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인사]안녕, 하세요.
이병 장명철 2009-06-09 13:03:19, 조회: 77, 추천:1
1. 광활하게 펼쳐진 인트라넷의 세계엔 책마을 말고도 다양한 공간들이 있습니다. 그 공간들 중에서 책마을이라는 곳으로 입주하게 된 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책마을에 찾아 들어오게 되었나요? 그리고 책마을에 입주 신청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문구가 아닌, 당신의 솔직한 진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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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이 순간 엄마 몰래 사탕통 앞에 앉아 있는 아이 같습니다.
이토록 강렬한 흥분과 충동과는 달리 이곳에 오게 된 계기는 참으로 싱겁기 짝이 없네요.
어떤 사람의 PC 즐겨찾기를 뒤적거리다가, 책. 마. 을이라는 이름만 보고 바로 포스트잇에 주소를 적어가지고 왔으니까요. 그리고 입주신청을 내게 된 동기는 그야말로 순전한 욕망에 달렸다고 해야겠습니다. 충치로 치과에 가서 윙윙거리는 치료기구를 마주하더라도 당장 이렇게 차곡차곡 영롱한 색을 지니고 있는 사탕들을 못본 척 지나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까요.
2. '책마을'에 입주를 선택한 당신에겐, '책'에 대한 유별난 마음씀씀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당신의 삶은 '책'을 통해서 어떻게 변해 왔는지 듣고 싶습니다. 책과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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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모인 다른 분들에게도 책은 물론 소중한 것이겠지만, 제게 책은 일종의 의미가 아닌 유일의 의미입니다. 많은 여가와 취미들이 있지만 제게 변치않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책이지요. 하나의 텍스트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들을 가늠해보는 것도 즐겁고 그것이 반영되어 성공적인 텍스트를 읽는 것도 재미있지요. 그러나 책의 장점은 아마도 불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텍스트가 되고 난 후에는 누구도 바꿀 수가 없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종종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텍스트가 튀어나와도 즐겁습니다. 의도의 성취여부가 텍스트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는 아니니까요.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책은 저에게 삶이지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책을 생각하며 보내고, 제가 아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고, 제가 가장 하고싶은 일 역시 글을 쓰는 일이니까요. 릴케나 랭보, 옥타비오 파스 그리고 하루키나 마르케스, 니체 같은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 큰 행복을 느낌과 동시에 저에겐 큰 불행입니다. ‘누군가 이미 쓴 글이구나.’하는 좌절감 때문이지요. 그래서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쓰고자 하는 저의 꿈과 관련해서 책은 좋은 지침이 됩니다. 이것만은 피해가라고, 이건 이제 지겹다고 알려주니까요. 이미 했던 말을 그들보다 잘할 자신이 없다면 관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이죠. 책을 통해서 제가 변해온 구석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조금은 머리가 아파옵니다. 아주 어릴적부터 뜻도 모르고 읽었던 파우스트부터 시작해서 20번에 가깝게 읽고있는 상실의 시대까지 언제 책을 처음 읽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변해왔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않군요. 책을 읽고난 후의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에 대해선 설명이 가능하지만 책을 접한 이후와 이전의 변화는 감지하기 어렵네요. 책을 읽기전엔 엄마 젖을 먹었고 책을 읽은 후엔 밥을 먹었다 정도가 좋겠네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본의 아니게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과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예전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텍스트가 없는 이곳에서 저는 순수창작이라는 것에 대해 심한 좌절을 느낍니다. 문화적 접촉이 없는 광야에서 과연 순수창작물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사변을 제외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등이 요즘의 고민이지요. 그리고 어떤 책을 떠올리면 어떤 음악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이 떠오르곤 했던 옛 버릇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너무 길어졌네요. 이쯤에서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3.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김경욱, 「위험한 독서」) 당신이 읽은 책은 곧 당신을 말해줍니다. 당신이 읽어온 책들이 궁금합니다. 당신이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딱 세 권만 보여주세요. 세 권의 책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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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잔인하네요. 어떤 책을 말하고 어떤 책을 말하지 않을지 고민이 되네요. 현시점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는 이상 세 권을 추리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서 현시점이라는 말을 해야겠네요.
1. 여장남자 시코쿠(황병승 作)문단에 파란을 불러일으킨 시집이지요. 황병승의 시는 시사에서 줄곧 반복되던 서정의 코드를 완전히 짓밟았습니다. 그래서 문단의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지요. 그와 비슷하게 기존의 서정의 공식(묘사와 정해진 파토스, 단일한 시적자아, 극히 제한된 시적언술)을 어기는 사람들을 가리켜 ‘미래파’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지요. 그의 첫 시집인 여장남자 시코쿠는 파괴적인 은유(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지평선만큼이나 먼, 그러나 은유관계를 부정할 수 없는)와 언어유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존의 시의 독자들이 바라는 함축의 미덕은 찾아볼 수 없는 시집이지요. 그러나 이 시집에도 시적언술은 분명하게 존재하지요. 감각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상징들 사이에서 그는 분명하게 전하고 있는 것들이 있지요. ‘꼭 무엇을 당신들에게 전해야 하는가’ 라는 전언이지요. 이건 물론 저만의 감상이니 너무 오해는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를 기점으로 해서 시단은 다시 하나의 기존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서정의 틈바구니 속에서 빛나던 레지스탕스적인 그의 시풍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렸습니다. 미래파와 미래파에 편승하여 무의미하고 단순히 감각에서 그치는 언술들로 가득한 시 사이에서 그토록 미래파가 일탈을 꿈꾸던 서정의 세계는 찾아보기 힘들어졌지요. 어느 생태계나 천적이 없으면 무너지는 것이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시단은 요즘 독자의 외면을 받고 있지요. 여하간 이런 사건들과 별개로 그의 글은 시단에 한 사건으로써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펑키란 것을 알려준 시집이지요. 그 후에 나온 트랙과 들판의 별은 한없이 더 복잡해졌지만, 어쩐지 말이 너무 많아져버려 조금 실망했답니다. 클럽에서 만나 하룻밤 지샜을 뿐이지만 이상하게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고,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여자아이가 떠오르는 책입니다.
2. 지옥에서 보낸 한철(아르튀르 랭보 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말하기에, 이 책을 사랑하는 저의 이유가 너무나 불손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책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한참 이상의 그늘에서 허우적거리던 저에게 친구가 알려줬던 기억이 납니다.
‘레몬향보다 더 향기로운 게 있다.’고 했던 친구의 능청스러운 말도 떠오릅니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지만 발레리의 시편이나 릴케의 시처럼 거장의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요. 그러나 이 시집의 어마어마한 파워는 새로움에 대한 열정입니다. 현상을 포기한 듯한 환상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 환상을 분명히 자신이 보았음을 각인 시키는 의지적인 시적언술들. 19세에 시를 떠나버린 그의 삶까지 더해져 이 책은 저에게 일종의 닿을 수 없는 꽃처럼 하나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무라카미 류의 식스티나인이 영화화된 것을 보게 되면 랭보의 시 ‘영원’을 읊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 역시 멋진 장면입니다. 하지만 청춘과 천재라는 단어로 일축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한국에서 찾자면 기형도가 떠오르는군요. 랭보만큼의 천재성은 없지만 하나의 아이콘이 되면서 객관적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점이나 기이했던 삶, 그리고 미완이지만 강력한 시편들이 비슷하군요.
3.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作)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좋아하는 작가와 책을 물어봤었습니다. 저는 그때 주저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고 상실의 시대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에도 피츠제럴드나 오스카 와일드, 괴테도 좋아했지만 그것들과는 다른 감정이었지요. 그들이 제게 친구였다면 하루키는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인 셈입니다. 그러자 선배들은 자신들이 아는 온갖 작가들을 거론하며 하루키의 범속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했지요. 하루키를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 저를 힐난했지요. ‘하루키는 수필이 제일 좋지. 소설 중에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나 태엽감는새처럼 좀 원대한 뭔가가 좋지 않니? 상실의 시대는 밑도 끝도 없는 연애이야기잖아.’ 라며 말이죠. 그때 저는 표정을 구기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왜 난 오르한 파묵이나 움베르트 에코나 보르헤스처럼 듣기만 해도 상대방을 기죽이는 작가들을 좋아하지 않는걸까하고 말이죠. 그때 생각을 해보면 조금 비겁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밖에 없는 여자친구를 친구들에게 소개하고선 친구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죠.
상실의 시대는 누구의 말 맞다나 밑도 끝도 없는 연애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밑도 끝도 없음은 하나의 낭만을 만들지요. 어떤 것도 지향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하루키가 정말로 지향하지 않았는지는 알 방법이 없지요. 그렇지만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은 저런 매력 하나쯤은 발견했어야 하지 않나 싶네요.
저는 단순히 이 작품을 매혹의 지평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철학 이야기나(할 능력 자체가 저에겐 없지만) 이론보다는 여러 책을 읽은 내가 왜 이 책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지. 그 설명 못할 이유가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겠네요. 레이코의 대사를 빌리자면 여전히 저는 센티멘털의 지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요.
4. 한 '문단'으로 스스로를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보여주기에 한 문단은 긴 것이 아니겠죠? (단, 공지사항에 나와있듯이 문제가 될 수 있는 표현들은 피해주시길 부탁드려요. 물론, 입주 신청서를 내기 전에 공지사항은 꼭 읽어보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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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세요. 여러 다른 표현들이 있겠지만, 가장 단순하고 그래서 더더욱 쉽게 지나가는 안녕이라는 말로 인사를 하고 싶군요. 우리는 얼마나 안녕한가요. 하루에도 몇 번씩 안녕하세요라고는 하지만 안녕하지 못할 때가 많을테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가 잠시나마 안녕하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22살이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글을 쓰기 위해 산다고 감히 말하는 아직 철부지입니다. 치기어린 점이 성숙한 것보다 훨씬 많고 많은 장점들을 쉽게 가리는 큰 단점이 있는 결점투성이의 인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무척이나 저를 사랑하고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한다면 저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팔리는 책을 쓰고 싶지도 않고 시대를 풍미하는 아이콘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몇백년 뒤에도 누군가 텍스트를 통해 저를 짐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오독이겠지만요. 그래서 글을 계속 쓰고 있고, 음악을 듣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림을 봐도 온통 글하고 연관 짓는 얼간이랍니다.
5. 당신이 생각하는 책마을은 어떤 모습인지, 당신이 책마을에서 무엇을 만나고 싶은지 이야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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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그저 관심차원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자꾸 인용을 해서 미안하지만 상실의 시대의 나가사와는 이렇게 말했지요. 어떤 사회든 구성원들의 비율은 일정하다고. 어중이떠중이가 있다면 진짜도 있겠지요. 저는 가리지 않고 모두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리지 않고 모두가 되보고 싶습니다. 이론가부터 창작가 그리고 오타쿠와 편협한 사람 어폐가 많은 사람 아는척 하는 사람, 생판 초짜 모두를 만나고 모두가 되고 싶군요.
6. 여기까지 쓰면서 책마을에 당신을 보여주셨다면,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야말로 가입‘인사를 써주세요. 뭐든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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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어떻게 말을 맺을지가 더 걱정이군요. 오늘은 비가 옵니다. 현상은 언제나 현상일 뿐이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저는 도무지가 현상이 현상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비만 놓고 이야기해도 비를 내리는 풍경을 보면 아무래도 영원인 것 같아서 어질어질하거든요. 겨울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첫 인류가 눈을 바라봤을 때 처럼요. 어쩐지 실감이 안가겠지만요. 하지만 현상을 현상으로 알고 넘어가는 것만큼 재미없는 것들도 없을 거예요. 저는 이곳에 발 딛는 지금이 단순히 시간 떼우기로 넘어가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나의 영원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영원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고 꽉 짜여진 무언가가 아니니까요. 영원같은 비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야외활동이 제한된 이곳에서 밖은 무척이나 조용합니다. 이 고요함이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가닿기를, 속절없이 소망해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3:52:08
상병 김태완
궁에서의 생활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을에 날아드셔서 안착하신 것도 용한데 이런 가입인사라니. 요근래 가입인사들을 보면서 사실 허전하다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님의 가입인사를 보며 충만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미 사탕 빨고있던 사람중 한 사람으로서 환영합니다. 2009-06-09
13:43:50
병장 정근영
공지로- 2009-06-09
13:45:05
일병 김현우
우와 우와 정말로 책을 좋아하시는 분 같아요[..]
뭐랄까 저도 막 도착했어요. 같이 가요! 2009-06-09
13:53:15
병장 김형태
요론건 공지로- 2009-06-09
14:40:54
병장 고승철
이건 아마
[이주의 가입인사]가 어울리지 않을까 한걸요? 2009-06-09
15:18:05
상병 양동훈
공지로- 2009-06-09
17:22:59
병장 이동열
오오오... 2009-06-10
09:05:48
상병 김유현
安寧,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