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이후에 가라타니 고진의 신간이 또 나왔더군요. 간략한 책 소개를 읽어보니 기존 맑스주의에서 중요시하는 생산관계가 아닌 교환관계를 통해 사회를 파악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네요. 제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뒤적이다보니 관련 내용이 있길래 올려봅니다. 참고로 이 글은 2000년 6월 10일에 있었던 호세이 대학 국제문화학부 창설기념 강연을 기초로 대폭 가필 수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언어와 국가


-가라타니 고진-


지적 도전의 거점을 미국으로 옮겼던 비평가에 의한, 『윤리21』, 『트랜스 크리틱』 이후의, 최신 사색과 육성을 전하는 일본 귀국시의 특별강연

■ 네이션은 근대문학의 산물이다.

나는 「언어와 국가」라는 테마로 베네딕트 앤더슨 교수와 함께 강연할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만, 애초에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앤더슨씨는 이 강연을 위해 새롭고 훌륭한 강연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전에 논문을 제출할 시간이 없고 또한 이번 주제에 적당한 영어 논문이 달리 없었기 때문에 이전에 쓴 것을 그에게 보내고, 또 주최자에게도 보냈습니다.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이라는 이 논문(영문)은 1991년 여름 일본에서 있었던 비교문학 세계대회에서 「문학의 구축」이라는 심포지움에 제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어로는 『유모어로서의 유물론』(93. 8)에 수록하여 출판하였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는 꽤 오래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나는 9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 아바인 분교에서 있었던 심포지움에서도, 역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 논문을 급히 제출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첫 부분부터 서양 형이상학의 근저에서 플라톤 이래의 음성중심주의를 발견하는 데리다의 생각에 대한 비판과, 그리고 소쉬르에 대한 그의 생각에 대한 비판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회의에 데리다가 출석하는 것, 더군다나 그가 나의 논문에 대한 코멘터로 나온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곤혹감을 느꼈지만, 데리다는 마찬가지로 다소 곤혹감을 느끼면서도 소쉬르에 대한 나의 견해에 동의하고, 나의 언어론이 현실 상황에 실천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을 평가해 주었습니다. 그 후 이 논문은 몬트리올 대학에서 전자출판되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그 당시 데리다의 발언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는 오래된 논문을 새삼스레 제출한 것은, 실은 그 동안 시간을 벌어 강연에서는 다른 것을 이야기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논문을 다시 읽고, 또 앤더슨씨의 논문을 읽고 있는 사이, 나는 몇 개의 발견을 했습니다. 마지막에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처음에는 그 논문의 골자만을 다시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한 번 뭔가를 쓰면 그것을 계속하여 발전시키기보다도 잊어버리고 마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히려 쓴다고 하는 것은 쓴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뭔가를 합니다. 이것은 학자로서는 좋지 못한 습관이지만 나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만을 해 왔습니다. 자신이 쓴 것은 거의 다시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 이번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강요당하고 재촉 받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80년대 말에 이 책의 영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본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독자를 위해 서문 같은 것을 써야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다시 읽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나는 앤더슨씨의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상상의 공동체』는 1983년에 출판된 책입니다. 내가 읽었던 것은 80년대 말경이기 때문에 다소 뒤의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출판했던 것은 1980년입니다. 결국 양자 모두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책인 것입니다. 또 하나 『상상의 공동체』와 나란히 저명한 책으로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197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것을 읽은 것도 꽤 후였습니다. 『상상의 공동체』을 읽었을 때 나는 일찍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쓸 당시 무엇을 쓰고 있었던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 책에서, 예를 들면 풍경의 발견과 언문일치의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만, 앤더슨 교수의 책을 읽었을 때 나의 고찰은 모두 근대 네이션=스테이트 형성에서의 제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때까지 내셔널리즘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았나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문학이건 무엇이건 근대 일본의 지적 담론에 관여할 경우 내셔널리즘을 무시하는 것 따위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요시모토 류메이(吉本隆明)를 시작으로 하는, 내셔널리즘에 관한 의논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에 깨달았던 것은 그들에게 근대문학이 자명한 전제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셔널리즘적 문학이 있고 반내셔널리즘적인 문학이 있다고 생각하였지, 근대 문학 혹은 에크리튀르가 네이션을 형성했다고 하는 시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쓸 때 나는 내셔널리즘에 관한 의론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이션이라는 것은 오히려 문학이다, 근대문학의 산물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도, 앤더슨씨의 『상상의 공동체』도, 내 책도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이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실은 이 책을 1975년 예일대학에서 일본문학을 강의하던 때 생각한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미국에서 쓴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출신이고 앤더슨씨는 영국인이라기보다도 아일랜드의 아이덴터티를 강하고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이방인성에 있어 공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통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양문화에 대해 비서양문화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대치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비서양이 서양의 식민지주의 때문에 얼마나 억압되었나를 고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근대에서의 비서양의 체험을 통하여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근대 서양의 체험에 존재하는 전도와 억압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배 비평가들은 근대 일본에서의 사건을,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일어났던 것의 미숙한 모방, 오해, 왜곡으로, 혹은 그러한 것들의 격차로 보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에 반해 일본 독자적 문화와 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지만)의 일본 연구자도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태도였습니다. 한편으로 나는 근대일본에서 일어난 것은 근대 서양에서 일어난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극히 단기간에 압축된 형태로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해명하는 것은 단지 일본의 특수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이라고 해도 대체로 영국, 프랑스, 독일 정도밖에 타당하지 않지만)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천천히 일어났기 때문에 자명시 되어 왔던 사태에 존재하는 전도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나는 일본의 경험을 통하여 문학이건, 과학이건, 정치적 형태이건, 근대라고 하는 것에 고유한 어떤 전도성을 밝히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협의의 근대 일본문학사로 읽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 이 책의 영역본은 일본 관계의 책으로서는 예외적으로 광범위하기 읽혔던 것입니다. 


■ 민족의 말와 문자언어

예를 들면 나는 이 책에서 언문일치와 풍경의 발견에 대해 고찰했습니다만 중국인과 한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읽은 불가리아, 그리스의 학자로부터 각기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같은 무렵에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별도로 하고, 서구라고 해도 많은 지역에서는 자국어로 쓴다고 하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근대의 국민국가 형성에서 예외 없이 맞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데리다는 음성 중심주의를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에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그런 생각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음성 중심주의는 오히려 근대 국가 형성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것이고, 그 기원은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내가 그같은 보편적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실은 앤더슨씨의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완전히 중국과 조선밖에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은 서양 혹은 일본의 학자가 했던 것처럼 근대 서양의 역사와 학설을 들어 국민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앤더슨씨는 인도네시아와 동남 아시아의 역사적, 그 가운데 가까운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네이션=스테이트의 형성을 보편화하고 있습니다. 그 경우 정치학자와 달리 그는, 예를 들면 프린트 캐피탈리즘(출판 자본주의), 혹은 신문과 소설을 네이션=스테이트 형성의 중요한 요소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이 한 것이 정말로 네이션=스테이트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나는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이라는 논문에 쓴 것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 나는 내셔널리즘을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의 문제만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서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합스부르크 왕조라든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그 결과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이라는 논문을 쓸 때, 즉 90년대초 무렵인데, 나는 제국과 근대국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근대국가는 백지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라도, 구제국 가운데서 그 분절화로서 시작하고 있습니다(그렇지 않다면 인도네시아와 같이 식민지 통치국가로부터 시작된다). 제국은 많은 부족적 국가로부터 성립한 것이지만 표준어로서 문자언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 라틴어가 그런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한자가 공통의 문자언어였다. 동남 아시아에서는 인도제국(산스크리트)이 중심이었고 타이와 인도네시아는 그 주변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정치적인 속국으로 되지 않았어도 중국이라는 세계 제국의 주변에 속해 있었다고 해도 좋겠지요.

구제국에서 각 민족은 자신의 언어를 속어(배너큘러한 언어)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언어로 쓰거나, 혹은 에크리튀르를 만들어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유럽에서도 그랬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8세기경 한자에서 음성문자를 만들어냈고 그것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여성에 의한『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같은 작품이 쓰여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흥미 깊은 사건이지만,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가령 그랬더라도 18세기 중반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같은 국학자가 주장하기까지는 그것들이 문학으로서 평가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식인과 지배계급은 한자, 한문을 사용하는 것을 특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우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표음문자가 가능했다고 해도 한자가 폐기된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옛부터 한자 가나(?名) 병용의 형식이 주류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 쿠우카이(空海)의 음성중심주의

일본인의 문자언어에서의 이러한 독립은 국민국가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실제 한자 가나 병용이라도 문자를 아는 계급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사와 승려라는 지배계급, 거기에 도쿠카와(德川) 시대의 상인이 첨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족, 부족이 단지 제국의 일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하려고 했을 때에는 반드시 에크리튀르(문자언어)에 있어서 그것(독립)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미 없어졌지만 중국 주변의 부족국가는 한자에 기반하여 독자의 문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데리다의 생각, 즉 서양 형이상의 근저에 플라톤 이래의 음성중심주의가 있다고 하는 지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것은 서양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음성 중심주의는 문헌적으로 보아, 예를 들면 9세기초의 일본에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에서 밀교를 가지고 온 쿠우카이에게서 전형적입니다. 그는 만트라(진언)가 음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자보다도 가나가 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와카(和歌)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더구나 아마테라스 신을 붓타와 동일시하고 천황제를 불교에 의해 기초지웠습니다. 그 배경에는 한자에 기초한 중국적 율령제도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의 음성 중심주의는 쿠우카이의 진언 불교에 있거나 혹은 동시에 그것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밀교는 인도에서 기원한 것이고 일본의 것은 아닙니다. 즉 내셔널리즘의 근원, 그것이 차용된 것입니다. 요약하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사고에서 음성 중심주의가 지배적이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것이 인도에도 있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쿠우카이가 인도적 사고로부터 음성 중심주의를 배우고 그것을 일본에 도입했다고 한다면 틀린 것입니다. 이미 쿠우카이의 시대 일본에서, 한자로부터 가나에 의한 에크리튀르가 확립되어 있다는 상황이 있었고, 그가 한 것은 그것에 이론적 근거를 주는 것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내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쓰고 있을 때 생각했던 것은 서양에서 일어난 것이 일본에서 압축된 형태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본질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지만, 앤더슨씨가 인도네시아 등을 통해 고찰하신 사례는, 말하자면 그것을 더욱 압축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의 사례는 인도네시아에서 보면 오히려 몇 단계로 나뉘어져 있고,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가나문자에 의한 에크리튀르는 8세기에 확립되었습니다. 실제로는 한자 가나 병용이 일반적으로 되었던 것이지만, 뭐라 해도 일본어의 에크리튀르는 일찍 확립되어 있었으며 메이지 이후에 일어난 언문일치는 오히려 어미를 바꾸는 정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표준적인 문자의 형성이 극히 단기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난 일은 메이지의 일본이라기보다, 오히려 7세기에서 8세기의 일본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렇다기보다 그것들이 단기간에 중첩되고 있습니다. 

나는 국민국가 형성에서 어떠한 국가도 이 두 개의 단계를 거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각각의 국가와 민족이 단독으로 이 단계를 밟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국가도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그 동시대적인 문맥에서 그같은 단계를 강요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계는 시대적 차이가 있더라도 구조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혼란이 생깁니다만, 세계 제국 가운데에서 자립적인 존재가 되려는 민족은 어디라도 음성 중심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도 또한 앗시리아와 이집트라는 세계 제국에 대하여 독자의 알파벳을 개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플라톤은 음성 중심주의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언제나 당시의 선진국 이집트를 동경하여, 아테네 민주적 정치체제를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왜 중국 주변의 국가에서, 그리고 한자와 맞지 않는 알타이어계 언어 가운데서, 일본에서만 일찍 음성적인 문자가 만들어지고, 유통되게 되었을까. 이것은 흥미 깊은 문제입니다. 물론 그것을 일본의 유니크함을 증거하는 것으로 내셔널리즘의 근거로 하는 것에 나는 흥미가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거기서 근대의 국민(네이션) 이전에 존재하는 내셔널리즘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제국’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경우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근대 네이션=스테이트의 단계에서 그것이 겹쳐져서 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실제로는 서양화, 자본주의화를 목표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 국학자에 의한 ‘왕정복고’로 표상되고 있다는 것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본 내셔널리즘은,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와 달리 고대국가(헤이안 시대)와 문학에 그 원천을 구하는 것입니다.


■ 소쉬르의 ‘랑그’는 무수히 있다. 

이상으로 내가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을 쓴 동기가 이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논문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시간이 그다지 없습니다. 그리고 앤더슨씨는 이미 영어로 읽으셨고 여러분들은 모두 문고본(고단샤 학술문고)으로 읽어 주시는 걸로 하고 골자만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책 속에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20세기 초부터 그전까지의 역사적 언어학을 비판하고 소위 공시적 언어학을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구조주의의 시조로서, 정신분석과 문화기호론이라는 다양한 영역에서 논의되었습니다. 개략적으로 그 경우 그의 이론은 역사적 혹은 주체적인 측면을 부정하는 이론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또한 그같은 것으로 비판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소쉬르가 언어가 어떻게 국가, 정치와 관계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어학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기능하는가를 깊이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유럽언어라는 개념이 유럽에서 아리아 인종주의를 낳았고 인도에서도 바라몬, 카스트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던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언어학자가 ‘과학적으로’ 말한 것이 영토 침략과 민족 자결의 근거가 된 적도 있습니다.

소쉬르는 랑그라고 했을 때 프랑스어와 영어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실은 이 예는 좋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프랑스어와 영어를 왠지 국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일본에서 소쉬르가 도입되었을 때(그것은 1920년대 초기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매우 빠른데) 일본어는 하나의 랑그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국어, 즉 랑그라고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문예비평가인 에토 준(江藤淳)은 그같이 소쉬르를 이해하여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과 결부지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쉬르에 관해서는 완전한 오류입니다.

소쉬르측에서 보면 랑그는 국어로서의 일본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요즘 여자 고등학생이 쓰고 있는 말은 나에게는 잘 알아듣기 힘들지만 그것도 랑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의 인간이 있고 그 사이에 이야기가 통한다면 그것은 랑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어’라고 해도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랑그는 무수하게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일본어’라는 것은 국가(문부성)가 학교와 방송국 등에서 규제하고 있는 표준어입니다. 그것은 국가가 관여하고 있는 언어이고, 그같은 것만이 랑그는 아닙니다. 

오히려 소쉬르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중시했고, 더 나아가 그러한 언어 사이에 확실한 경계 따위는 없고 경계는 각각의 근대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바꿔 말하면 문자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언어를 생각함에 있어 문자언어(에크리튀르)를 배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음성중심주의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음성 중심주의는, 그가 비판했던 역사적 언어학에야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헤르더 등의 낭만주의자 이래 음성언어가 더욱 근원적이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나온 역사 언어학이야말로 음성중심주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적인 음성 언어라는 것은 실은 근대국가 속에서 문자언어를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혹은 근대 이전에 국가로서 존재했던 적이 있는 언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록에 남아있지 않고 연구할 수도 없습니다. 음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실은 암묵적으로 문자에서 출발하는 것이 되며, 더군다나 그것에 의해 언어와 정치(국가)의 관계를 은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쉬르가 문자를 괄호 안에 넣으려 했던 것은 그 때문이고, 음성중심주의와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음성 중심주의는 실은 언어가, 지금 남아있는 언어가 얼마만큼 국가에 의해 규제되었나를 숨기고 있습니다. 음성언어는 근원적이지만 정치적으로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쉬르가 비판했던 역사적 언어학이 취급하는 언어는 모두 한 번은 국가를 형성했고, 문자언어로서 성립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록에 남지 않고, 따라서 언어학적 대상으로도 되지 않겠지요. 소쉬르가 공시적 언어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를 그 같은 국가의 역사와 분리된 것으로서, 그러나 인간에게 근원적인 조건으로 고찰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랑그라는 것은 인간이 두 명 있으면, 그리고 거기에 코뮤니케이션이 있으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소쉬르가 그처럼 생각하게 되었을까. 소쉬르가 이런 것에 민감했던 것은 20세기 초, 프랑스의 제국주의가 확연하게 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어는 프랑스 민족만의 것이 아니라 프랑스 제국의 언어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 정신의 외화로서의 언어라는 낭만주의적 사고에 모순되게 된다. 왜냐하면 지배된 민족에게도 각기 그같이 말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이 모순은 19세기말 이후의 제국주의가 전근대의 세계적 제국과 달리 국민국가의 팽창으로서 성립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구래의 세계제국은 민족국가와 다를 뿐만 아니라 침략적 팽창으로서의 제국주의와도 다릅니다. 이 점은 언어를 생각하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소쉬르가 역사적 언어학의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유로 특히 그가 스위인이었던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스위스에서는 현재 네 개의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경우 스위스의 프랑스어는 프랑스의 국어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프랑스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국가와 별도로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프랑스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쉬르는 프랑스에서 언어학의 뛰어난 업적을 거두었지만 프랑스에 귀화하지 않으면 교수가 되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고 쥬네브로 돌아가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소쉬르가 언어학이라기보다도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언어라는 깊은 고찰로 나아갔던 것은 그 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비역사적인 구조의 탐구가 아니라 20세기 국가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고양 가운데, 오히려 거기에 저항하려고 했던 일인 것입니다.


■ 경성 제국대학 교수,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

나는 여기에서 일본의 언어학자, 도키에다 모토키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도키에다가 소쉬르와는 다른 문맥에 있지만 제국, 국민국가, 제국주의의 세 요소가 얽혀있는 상황에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외하면 그의 언어학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근대 언어학은 독일에서 도입되었습니다. 즉 헤르더, 훔볼트의 역사적 언어학으로, 그것이 일본 국어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이 과정에서 18세기 후반이후 국학자가 만든 언어학이 배척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근대 언어학은 서양의 문법을 유착어인 일본어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한편으로 자연과학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주의적이었습니다. 그것은 1920년대에 소쉬르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용어에서는 다소 변화가 있어도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도키에다 모토키가 일관하여 소쉬르를 비판했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도키에다는 ‘언어는 주체를 떠나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하여 소쉬르를 비판했습니다. 더군다나 소쉬르를 자연과학적이고 분석적이며 구성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거기에서 19세기적 언어학뿐만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고, 오히려 그것은 소쉬르가 비판했던 역사적 언어학의 특질인 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학이 어디까지나 ‘말하는 주체’에서 출발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그는 음성과 문자의 어느 하나를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언어라도 언어가 본질적으로 언어인 까닭을 밝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쉬르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키에다는 실은 오히려 당시의 일본의 소쉬르파보다도 소쉬르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의 주저는 『국어학 원론』인데 이것은 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또한 ‘근대의 초극’이라는 좌담회가 열렸던 상황 아래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어학 원론』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어를 국어, 즉 국가의 언어 혹은 민족의 언어로 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그가 일본 식민지인 조선에 있었던 경성 제국대학 교수였기 때문입니다. 타이완, 조선, 아이누, 오키나와 같은 이민족=언어를 포섭하는 일본 제국 속에서는 일본어를 민족과 국가와 분리된 것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일본어는 그것에 수반되는 문화와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형성했던 제국에서 일본어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국어의 영역과 일본 국가 및 일본 민족의 영역이 완전히 서로 일치하던 시대라면 국어는 바로 일본국가에서 사용되는 언어이고, 일본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정의해도 조금도 지장을 초래하지 않겠지만, 국어를 그같이 정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은 오늘날 국가와 민족 및 언어의 관계를 보면 명확한 것이다’(『국어학사』)

일본어를 민족과 국가로부터 떼어내었을 때, 도키에다는 일본어가 ‘대동아’에서 지배적인 표준어로 확대되는 상황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국어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벽지에 존재하는 방언인 경우도 있고, 국가의 영토를 넘어선 지방에서 행해지는 일본어인 경우도 있고, 또한 일본민족이 아닌 자들이 사용하는 일본어인 경우도 있다. 이 때 국어의 명칭은 이미 국가도 민족도 초월한 것을 의미하게 되고, 국어는 바로 일본어적 성격을 가진 언어의 총칭이 되는 것이다’ (『국어학사』)

도키에다가 일본어를 ‘일본적 성격을 가진 언어’로 규정했던 것은 소쉬르가 프랑스어를 국가와 분리하여 생각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스위스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는 프랑스 국가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프랑스어적 성격을 가진 언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같은 ‘일본어적 성격을 가진 언어’를 생각할 때, 도키에다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스즈키 아키라(鈴木랑) 같은 국학자라기보다 고학파(古學派)의 언어론으로 되돌아가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근대 내셔널리즘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완전히 과거 텍스트에 관해 말하고 있어 동시대의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근대의 언문 일치주의(음성 중심주의)와는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노리나가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문화적 언어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의 고학(古學)은 오히려 율령제 국가 이전의 공동체의 형태(古道)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고, 게다가 그는 그것을 정치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에서 19세기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0) 이후의 ‘국학’과는 다릅니다. 아츠타네에게 고학은 내셔널리즘으로 전화하고 있습니다. 그의 경우 이미 서양세계가 시야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국학자처럼 도키에다는 언어에 우열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노리나가 등이 외국의 문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일본어적 성격’을 밝히고 있는 것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근대적인 네이션=스테이트에 의한 내셔널리즘은 당시의 국어학에서야말로, 즉 서양에서 도입된 낭만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언어학에야말로 존재했습니다. 도키에다가 국학자의 언어론을 가지고 왔던 것은 오히려 당시의 내셔널리스틱한 국어학을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제국과 근대국가, 그리고 제국주의를 이질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대동아 공영권 표준어로서의 일본어

예를 들면 도키에다는 제2차 대전 후 바로 서울에 있었던 경성대학의 일본어학 교수에 취임한 이래 어떤 심각한 모순에 처해진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도쿄 제국대학 교수 우에다 카즈토시(上田万年)의 ‘국민의 정신적 혈액’으로서의 국어라는 생각(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헤르더, 훔볼트 이래의 언어학입니다)이 조선에서는 근본적인 모순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우에다 박사의 말을 반도에서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조선어의 애호를 첫 번째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이념하에서 일본어의 보급 습숙이 교육의 제일의 사업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된다. 이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에다 박사의 국어관에 잘못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국어로서의 일본어 보급이라는 것에 잘못이 있는 것일까. 이것은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국어연구법』, 1947)

이 ‘모순’은 내셔널리즘의 확장으로서의 제국주의가 다른 민족의 내셔널리즘과 충돌하고 혹은 그것을 환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학자만이 부딪치는 모순은 아닙니다. 그러나 네이션이 국어를 핵으로 하는 이상, 그것은 아마 언어학에서 가장 심각하게 발생하는 모순입니다. 그 모순으로 고민했던 도키에다는 다른 둔감한 언어학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아마 소쉬르도 이 문제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이후 그는 침묵했습니다. 이 때 소쉬르는 언어학을 떼려 치우고 소위 언어 철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도키에다는 협의의 언어학자, 국어학자로서 계속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는 일본어를 조선인에게 강제하는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대동아 공영권의 표준어로서 일본어의 우위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국어는 국가적 견지에서 비롯되는 특수한 가치적 언어이고, 일본어는 그러한 가치의식을 떠나서는 조선어, 그 외 모든 언어와 동등한 위치를 가지는 언어적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국어와 일본어는 어떤 경우에는 그 내포를 달리할 수 있다. 방언은 표준어보다 열등하지 않고, 혹은 그 이상으로 연구적 가치가 있는 언어적 대상이고, 또 누구도 자기 방언에 모어로서의 그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견지는 이러한 방언을 가능한 한 없애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표준어 교육, 국어교육의 우위가 나타나는 것이다. 국어는 실로 일본국가의, 또 일본국민의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국가적 견지에서 비롯되는 방언에 대한 국어의 가치는 곧 조선어에 대한 국어의 우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방언과 조선어에 대하여 국어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근본으로 소급하면 근대의 국가형태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또한 대동아 공영권에서 일본어의 우위라는 것을 생각할 단서가 열리는 것이다.(?조선에서의 국어정책 및 국어교육의 장래?, 잡지 ??일본어?? 제2권 8호, 1942. 8)

도키에다가 하려고 했던 것은 국어의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국어가 통용되지 않는 제국주의적 확대의 상황에서 일본어에 의한 정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 정치성을 중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郞)를 중심으로 한 교토학파의 철학자는 끊임없이 제국주의를 부정하는 몸짓을 함으로써 당시 이루어지고 있던 제국주의적 침략을 ‘대동아 공영권’으로 의미 지웠습니다. 그것이 ‘근대의 초극’이었습니다. 그들의 말만 보면 마치 제국주의에 적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현실에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도키에다는 확실히 19세기 이래의 근대 언어학(국어학)을 넘어서려고 했지만, 그것은 교토학파가 말하는 ‘근대의 초극’과 평행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도키에다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도키에다를 흥미깊게 생각하는 것은, 첫째로 그의 언어학이 일본에서는 예외적으로 다언어 상황을 의식했던 언어학이었다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초래했던 것은 제국주의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야말로 그에게 전후 일본의 언어학자보다도 훨씬 언어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문제는 소멸한 것은 아니고 다른 형태로 지금도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영어는 세계어로 부족함이 없는가

도키에다가 말한 것, 즉 각각의 언어는 동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가 다르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붕괴해도, 또한 일반적으로 군사적인 식민지 지배가 소멸해도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 국민국가가 상호 대등하다고 하면서도 정치적?경제적인 발언력에 있어서 다르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제국의 붕괴 후 일본어의 ‘가치’는 없어졌습니다만 경제성장과 아시아에의 경제적 진출과 함께, 즉 ‘엔’과 함께 그 힘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일본어의 ‘가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결정적으로 명확한 것은 글로벌하게 보아 일본어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적인 언어는 말할 것도 없이 영어입니다. 영어는 19세기 대영제국에서 20세기 미국의 세계지배를 통해 일찍이 없었던 링거 프랭커(세계어)가 되었습니다.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라든가 자본주의의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불리는 사태가 있습니다. 이것은 언어의 면에서 말하면 영어가 링거 프랭커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러가 세계통화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가 세계적인 언어가 되어가고 있을 때 우리들은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영어를 미국제국의 언어로 배척해야 할까요. 예를 들면 프랑스 국가는 프랑스어가 국제적으로 점점 통용되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습니다. 또한 핵실험을 시작으로 미국의 정치적 헤게모니에의 저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에 대항하여 유럽 공동체를 진전시켜 왔지만, 그렇다면 거꾸로 그 공통언어는 영어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용어를 비롯해 영어는 각 국어에 침투해 있고 그것은 점점 강화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아시아 사람들과 만날 때, 영어 없이는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영어권에서의 교류에는 영어가 공통어로서 불가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국어로서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미국인만은 아닙니다. 앞으로 미국이 국가로서 몰락하는 일은 있겠지만, 영어가 몰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영어가 영국 제국?미국 제국의 역사적 유산으로서 세계어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역사의 변증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을 적극적인 의미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그것을 부정할 계기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일찍이 에스페란토 같은 인공적 세계어 운동이 있었습니다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공적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유럽어에 가까운 것이라서 비유럽인에게는 습득이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어 쪽이 실제로 사용되고 있고 세계어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영어의 습득은 곤란합니다. 그 때문에 어떻게 하더라도 불공평함이 남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영어에 기초를 두지만 동시에 인공적인 것을 세계어로 하면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일본인 가운데 영어를 기반으로 그 문법과 스펠링을 간략화하고 합리화한 세계어를 구상했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실은 그 사람의 편지를 없앴기 때문에 연락할 수 없기에 누군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이 아이디어에 찬성입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은 영어를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문법적으로 불규칙하기 때문에 습득이 곤란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같은 불규칙성을 제거해 버리면 괜찮습니다. 영어에는 원래 그처럼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피진 잉글리쉬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인 사투리의 영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게르만어 가운데 영어는 정말 피진인 것입니다. 젠더로부터 격변화까지 전부 누락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마 이부족(異部族)이 혼효하고 있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간략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그 자체가 그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서 바른 영어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문부성과 아카데미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변해도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영어를 근본으로 하여 세계어를 만들면 에스페란토와 달리 실천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실현될지는 극히 곤란한 것이지만 국제적 기관에서 이것을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국민은 이 같은 영어를 쓰든지,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인정하고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세계어가 지금의 영어를 변화시키고 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어의 습득에는 그만큼 불평등은 없을 터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다른 언어가 없어져 버리느냐 하면, 오히려 반대로 각 국어?방언?소수민족의 언어가 보존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에 의해 네이션과 국가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는 그 반대로 후자의 문제가 언어의 문제로서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하면 언어는 국가와 네이션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문자언어가 되면, 반드시 정치적인 ‘가치’, 즉 국가와 네이션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가치’에 관련됩니다.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것을 괄호에 넣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런 곳에서 우리들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국가와 자본이야말로 표적이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나는 이 강연을 위해 생각해 온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그것이 얼핏 보아 네이션과 국가에 대립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근대 네이션=스테이트를 지탱하는 장치이며 제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이 같은 시도도 60년대 이후에 나온 하나의 프로프레머틱(문제기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에서 나온 것입니다.

60년대 이후, 그때까지의 경제 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사고에 대하여,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려했던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그 문제 가운데 하나가 ‘네이션’입니다. 레닌은 민족을 근대 자본주의 시장형성의 결과이고, 거기서 언어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적으로 되면 민족문제는 해소된다 라고.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앤더슨씨의 ??상상의 공동체??는 중국과 소련의 대립, 중국과 베트남의 대립을 구체적인 계기로 하고 있습니다. 민족 문제 따위는 계급문제가 없어지면 소멸된다고 주장하는 그 마르크스주의자의 국가에서 민족문제가 분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그 때 네이션을 경제적 혹은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담론적 영역에 서 보려는 경향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네이션을 부족과 종족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시장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그것에 고유한 형식에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앤더슨씨의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로 요약되겠지요. 그러나 나는 담론과 표상을 통하여 네이션을 비판하는 일에 서서히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80년대 이후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함께 ??상상의 공동체??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포스트 콜로니얼리즘과 컬츄럴 스터디처럼 아카데미즘의 제도적 담론으로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같은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치밀하게 되어도 당초 그랬던 것처럼 충격적인 비평의 힘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보수파 이데올로그는 네이션이 ‘상상의 공동체’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재인 ‘것처럼’ 생각할 뿐이다라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그 경우 네이션이 ‘상상의 공동체’임을 아무리 지적해도 별로 타격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 네이션은 상상물임에도 어떤 현실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단지 환상이라고 하는 것으로는 비판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 같은 계몽주의적 비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근본적인 비판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드와 앤더슨씨가 한 일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관한 씨의 연구를 정중하게 읽어 보고 나는 앤더슨씨가 자본과 국가에 관해 실로 주의 깊게 고찰하고 계시고, 단지 네이션을 적대시하거나 상상물로서 처리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국가와 자본이야말로 씨의 표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네이션을 단순히 상부구조와 표상으로서만 보는 것은 앤더슨씨의 취지에 반하는 것입니다.

소위 마르크스주의자의 비판자는 실은 그것과 동일한 시각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것이 토대적 하부구조이고 국가와 네이션은 상부구조라는 시각(사적 유물론)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함에 반해, 그 비판자는 상부구조에는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고 그 자체의 형식을 탐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같은 사적 유물론의 시각에 원래 부정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적 경제는 하부구조일까요. 화폐와 신용의 세계는 경제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구조는 아닐까요. 우리들은 지금도 그것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국가와 네이션도 종교적인 환상일지도 모르고, 그것이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기반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따라서 단지 환상이라고 해도 결코 그것을 해소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적 유물론에서 하부구조라든가 상부구조라고 하는 의론은 마르크스가 ??경제학비판서문??에서 말했던 한 구절에서 왔을 뿐이지 마르크스는 특히 그것을 강조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주저인 ??자본론??에서 보면 중요한 인식은 아닌 것입니다. 사적 유물론은 엥겔스가 마르크스보다 먼저 가지고 있었던 인식입니다. 후에 엥겔스가 그것을 마르크스가 최초로 말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되었을 뿐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마르크스주의라면 마르크스가 없어도 마르크스주의는 성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론』과 같은 작품은 절대로 마르크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적 유물론은 자본제 경제 이전의 역사를 자본제 경제가 실현했던 것으로부터 소급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이전의 역사를 경제적인 시점에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거꾸로 후자에 의해서는 자본주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국가와 네이션과 마찬가지로 공동적인 환상이고 동시에 더없이 현실적인 것입니다.


■ ‘교환’의 네 가지 형태

보통 자본주의적 경제구조가 있고 그 상부구조로서 국가와 네이션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나는 자본과 국가와 네이션을 각기 다른 ‘교환’의 원리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부르조아적인 근대국가에 있어 그것이 트리니티(삼위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러한 ‘교환’의 원리를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하겠습니다.

마르크스는 교역은 공동체와 공동체 간의 교환에서 시작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다른 형태의 교환이 있습니다. 첫째로 공동체 내부의 교환입니다. 이것은 증여 - 답례라는 상보적 교환입니다. 이것은 상호 부조적이지만, 답례에 응하지 않으면 무라하라부(에도시대이후 촌민에게 규약위반 등의 행위가 있을 때 전 마을이 합세하여 그 마을과 교제 및 거래를 끊는 사적 제재)가 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구속이 강하게 존재하고 또한 배타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형태는 강탈하는 것입니다. 뭐라 해도 교환하기보다 강탈하는 쪽이 빠르기 때문에. 이것을 교환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이겠습니다만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하거나 산업을 육성시키거나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의 원형입니다. 국가는 보다 많이 지속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에 의해 토지와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의 공공사업에 의해 농업적 생산력을 향상시키려고 합니다. 그 결과 국가는 수탈기관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농민은 영주의 보호에 대한 답례로서 연공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국가는 한 면으로는 초계급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표상됩니다. 유교가 그러하듯이 치세자의 ‘덕’이 설파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탈과 재분배도 ‘교환’이라는 형태가 됩니다.

셋째로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공동체와 공동체 간의 교역이 있습니다. 이 교환은 서로의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서로 등가라고 생각했을 때 교환됩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이 교환에는 잉여가치, 즉 자본이 발생합니다. 고전 경제학자가 비난했던 것처럼 상인 자본은 사기에 기초한 것은 아닙니다. 가치체계가 다른 지역간의 교환, 예를 들면 어떤 지점에서 싸게 산 것을 다른 지점에서 비싸게 판다고 해도 각각은 등가교환이므로 차액(잉여가치)이 발생합니다. 산업 자본도 원리적으로는 같습니다. 상인 자본의 경우는 공간적인 차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만, 산업자본에서의 잉여가치는 시간적으로 기술혁신에 의해 가치체계를 변화시켜버리는 것에 의한 차액(상대적 잉여가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착취’이긴 합니다만, 봉건적 국가의 수탈과 비슷하게 보여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교환(교역)이 얼핏 보기에 등가교환임에도 불구하고 부등가 교환 혹은 부의 불평 등을 초래한다는 것, 이것은 사실상 명확합니다.

이상으로 교환에는 이 세 가지 형태가 있는 것입니다. 실은 그 위에 또 하나의 교환 형태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앤더슨씨는 네이션=스테이트가 본래 이질적인 네이션과 스테이트의 ‘결혼’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입니다만, 그 전에 역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두 개의 ‘결혼’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국가, 자본, 네이션은 봉건 시대에는 명료하게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즉 봉건국가(영주, 왕, 황제), 도시, 그리고 농업 공동체입니다. 그것들은 상이한 ‘교환’ 원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두 번째로 그같은 국가기구에 의해 지배되고 서로 고립된 농업공동체는 그 내부에서는 자율적이고 상호부조적, 상보적 교환을 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그러한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시장, 즉 도시가 성립합니다. 그것은 상호적 합의에 의한 화폐적 교환입니다. 봉건적 체제를 붕괴시켰던 것은 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침투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절대주의적 왕권국가를 낳습니다. 그것은 상인계급과 결탁하여 다수의 봉건국가(귀족)을 타도하여 폭력을 독점하고 봉건적 지배(경제외적 지배)를 폐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거기서는 봉건지대는 국세가 되고, 관료와 상비군이 국가적인 장치가 됩니다. 절대주의 왕권 하에서 그때까지 다양한 부족과 신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왕의 신하가 되고, 후에 국민적 동일성의 기반을 구축합니다(나는 서양의 사례에 기초하여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메이지 유신후의 일본에 대해서도 대체로 맞아들어가고 그외 나라에 대해서도 맞아 들어갑니다). 다만 왕권인가 아닌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후진 자본주의국에서의 사회주의적 독재정권은 실제는 절대주의적 왕권과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상인자본(부르조아)은 이 절대주의적 왕권국가 속에서 성장하고, 또한 통일적인 시장형성을 위해 국민의 동일성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셔널리즘의 감정적 기반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네이션의 기반에 시장경제의 침투와 함께, 또한 도시적인 계몽주의와 함께, 해체되고 있었던 농업 공동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자율적이고 자급자족적이었던 각 농업공동체는 화폐경제의 침투로 해체됨과 함께 그 공동성(상호부조와 상보제)을 네이션(민족) 가운데 상상적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앤더슨씨는 종교가 쇠퇴한 후에 네이션이 그 대리를 담당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그 경우 종교가 구체적으로 농업공동체로서 존재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쇠퇴라는 것은 공동체의 쇠퇴와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가 프로테스탄티즘 같은 형태에서는 조금도 쇠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이션은 오성적인(홉스적인) 국가와 달리 농업 공동체에 뿌리내린 상호부조적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한 내셔널리즘에서 그것이 환기되는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서로 돕는다고 하는 감정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국가와 네이션의 ‘결혼’입니다. 물론 그것은 농업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 ‘결혼’하는 것은 부르조아 혁명에서입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 평등, 우애라는 트리니티(삼위일체)가 주장되는 것처럼 자본, 국가, 네이션은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 통합됩니다. 따라서 나는 근대국가를 자본=네이션=스테이트(capitalist - nation - state)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상호 보완적이고 서로 보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제적으로 자유로이 행동하여 그것이 계급적 대립에 귀결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국민의 상호 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넘어서고 국가에 의해 규제하고 부를 재분배한다고 하는 방식입니다. 그 경우 자본주의만을 타도하려고 하면 국가적인 관리를 강화하는 것이 되고, 혹은 네이션의 감정에 발을 빠집니다. 전자가 스탈린주의이고 후자가 파시즘입니다.


■ 자본=네이션=스테이트에의 대항

이 세 개의 ‘교환’ 원리 가운데 근대에 C형태의 교환이 확대되고 다른 것을 압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면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가족을 해체할 수 없고,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농업 등에서는 자본주의화가 완전하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본은 인간과 자연의 생산에 관해서는 가족과 공동체에 의거할 수밖에 없고 비자본제 생산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국가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의해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위기(공황)에서 국가가 노골적으로 등장합니다. 또한 절대주의적인 왕(주권자)는 부르조아 혁명에 의해 소멸되지만, 국가 그것은 남습니다. 그것은 국민주권에 의한 대표자=정부로 해소되고 마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는 항상 다른 국가에 대해 주권자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위기(전쟁)에서는 강력한 지도자(결단하는 주체)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현재 자본주의의 글로벌라이제이션에 의해 국민국가가 해체될 것이라고 하는 예측이 이야기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테이트와 네이션이 그것에 의해 소멸하는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글로벌리제이션(신자유주의)에 의해 각국의 경제가 압박되면 국가에 의한 보호(재분배)를 구하고, 또한 내셔널리즘적인 문화적 동일성과 지역경제의 보호라는 것으로 향합니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는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강력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느 것을 부정하려고 해도 결국, 이 원 가운데로 회수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단순히 환상이 아니라 각기 다른 ‘교환’원리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자본주의의 축적운동을 방치하게 된다면 인류의 파멸을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와 네이션(공동체)를 가지고 와도 헛짓입니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는 삼위일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삼위일체 속에서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헛짓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항의 장을 이 삼위일체와는 다른 지점, 즉 어소세이셔니즘에서 구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교환 원리입니다. 즉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하여 상호부조적이지만 배타적이지 않는, 화폐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자본으로 전화하지 않는 것 같은 교환입니다. 이것은 유토피아처럼 들리겠습니다만 실제로 이같은 어소세이션은 이미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고 어소시에이트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같은 교환원리를 트랜스내셔널하게 넓힐 때에만 세 가지 교환원리에 뿌리 내린 자본=네이션=스테이트는 그 기반을 잃고 소멸하겠지요. 물론 그것은 한꺼번에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만은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표상의 비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마침 이 유월에 오사카에서 New Associationist Movement(NAM)의 운동을 개시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상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만, 「NAM의 원리」(오오타 출판)이라는 책을 내니까 참조해 주십시오.


『문학계』, 2000. 10
 
 
 
병장 이건룡 
  근래 호사스런 릴레이가 계속되는 군요. 몰래 출력해놓았습니다. 오늘은 연등시간 등지에 읽어야 겠습니다. 발터벤야민 정리와 함께. 06-20   
 
상병 김재영 
  음..... 고진의 주장 자체가 기존의 <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파격적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국내에서 고진이 수용되는 작금의 현상을 바라볼 때 그 주장이 좀 과하게 포장되어서 들어오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고진이 예견한 바, "유통관계"의 "생산관계"에의 우위라는 명제에 들어맞기 때문인 것인지, 혹은 제대로 된 고진 독해가 전무한 남한 사회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지는 좀 더 숙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고진의 주장을 치밀하게 독해하여 칸트와 루시오 콜레티 마르크스 그리고 욕심을 부리자면 그람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우 복잡한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의 계보를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보는 기간 남한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의 협소한 흐름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의거한 그것이나, 트로츠키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 등등)을 쇄신시키는 주요한 방향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문제는 제 자신의 역량과 시간의 부족으로 인하야... (울음) 06-21   
 
상병 김재영 
  그런데 이 글에서 고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과연 칼 폴라니 이후 존재해온 교환양식을 통한 자본주의의 특성 고찰.... 그것이었을까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강연의 마지막에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첨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이 글의 진정한 함의는 근대국가(state)의 구성 조건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그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동아시아 챕터로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 

(어쨌든 저는 최근 들어 부쩍 고진의 연구에 대한 한국에서의 소비가 매우 선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