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가라타니 고진, <네이션과 미학> - 보로메오의 매듭
병장 김예찬 2009-09-12 16:00:47, 조회: 134, 추천:0
사실 칼럼란에서 진행하고 있는 <역사와 반복> 읽기와 <만주국> 세미나를 빨리빨리 진행해야하지만, 죄송하게도 <네이션과 미학>을 읽다보니 전자들을 시도하기가 좀 귀찮아졌습니다. 허허. 적어도 다음 당근 때는 <역사와 반복>을 2부까지 끝내기로 약속 드리겠습니다..
<네이션과 미학> 1부에 해당하는 '서설 : 네이션과 미학'을 다룬 글입니다. 제가 봤을 때 고진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퍼즐맞추기와도 같은 재미를 주는데(물론 원익님처럼 소녀시대를 보는 것 보다 재밌는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흐흐) 그의 저서들은 어떤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부분에서 변주됩니다. 물론 퍼즐을 맞추려면 퍼즐 조각이 있어야겠죠? 고진의 가장 큰 퍼즐 조각은 칸트와 맑스입니다. 그리고 헤겔, 프로이트와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퍼즐 조각들이 있겠죠. 만만치 않은 퍼즐 조각들인데, 고진은 퍼즐을 맞추기에 앞서 먼저 퍼즐 조각들이 어떤 모양인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 것이 고진 읽기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은데, 칸트와 맑스, 헤겔과 프로이트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고진의) 칸트, 맑스, 헤겔, 프로이트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괄호에 넣은 '(고진의)'를 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어쨌든 가라타니 고진은 그 누구보다도 친절한 'The Reader - 1차 텍스트 읽어주는 남자'인 셈이고, 그 점이 고진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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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국가, 네이션(민족/국민)은 경제와는 다른 정치적, 문화적 차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진은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 경제적 문제로 다뤄야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경제'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투자 - 생산 - 소비의 순환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상으로 다양하게 시도된 교환 양식 중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일반화된 '상품교환'에 불과하죠. 고진은 더 넓게 볼 것을 제안합니다. 모든 것은 경제적 문제이다. 이때 '경제'라는 것은, '상품교환'의 상위 개념인 '교환 양식' 전반으로 이해해야합니다.
교환 양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수탈과 재분배', '호수제(호혜=증여와 답례)', '상품 교환', 그리고 고진이 'X'라고 부르는 '자발적 상호교환'이 바로 그 것입니다. (주1)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호수제는 공동체의 교환 원리, 수탈과 재분배는 봉건국가의 교환 원리, 상품 교환은 도시의 교환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환 원리가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환 원리가 얽히고 조금씩 변형되면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고진은 호수적 교환이 모든 교환양식의 기초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봉건적 교환 양식인 '수탈과 재분배'를 살펴볼까요? 지배자가 지속적으로 피지배자를 수탈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얻은 부를 재분배하고, 또 피지배자를 또 다시 수탈할 수 있도록 다른 누군가로 부터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 것은 교환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피지배자가 폭력과 강압에 의해 일방적인 수탈을 당하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지배'라는 것은 피지배자들에게 '은혜'를 받는 것이고, '충성'을 다해야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지켜주고 보호하는 지배자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너무 심하게 수탈하는 지배자들은 교환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란을 당하는 것이죠. 지속적인 권력의 기반에는, 폭력적 강제가 아니라 호수제의 교환 원리가 존재한다고 보아야합니다.
교환의 기본 원칙은 '등가 교환'입니다. 물론 A와 B의 교환에서, A와 B가 등가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 '등가 교환'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등가 교환'은 교환 되는 대상들이 정말 '등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환되기 때문에 '등가'가 되는 교환입니다. 그런데 '상품 교환'에 와서는 이러한 원리가 뒤바뀌는데,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상품 교환이야말로 상품의 가치를 시장의 원리에 의하여 정해진 그 만큼의 화폐로 환산되는, 정말로 '등가 교환'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이를 의심했죠. 상품 교환에서는 이윤(잉여가치)이 형성됩니다. A와 B가 정말 등가라면, 이러한 이윤이 형성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상품 교환은 '등가 교환'이라고 "믿어질 뿐"인 것입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화폐를 분석하며, 이러한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실 '상품 교환'의 세계는 지극히 '종교적인 세계'와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윤(잉여가치)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잉여가치는 서로 다른 가치체계 사이의 교환차액에서 얻어집니다. 근세 상인 자본은 상품이 싼 곳에서 물건을 사서, 비싼 곳에서 팜으로 이윤을 얻었죠. 이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체계의 '차이'에서 이윤을 얻은 것입니다. (대항해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근대 산업자본은 끊임없는 기술혁신을 통해서, 가치체계를 시간적으로 차이화함으로 이윤을 얻습니다. (끝없이 새로운 모델이 쏟아져 나오는 핸드폰을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혹은 '시간차'가 곧 돈이 되는 금융산업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죠.) 이처럼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등가교환'이라는 환상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면서, 봉건 계급과는 다른 자본가/노동자라는 계급을 만들어 낸 것이죠.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양식은 '경제 외적 강제'(이를테면 봉건제를 유지하기 위한 무력)를 요구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강제'는 여전히 존재하죠.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호수적 교환은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강제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개인에 대해 갖는 유무형의 강제력이죠. 내가 너에게 증여를 하면, 너는 언젠가 나에게 답례를 해야한다는 것. 내가 너에게 담배를 한까치 빌리면, 언젠가 너에게 한까치 갚아야한다는 불문율. (주2) 그러나 공동체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즉 상품교환에서는 이와 같은 '불문율'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 때 교환을 이행하는 힘은 국가에 있습니다. 즉 '시장'이라는 것은 국가의 보호가 있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와 상품 교환하다가 상대방이 먹튀하면 누가 책임져주나요? 바로 국가의 공권력이 책임져 주는 것이죠!) 그러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는 무엇이 이를 보증할까요? 그 것은 이러한 여러 국가-공동체 위에서 모종의 규율을 가지고 그들을 통합하는 '세계제국'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와 공동체, 국가와 국가 사이의 교역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제국'은 '세계경제'의 성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 질서나, 오스만 제국과 같은 이슬람 국가들,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세계경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우리는 세계제국 - 세계경제 / 상품 교환 - 국가 / 호수적 교환 - 공동체 라는 도식을 세워볼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발달 속에서 네이션=스테이트(국민국가)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본주의 -> 네이션=스테이트'가 아닌, 자본과 국가를 상호연관 속에서 보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관점이 필요한 것이죠. 이 세가지 항들은 각자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 양식'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세 가지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묶여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때 국가(스테이트)와 자본(시장경제)를 묶어주는 것이 바로 네이션(민족공동체)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은 십분 인정해야할 것이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상상의 공동체'가 정말로 국가와 시장사회를 매개하고 종합하는 상상력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재밌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이러한 '보로메오의 매듭'이라는 형식을 다양한 부분에서 도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진은 칸트 비판 철학의 오성, 감성,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 항 역시 이러한 보로메오의 매듭과 같은 형식으로 연관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네이션이 성립하는 시기와 상상력이 감성과 오성을 매개한다는 칸트 비판 철학이 등장하는 시기의 동일성을 짚어내죠.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가 가장 빨리 발전한 영국의 경우, 특히 고전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를 시발점으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풀어나갑니다. 최초의 경제학자처럼 여겨지고 있는 아담 스미스는 사실 본래 윤리학자이고, 사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경제학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때만 하더라도 경제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죠. 아담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이라는 저서를 냈는데, 여기서 '공감'sympathy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공감이란 타인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반응하는 연민과 동정과 같은 인간의 본성인데, 이 것은 단순히 연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과도 양립하는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에게 있어서 '공감'이란, 내가 타인이 되어서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는 '상상력'이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으로 치환하여 생각하는 것, 바로 인간에게 이기심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상황에서야 출현하는 것이 공감입니다. 스미스는 당시 각자 개별적으로 일하던 독립수공업자들이 '공감(상상력)'을 통해 서로 연대하고, 자본에 의하여 결부되어(어소시에이트associate), 그 것에 의하여 단독적으로 불가능했던 높은 생산력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것이 스미스 경제학의 본질이죠.
스미스가 말한 '공감'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됩니다. 프랑스 혁명의 모토였던 '자유, 평등, 우애'에서 '우애'란 상퀼로트(도시 소시민, 직인 노동자)들의 연대감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스미스의 '공감'과 비견할 만한 가치라고 볼 수 있겠죠. 이처럼 '공감'과 '우애'라는 '감정'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정리를 한 곳이 바로 철학의 나라 독일이었습니다. 애초에 정치경제적 관념으로 나타난 '감성'의 문제를 독일에서는 철학적으로 다룬 것이죠. 이제까지의 철학에서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증거, 과오를 범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경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감정'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이제까지 무시되었던 감정에 도덕적, 혹은 지적인 능력이 있는지 재검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8세기가 되면, 감성에 의해 지적 인식이나 도덕적 판단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오성/이성을 넘어선 능력이 있다는 주장마저도 나타납니다. 그 것을 aesthetics(감성론=미학)이라고 불렀구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임마누엘 칸트와 취미판단의 문제입니다. (주3) 칸트가 보기에 취미판단은 일정한 규칙이 없는 것입니다. 취미판단은 주관성의 문제였죠. 그러나 이 것은 각자의 임의적인, 개별적인 판단은 또 아닙니다. 그것이 취미판단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동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이면서, 또 보편적인 것'을 찾아야한다는 이율배반. 이 것은 감성적 인식 일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거칠게 구조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칸트는 감성(주관성)과 이성(보편성)을 나누면서, 동시에 이를 매개하는 것으로 상상력(초월론적 주관)을 설정합니다. 이 것이 칸트의 '비판'이구요.
자, 아담 스미스와 칸트가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을 찾아봅시다. 아담 스미스의 '공감'(상상력을 통해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으로 치환하여 생각하는 것)은 칸트의 저 유명한 정언명령("타자를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과 겹쳐집니다. 칸트의 '상상력'이란, 감성과 이성을 종합할 수 있는 무언가이자,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는 정치,경제적 상태를 폐기하는 것, 바로 '어소시에이션이즘associationism'이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했던 신칸트파 철학자 헤르만 코헨은 칸트에게서 '독일 최초의 진정한 사X주의자'를 발견한 것이구요.
그러나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될 것이, 칸트는 감성과 오성이 상상력에 의해서 종합되지만, 종합 자체는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종합은 '자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주3을 참조하여, '초월적'과 '초월론적'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괄호 넣기'입니다. 종합을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괄호 넣기'를 잊은 것이죠.) 칸트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감성과 오성이라는 이원론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헤르더나 피히테와 같은 낭만파 철학자는 감성과 오성을 종합한, 일원론을 주장했죠. 그리고 칸트 이원론 -> 낭만파 일원론이라는 철학적 이행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진행된 어소시에이션이즘에서 내셔널리즘으로, 라는 전향이 존재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칸트에게 있어서 어소시에이션은 '상상=창조된 공동체'입니다. 여기에서는 이 것이 창조된 것이라는 점, 또는 창조되어야할 것이라는 자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낭만파는 그것을 실체화, 즉 '미학화'했습니다. 그 것이 바로 낭만파의 내셔널리즘입니다. 잘 알려져있듯이, 나폴레옹의 진격에 맞서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문으로 독일 내셔널리즘을 부각시켰죠. 이 때 피히테는 독일 국민, 민족이라는 것이 '원래 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마치 환빠들이 '우리 민족'을 동북아시아의 부족이었던 동이족의 존재에서부터 소급하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낭만파 철학자들은 그 증거로 풍토, 언어, 그리고 언어 공통체로서 '민족'이라는 감성적인 것을 내세우죠. 일원론자인 그는 감정이 그 자체로 이성적 인식이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감성과 이성의 통일을 상정하고 감성화=미학화로 나선 것입니다.
좀 어려워졌으니, 다시 찬찬히 정리해보겠습니다. 피히테는 네이션을 국가와 구별하고 있습니다. 낭만파 철학에서 국가라는 것은 이성의 총체, 이성의 구현입니다. 그리고 네이션은 언어공동체라는 내적 국경을 가진, 감정적인 것이죠. 감성=이성이라는 낭만파 철학(미학)에서 네이션과 국가가 통합되는 네이션=스테이트는 '당위적인 것'이 됩니다. 따라서 갈기갈기 찢어져있던 독일 민족이 통일 국가를 이루는 것은, 내적 국경이 실제적인 국경과 일치되는 것이므로 꼭 실현되어야할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네이션과 미학>이라고 할 때는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러한 주장을 종합화한 철학자입니다. 헤겔은 합리적 근대국민국가(자본=네이션=스테이트)야 말로 이성의 현신이고, 어떤 역사적 완성 단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은 가족과 부족이라는 감성적 기반에서 기인하고, 국가는 이 것을 담보한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네이션이 상상력에 의해 형성된, '상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헤겔을 통해서 우리가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보로메오의 매듭을 끊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어소시에이션이즘)의 이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의 저서 중 <세계공화국으로>는 칸트의 '세계공화국' 아이디어에서 가져온 것이지요. 이 때 '세계공화국'은 UN과 같은 네이션=스테이트의 연합체와는 다릅니다. 근대 국가 체제를 지양하고, 세계시민주의를 기반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어소시에이션'을 이루는 것이 칸트의 '세계공화국'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이나 '국가'를 극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본'과 '국가'가 '내셔널리즘'에 의해 매개된다는 보로메오의 매듭 구조를 파악하고, 이러한 구조 자체를 비판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핵심적인 문제 의식입니다.
주1. 칼 폴라니 역시 교환 양식의 문제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경제 원리(교환 양식)들이 다양하게 조합되고, 변형되면서 나름의 조직화 과정을 이루어 나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경제원리들의 특징은 경제가 사회의 영역에 묻혀 그 일부분으로 작용했고, 경제 행위와 경제 기능만을 담당하는 독자적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근대 이전의 사회는 '자기조정적 시장'이 등장하면서 경제/사회의 분리가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분리를 위해 사회가 새롭게 재구성되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의 재구성은 기존의 공동체적 사회를 파괴하고 사회 자체가 '시장화'되는 현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지요.
참조글 : [추천글-내글내생각] 칼 폴라니, [거대한 변환] 읽기 (1)
주2. 명예의 전당, 주영준님의 [담배를 한 대만 빌려달라는 말에 대하여]라는 글은 이 것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할 지라도 한 쪽이 계속 한 쪽에게 담배를 착취당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런 식의 착취의 하부구조가 친구관계라는 상부구조를 혁명적으로 붕괴시키고 말기 때문이다."
주3. 참고글 - 김예찬 - [독서후기] 박원익, 근대문학의 종언과 환상문학의 종언 읽기 2번 단락.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0-13
10:08:06
상병 정성근
오호라, 결국 우리의 연대감이란 건 상상력에 불과합니다만, 그 상상력이 현실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로군요. 최면암시같은 느낌인데요?(笑)
등가교환의 경우 먹히지 않는 부분도 있지 않나요? 인간관계에서 특히 말이지요.(뭐 사랑이라던가, 우정이라던가)그런 점에서 인간이 모순이기도 하지만.(아니,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경우도 있는데 왜 담배 한 가치는 아끼는 건가요. 이거야말로 모순이군요.) 2009-09-13
03:10:35
이병 홍승진
공부가 부족하여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지점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해봅니다.
글의 초반부에서는 '자본'과 '스테이트'를 종합하는 '네이션', 그리고 '감성'과 '오성'을 종합하는 '상상력'. 이 두 가지 '보르메오의 매듭'을 나란히 겹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낭만파 내셔널리즘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감성=이성'이라는 도식과 '네이션=스테이트'라는 도식을 연결하시면서 앞부분의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발생하는 듯 합니다. 제 머리의 아둔함을 자책하면서 글을 여러번 읽어 보면서, '자본'을 '감성'의 위상에, '스테이트'를 '오성'의 위상에 각각 대입하고 있다는 맥락까지는 어렵게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감성=오성'이라는 공식은 '네이션=스테이트'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스테이트'라는 공식과 더불어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에 김예찬 병장은 아마도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공식을 다시 상기하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등식 자체가 '상상력'을 초월론적이 아니라 초월적으로 이해해버린 결과이기 때문이겠죠. 제 나름대로 자문자답 해보았는데, 옳게 이해한 것인지 글쓴이에게 묻고 싶습니다.
p.s. 글쓴이는 글에서 '이성'과 '오성'을 번갈아가면서 바꿔쓰거나 아니면 '오성/이성'과 같은 식으로 얼버무려 한꺼번에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오성은 'Understanding'이란 개념의 일본식 번역어이고, '이성'은 'Reason'의 번역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개념 사용은 공부하는 사람이 언제나 경계해야만 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2009-09-14
00:13:19
병장 김예찬
꼼꼼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호의 사용이 혼란을 빚게 만든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부분을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낭만파 철학에서 국가라는 것은 이성의 총체, 이성의 구현입니다. 그리고 네이션은 언어공동체라는 내적 국경을 가진, 감정적인 것이죠. 감성=이성이라는 낭만파 철학(미학)에서 네이션과 국가가 통합되는 네이션=스테이트는 '당위적인 것'이 됩니다."
'감성=이성'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감성이 곧 이성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감성과 이성의 종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감성=이성'은 '네이션'이죠.
낭만파적 일원론에 대해서 좀 더 부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책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죠.
"셸링은 감성과 오성(논리이성)의 이원성을 넘어서는 직관적 지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감성과 오성의 종합이다. 바꿔 말해, 그것은 모든 인식의 근저에서 예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철학의 '미학화'이다. 헤겔은 피히테나 셸링과 달리 칸트의 이율배반으로 돌아가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는데, 근본적으로 직관적 지성과 같은 종합을 전제하고 있었다. 헤겔은 철학을 예술 위에 두었는데, 그때 이미 철학 자체가 '미학화'되어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관념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감성과 오성의 종합'을 전제하는 사고(낭만파적 일원론)는 '감성과 오성은 상상력에 의해 종합되지만, 이때 종합은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칸트의 이원론)와 차이를 보입니다. 홍승진님이 적확하게 지적하셨듯, 칸트와 낭만파의 시대는 감성의 위치에 대응하는 '자본(시장경제)'이 실체를 가지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감성론(미학)이 등장했던 것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구요.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감성(자본)을 이제까지의 오성(국가) 중심의 철학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의 문제가 제기 된 것입니다. 낭만파는 이러한 자본과 국가의 문제를 '네이션'을 통하여 통합시킵니다. 이때 네이션은 경쟁적 시장경제와 그리고 합리적 국가에서는 소멸되는 '공동체 원리'를 대체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낭만파 철학자들의 일원론 속에서 '네이션'이 실체적인 것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칸트와 낭만파 철학자들은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칸트의 경우 자본과 국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어소시에이션'을 제안합니다. 칸트는 이런 '어소시에이션'이 상상된 것, 창조된 것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낭만파 철학자들은 "모든 인식의 근저에서 예술을 발견"한 것처럼, '네이션' 자체를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오성과 이성의 혼용 같은 경우는, 저도 상당히 의아한 부분이지만 책 자체에서 이렇게 사용하고 있군요. "감성과 오성 또는 이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 , "이성이나 오성으로 통합되는" 등의 애매한 표현이 많습니다. 다만 어떤 개념적 차이를 지적하자면, 낭만파 철학에 있어서 오성과 감성은 이원적으로 분리되고 그것을 종합하는 전제가 '이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9-09-14
09:01:50
상병 진수유
예찬님의 또다른 정리! 잘 봤습니다. 흐흐, 자주 올려주셔서 사실 내용면에선 그닥 새로운 건 없군요. <네이션과 미학>을 반입하신걸로 보입니다. 저는 설탕 때 들춰만 보고 왔는데, 조만간 고진책 한 권쯤을 구매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의 저서들 중에 저와 같이 입문하는 사람들이 볼만한 책으로 한 권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세계공화국으로>는 어떤지..? 2009-09-15
15:46:21
병장 김예찬
<세계공화국으로>는 고진 자신이 대중용 저서라고 밝힌 만큼 다른 책들에 비해서도 확연히 읽기 편한 책입니다. (물론 다른 책들 역시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만..) 입문용으로는 단연 추천입니다. <네이션과 미학>이나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고진이 최종적으로 이야기하는 바 역시 <세계공화국으로>에 모두 집약되어 있구요.
<세계공화국으로>의 논의를 구성하는 이론적 기반은 <트랜스크리틱>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 이전에 <윤리21>을 읽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짧고, 강연문 스타일인 만큼 어렵지 않게 쓰여져 있죠.
가라타니 고진 같은 경우 자신들의 저작들을 계속해서 다시 쓰는 편인데, 따라서 시기 별로 저작들의 변화를 탐구해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가면 그렇게 세미나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있습니다.. 2009-09-15
16:06:30
상병 진수유
그 분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는 어디까지나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관심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 뿐이고, 그것을 글로 쓴 후에는 거의 다 잊어버린다" 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작업을 개진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휘 사용이 뭔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계속해서 다시 쓰면서 시기 별로 조금씩 달라지는 변화도 그렇게 본다면 흥미로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세계공화국으로>를 주문해야겠네요. <트랜스크리틱>이 조금 어렵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 <세계공화국으로>를 먼저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