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인사] 그러니까,  
상병 김동욱   2008-08-03 01:42:58, 조회: 224, 추천:0 

늘 한 발짝씩 늦는 게 문제다.


중학교 시절 ㅡ 나는 늘 굶주렸다.
쉬는 시간, 선생들의 눈을 피하고 무법천지인 도로를 건너는 모험을 감행해 100원짜리 불량식품으로 가득한 문방구에 들어가서 배고픔을 달랬다. (지금 생각해보니 왔다갔다 하다 날려버린 에너지가 불량식품으로 얻은 영양분보다 많았을 것 같다. 억울하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정체를 알수없는, 'oo식품'이라는 글자를,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xx서커스단'을 떠올리게 하는 저렴한 장식들로 꾸민 급식차. 그 차에서는 마치 서커스단원처럼 요상한 급식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한 웅큼씩 걸어나왔다. 병사식당의 '생선묵꽈리고추볶음'이나 '감자풋고추볶음' 어떻게 끊어 읽어도 말이 될 것같은, 알 수없는 이름들이 어울릴만한 반찬들과 함께.....

그렇게 서커스차가 떠나고 나면,
나는 다시 도로를 건너야만 했다.

그 생활도 지겨워져버린 중3 마지막 겨울을 끝내고 돌아온 학교. 정문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립식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어슬렁거리며 그 건물 앞에 서서 너저분하게 붙은 A4용지를 읽었다.

'1층 급식소, 2층 매점'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우리들이 급식에 대한 불만이 많아 자체급식을 실시하기로 했고, 무단으로 학교 앞 문방구를 이용하는 학생들 때문에 교내 매점도 만들었다며, 좋지 애들아~ 라고 방긋 웃던 선생님의 즐거워보이던 얼굴을.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곧 졸업하는 우리들을 앞에 두고. 

그렇게 나는 불량식품 따위는 어디 대보지도 못할 닭꼬치를 들며 매점에서 걸어나오는 후배들을 보며 졸업해야 했다. 서커스차와 함께한 3년 간의 비릿한 기억을 가진 채로.


수능이 끝나고 지어진 고등학교의 삐까번쩍한 독서실도, 몇 번의 삽질 끝에 솔로로 살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시란 걸 깨닫고 술을 연인삼아 지내고 있을 때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도, 시험기간이면 자리가 없어서 이 건물 저 건물 빌빌대며- 아예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하느님의 또 다른 계시란 걸 느끼고 대학교를 벗어나 군대로 몸을 맡겼을 때 위풍당당하게 만들어져 버린 도서관도.

야근 들어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쫑알쫑알 대는 것도, 그러니까
늘 한 발짝씩 늦는다는 게 문제였다는 것이다.



인트라넷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을 때, 어떻게 해서든 심심타파하고자 클릭한 20비 홈페이지에서 책나누미를 발견했다. 오! 인트라넷에 이런 곳이 있다니, 라는 레드락 생맥주를 파는 술집을 발견한 만큼의 기쁨! 잡담이 대다수이던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스크롤의 압박도 커져갔고 나오는 이야기들도 결코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결산'이란 제목으로 올라오던 사람들의 글들. 모의고사가 끝나고 괴수들의 점수가 쫘악 올라오던 그 사이트를 봤을 때처럼 이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반과 내 자신에 대한 끝없는 답답함 반으로 키보드를 긁고 있을 때쯤 이들의 글에서 '책마을'이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책마을이 폭파......어쩌고 저쩌고..해군 보급창이....어쩌고 저쩌고. 


아 역시, 또 한 발 늦었구나. 그렇게 또 섭리의 계단 어디쯤 걸으며, 책나누미에서 글들을 검색하다가 이영기씨니 주영준씨니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익숙해질때 쯤 책나누미는 열리지 않았다. 얼마 간을 그렇게 접속을 시도해도 열리지 않자, 또 방황하며 들어간 공본 독서사랑에서 읽은 책 몇 개를 검색하면 어김없이 이들의 이름이 뜨는 것을 발견했다. 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무슨 봄소풍 보물찾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후임도 들어오고, 비행도 많아지고, 날씨도 슬슬 더워지고해서 이런 기억들이 희미해져버린 얼마 전, 공본 커뮤니티 게시판에 인트라넷 책마을이 어딘지를 묻는 글이 올라온 걸 확인했다. 별 생각없이 또 한 발 늦은 이 가엾은 영혼을 위로하고자 나는 당당하게도 예전에 폭파됐다는 답글을 달았다. 며칠이 지나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그 글을 봤을 때 내 답글 밑에는 내 당당함을 비웃듯 어떤 인트라넷 주소가 적혀있었다. 


1. 이곳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ctrl +c
ctrl +v

이 곳이더군요.



2. 당신은 살아가면서 어떤 것들에 푹 빠져있었습니까? (독서를 제외하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네 개의 채널밖에 나오지 않았던 텔레비, 그리고 만화책
중학교 시절에는 용돈을 쏟아부은 리니지, 그리고 피씨방
고등학교 시절에는 스타크와 수능
대학교 때는 술과 연애
지금은 잠과 여자연예인(부끄럽다...)

독서를 포함시켜도 달라지는 항목은 없는 듯..(땀)


3. 당신이 궁금합니다. 한 문장 이내로 자신을 소개해 주세요. (예: 나는 XXX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 체 게바라같이 좀 멋진 말이 떠올랐으면 좋겠지만
나는 군바리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네요. 흑흑
저 세글자의 엑스표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가.


4. 그렇다면, 다섯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지만 입대 후 신물납니다. 비에서 우의 냄새가 납니다.
군대오기 전 친구가 내뱉은 말. " 원더걸스 컴백하니까 군생활 할 맛난다"
그 때는 미친소리 말라고 했지만 입대 후 께달았습니다.
입대 전에는 길거리든 역이든 보이지 않던 군인들이 입대 후 아주 많이 보입니다.


5. 좋은 느낌으로 읽은 책을 다섯 권만 간략하게 소개해주세요.


가네시로 가즈키의 <GO> :  연애담. 나오키상을 수상했으며 영화화해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민족이란 자칫하면 한없이 무거워질 주제를 유쾌하게 그렸다. 정신없이 읽다보면 어느새 '민족'라는 정의 자체가  매우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삶을 힘겹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일 조선인에 대한 관심은 서경식이라는 사람을 알게 했고, '디아스포라'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줬다.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 :  어려워만 보이던 니체에 한발 다가갈 수 있게 해준 책. 권력의지니 영원회귀니 위버멘쉬니 하는 개념들을 저자의 친절한 설명으로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중개를 통해 알게 된 니체는 나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는 일. 늘 다른 이들의 눈에만 쫓겨온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 :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김연수의 책들 중에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알랭 드 보통의 <나는 왜....?>과 비교해서 읽으면 더 풍성해질 것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 김연수의 매력을 산뜻하게 느낄 수 있는 책.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 : '철학자'란 말이 생뚱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지칭하는 '세속의 철학자'들은 경제학자들. 아담 스미스부터 마샬, 베블렌, 케인즈 등등 해서 슘페터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수식, 그래프 걱정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맨 뒷부분 '경제학의 죽음'. 베스트셀레 <죽은 경제학자들의...>와 비교해서 읽으면 더욱 재미있다고 단언! (그래도 경제학과인데 경제학 책 하나 정도는 써야하지 않을까란 쓰잘데기없는 사명감으로)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책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준구저 서승환저 <미시경제학>과 맨큐저 정운찬김영식저 <거시경제학(론)>이라는 4권의 책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서글픔. 물론 이 책들 역시 추천도서이긴 하지만 암기의 대상이었다는 게 약간 고역이었다는. 그래도 맨큐의 책에서는 위트가 정운찬 책에서는 저자의 애정이 느껴진다는.


6.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당신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살아간다는 것과 동의어


7. 환영합니다! 그야말로 가입‘인사’를! 뭐든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써주세요.


사랑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28:46 

 

병장 윤영돈 
  요즘 추천책에 Go가 많이 나오네요. 
컨트롤 v 하하.. 2008-08-03
10:19:47
  

 

이병 장봉수 
  반가워요~~1 2008-08-03
10:36:46
 

 

상병 홍석기 
  시합에 지각한 투수에게도 기회는 있죠.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2008-08-06
15:58:43
  

 

병장 이동석 
  그러니까, 저도 늦게 봤군요. 
어서오세요. 
그건 그렇고 간만에 이런 알찬 가입인사가 나왔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은...? 2008-08-11
18:04:22
 

 

상병 양순호 
  으하하하하하하하!!!! 1번 문항이 정말 알차군요. 헌데 정말 알차네요. 이런 알찬 가입인사를 냅두고 있었다니 맙소사. 이건 뭔가요. 먹는건가요!! 이게 뭐시깽! 2008-11-02
16: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