고자. 타는 듯한 사람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빗방울이 거세졌다. 바람도 심해졌다. 이 비바람 속에서 조심스럽게 뚝딱뚝딱 통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소통의 통로는 책마을로 연결되어 회색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그리고 소통의 확신.
몸이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히 잡으며, 통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다지며 한 발을 내딛는다. 

내일 또 비가 오더라도, 그림자가 삼키게 되더라도, 지금 만들어놓은 이 활력의 통로로 내가 피신할 수 있도록.

손근애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54:00 

 

일병 송기화 
  사실 이런 가입인사 엄청 좋은데 말이죠. 

그런데 왜 혼란스러울까요. 
이런 글에도 '가입인사 양식을 지켜주세요'라는 말을 해야하는 걸까요? 
모든 분이 이런 자기소개를 하는 건 힘드니까 양식을 만들었을텐데요. 
혼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2009-02-13
10:57:20
  

 

상병 손근애 
  양식을 깼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다 담았습니다. 좀 부족한 점이 있지만, 다 담았습니다. 
양식에 대한 답변들을 하나의 글로 다 엮은 것뿐입니다. 

이 정도 유용은 가능한 곳이라 생각했기에,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 생각했기에, 조금 다른 양식을 취했습니다. 가능할런지요. 2009-02-13
11:12:51
  

 

상병 윤영준 
  형식과 규칙을 지켜야 하는가? 그런 딱딱한 틀을 깨버린 것이 좋은가? 

어렵네요. 

그래도 전 좋아요. 반갑습니다. 2009-02-13
11:14:48
  

 

상병 김예찬 
  양식은 '[가입인사] 역시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 보이는 한 편의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양식을 지키더라도 자신의 성의와 마음이 담기지 않은 한줄짜리 글들이겠죠. 그리고 양식에 비추어 봤을 때도 내용 상 빠짐이 없는 글이라 판단되네요. 반갑습니다. 함께 합시다. 2009-02-13
11:31:53
  

 

상병 이동열 
  좋군요. 이런 글을 바래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틀에 맞춘 글보다는 모든것을 담아낸 이 한편의 글이 더욱 와 닿는 것같습니다. 반갑습니다. 함께 해요. 2009-02-13
14:39:01
  

 

상병 손근애 
  기화님, 영준님, 동열님 // 사실 약 이주전쯤, 이런 식으로 가입인사를 올리겠다고 생각한후 모 분에게 쪽지로 괜찮은지 물어본적이 있었더랍니다. 당연히 될거라고 생각했던 것의 확인 절차였달까요.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죠.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찬님 // 그래도 소사분들이 판단을 어떻게 할지는 사실 잘 확신이 안들었습니다. 그냥 막연히 괜찮겠지 싶었을뿐.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2009-02-13
15:05:39
  

 

병장 김민규 
  뒤늦게 읽었네요. 아마도 이런저런 일들에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정말 반갑습니다. 당신의 한 걸음이 너무도 따뜻하고 힘있게 느껴집니다. 그 족적들로 더 보여주시고, 더 알려주시길 기대할게요! 2009-02-15
16:16:07
  

 

상병 손근애 
  민규님 // 사실, 기다렸습니다. (웃음) 
능력이 안되어 얼마나 족적을 남길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네요. 하하. 

게다가 지금 이런식으로 올린 가입인사가 조금 문제가 되는 것 같아 삭제하고 다시 올려야 하나 고민중입니다. 

어찌되었든, 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어디 한번 신명나게 놀아봅시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