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術과 政治의 力學關係에 關한 考察 
 
 
 
 
藝術과 政治의 力學關係에 關한 考察


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칼럼이 있다고 간주해보자(굳이 '간주'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칼럼이 바로 그 칼럼이니까). 아마도 그 칼럼은 제목에 합당한 정도의 내용, 그러니까 '한국롱단'식의 깊이도 진지함도 없지만 한문이 난무하는 쓸 데 없는 칼럼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런 류의 제목이 붙은 글이 대개 그렇듯이, 그다지 재미도 없을 것이고, 흥미로운 내용 따위도 있을 턱이 없다. 알 필요 없는 한문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고, 한문과 한문 사이에 가뭄에 콩 나듯 들어박힌 한글들은 저자의 지적 능력을 의심해 볼 만할 정도로 문법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글 마지막에는 도대체 이런 책이 세상에 존재는 하는 지 장담할 수 없는 참고 문헌들의 제목이-역시 보통은 한자로 되어 있는-나열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칼럼의 저자를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제목을 통해 내용에 대한 충분한 암시를 행했으니까. 차라리 그런 칼럼이 재미있는 경우라면 우리는 저자를 있는 힘껏 비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런 제목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비판할 수 있다. 적어도 이 글은(이런 식의 제목이 달린 글에 비해서는)재미있고, 읽을 만한 그런 글이니까. 나는 당신을 속인 것이니까. 그리고 또 다른 방향에서 나는 당신을 속이고 있으니까, 이만하면 나는 충분히 비판받을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니까, 나는 도대체 '예술과 정치의 역학관계에 관한 고찰'따위를 할 생각이 없는 것이니까.

심지어 게다가 예술에 대해서만도/혹은 정치에 대해서만도 나는 아직껏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여지껏 단 한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문제들이니까. 언젠가 진지한 고민을 강요받는 날이 오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서 이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어처구니 없는 제목으로 시작한 칼럼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저 '예술과 정치'간의 애매한 관계성에 대한 주절거림이다. '예술'과 '정치'라는 거대한 영역 자체에 그런 간단한 주절거림이 틈입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 되는 걸 억지로 쪼금 하고 마는 것이 취미인지라 그만. 그러니까 주절거리자.

주절거림에 앞서 일단 먼저 이렇게 질러놓고 시작하자(내가 이렇게 소심하다). 예술은 당연히 정치에 종속될 필요가 없으며, 정치 역시 예술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내가 몇 몇 예술적 텍스트-그러니까, 문학-에 대해 일견 정치적인 비판을 한 것 때문에 약간의 오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특정한 예술에 '너는 왜 그리도 탈정치적인가?' 라는 질문을 한 적도, 특정한 정치에 '너는 왜 그리도 몰예술적인가?' 라는 비판을 한 적도 없다. 이러한 질문은 내가 취한 입장과 배치되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정치적 입장에서 비판하였고, 작년, 혹은 최근에 행한 독서 결산에서도 몇 몇 작품들을 '멋진 정치 소설'이라고 극찬하였다. 

여기서 나의 판단 기준은 이런 것이다 : '예술이 정치성을 가지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 없음. 단, 가지려면 촌스럽지 않아야 할 것. 가지지 않으려면 충분히 아름다워야 할 것'

이를테면 나는 최근까지 내가 읽은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을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최근' 이후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을 '정치성'의 차원에서만 해석하려는 짓은 실로 바보같은 짓이다. '한없이'의 경우 그것이 기반하는 시간과 장소가 1970년대 일본의 미군 기지촌이라는 점에서 또한 몇 몇 섹스 신의 묘사에서, 특정 독자는 일본과 미국의 민족과 관련한 '정치성'을 읽어낼 수도 있다. 그것은 '완전히' 틀려먹은 독해는 아니다. 작가인 류가 의도하였건 그렇지 않았건 실제 작품이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한없이'를 일본 민족주의 소설로 읽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작품은 그 작품이 스스로 정치적인 한도 내에서만 정치성을 가지며 또한 이에 대한 책임이 부과된다 좀 더 편리한 예를 들어보자. 요즘 잘 나가는 박민규의 대표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정도로. 그것은 제법 정치적이다. '삼미'는 역시 그것이 정치적인 것 만큼만 정치적인 소설이지 그것이 '다른 삶'을 진지하게 선동하는 '정치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어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러한 자명한 명제가 때로는 잊혀지기도 한다. 세상에 일백 퍼센트 착한 사람도, 일백 퍼센트 나쁜 사람도 없다는 명제처럼(뭐, 1백 퍼센트의 여자아이는 있을 지도 모른다만).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삼미'가 꽤나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치와 예술의 관계성을 어색하지 않게, 촌스럽지 않게 잘 다룬 작품이니까. 적어도 자기가 스스로 꺼낸 '정치성' 내에서는 일관되고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는다. 그러한 것들이 문학적으로 유쾌하게, 즐겁게 진행된다. 좋다. 그리고 여기서 슬쩍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꺼내보자. 쿤데라의 '농담'은 1960년대 체코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인간 존재의 농담스러움을 그려내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전에 김대현 씨가 지적했던 것-사회주의의 사짜도 들먹이기 힘든 나라에서 그 해악부터 먼저 들이대는 것은 이념에 대한 균형적인 인식을 담보하지 못한다-처럼, '농담'에 등장하는 사회당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그야말로 농담스럽게 희극적이고 비인간적인 무엇이다. 하지만 '농담'이 이야기하려는 것은-비중상으로나, 이야기의 전개 상으로나-결코 사회주의의 비인간성과 희극성이 아니다. 그것은 '배경'이다. '농담'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농담스러움'이다. 배경을 가지고 한 작품의 정치성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정치성으로 작품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농담'은 그 배경 만큼-그다지 크지 않은-정치적인 소설이고, 그보다 커다란 무엇인가를 그보다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은 다른 측면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독해일 뿐이지만, 아주 틀려먹은 독해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여기서 당신은 본인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모른다'고 표현한 것은, 여기까지로도 나는 충분히 모든 이야기를 해명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정치성의 관점에서 비판했는가?' 하는.

나는 나의 비판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공지영의 '우리들'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필적할 정도의 가공할 만한 정치를 전제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해소에 있어서는 갑자기 휴머니즘-휴머니즘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물론-으로 경도되고 만다. 나는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들'을 비판했다(이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본인의 독서 후기 참조). 나는 그 독서 후기에서 '우리들'이 전제하는 특정한 정치성에 대해 비판한 기억도 없다. 다만 그것의 촌스러운 전개에 대해 비판했을 뿐이다. 잘못은 공지영에게 있다. 계급론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그렇게밖에 전개하지 못한 것에 있다. 차라리 계급론의 극한으로 밀어붙임으로 결국은 현실 사회에서 '확실하게' 좌절하고 절망한 후에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라거나, 계몽성이고 뭐고 하는 장치들을 다 없애버리고 조금 더 소프트한 전제로 시작하여 휴머니즘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식의 작품이었더라면 나는 그다지 커다란 비판을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 정치적인 한도를 굉장히 크게 규정하였다. 이쯤 되면 정치성과 예술성의 조화가 촌스럽다, 는 나의 비판을 넘어서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정치성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 작품 전체를 비판한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비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이 칼럼의 제목으로 돌아가자. 이 칼럼의 제목은 '藝術과 政治의 力學關係에 關한 考察'이다. 그런 제목을 붙였으면 제목에 합당한 내용이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한문 난무를 곁들인 난독증 소환성 칼럼'만이 이런 제목에 합당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칼럼 모냥으로, 모종의 의외성을 찌르는 식의 칼럼도 아주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저런 제목의 칼럼을 클릭해 보았을 때 '터보튜닝의 미래와 가능성. 슈퍼차져에 대하여' 라던가 '신장 구매 가이드-간에서 콩팥까지' 따위의 제목에 어울릴만한 글이 펼쳐져 있다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내가 '우리들'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어떤 예술이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슬쩍' 다루는 방식에 대한 논의도 진행될 수 있다고 본다. '웰컴 투 동막골'이든, '효자동 이발사'든 혹은 재밌다고 소문은 났으나 당췌 그 소문의 진원을 파악할 수 없었던 '화씨 911'이든, 그것이 '슬쩍' 다룸으로써 더 많은 의미를 창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들이 작품 자체로써 충분히 재미있었고, 예술과 정치간의 긴장을 '촌스럽지 않은 차원'에서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진중권이나 홍세화의 글이 많이 읽히고 그것이 적지 않은 파급력을 지닐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글들이 글과 정치 사이의 긴장을 촌스럽지 않게 풀어냈기 때문이지, 그 글 자체가 지니는 정치력이 악마적이어서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단지 협소한 차원의) 정치적으로 매혹해냈기 때문이 아니다. 본 문단에서 거론한 모든 작품들은 '예술'이다(진중권이나 홍세화쯤이 쓰는 글에는 분명 예술적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들이 어처구니없게 정치를 두드러지게-촌스럽게 다룬다면, 그것은 아예 무의미하다. 예술적으로 아름답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인간을 바꿀 수 없다. 만일 효자동 이발사-거론한 작품 중에 제대로 재밌게 본 작품은 '효자동 이발사'밖에 없으니 그것을 예로 든다-가 특정 정치 이론에 과도하게 경도된 상태에서 한국 사회에 몇 번 있었던 독재자들을 영화처럼 코믹하게 그려냈더라면 그 작품은 그다지 의미있는 작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분열적인 텍스트라는 점에서 또 어찌되었을 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그러느니 심지어 아예 '각 잡는' 정치예술이 더 의미있을 수도 있다. 그 작품은 자기 한도 내에 정치를 이식하고, 그러한 이식에 충실했다. 그래서 예술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은 글을 쓰고 싶었지만, 내겐 그런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짧게 쓸 시간은 언제나 충분하지만 짧게 쓸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아 이렇듯 별 내용도 없는 긴 글을 쓴다. 본문에서 추가적으로 '정치성이 전혀 배제된 예술'(물론 '탈정치' 역시 분명한 일종의 정치 지향이며, 그러한 입장을 택한다고 해도 순수하게 '탈정치'적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만 아무튼)-시이나 링고, 혹은 히데에 대한 내용도 다루고 싶었고, 예술이라곤 하나 예술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회과학 텍스트라는(읽어보지 않았기에 장담은 못 하지만)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저작에 대한 이야기들도 해 보고 싶었는데. 내 역량의 문제도 있고 글의 분량도 있고 하기에 언젠가 또 '영감'을 줄 만한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미뤄둔다. 그러니까 그저 여기까지. 딱 이 만큼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상병 송희석 (2006/03/05 10:21:20)

정말 잘읽었습니다. 자주자주 '영감'이 일어날만한 사건이 많아져서 영준님 글을 자주 보고 싶네요!    
 
 
병장 한상원 (2006/03/05 13:41:48)

영준씨는 엄하신 것 같아요.<그것들이 어처구니없게 정치를 두드러지게-촌스럽게 다룬다면, 그것은 아예 무의미하다. 예술적으로 아름답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인간을 바꿀 수 없다>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정치적이지 않으려면 아예 정치와 연관시킬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예술이 되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정치적이려면 아름다워라!라는 질책 같거든요. 사실, 기대를 많이하고 읽으셔서 그런거 아니에요?(웃음) 아니면, 영준씨 내면의 작가적 관점이 발동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주 조금 하기도 하고. 

물론, 영준씨의 말에도 등장하듯 순수하게 탈정치적인 것이 있겠냐만은-이 부분은 완전 공감합니다- 대현씨의 답글처럼 촌스럽지 않아야 한다라는 조건은 숱한 작가들 모두에게 적용시키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촌스럽다는 대목에서 저는 이광수의 '무정'이 불현듯 떠오르더라구요. "우리가 그들을 구원해야지요!" 뭐 이런 장면, (맞나?) 음음. 기왕 쓰는 작품은 잘 만들면 좋겠지만 저는 철저하게 관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그런 판단을 해요. 그리고 그렇다면 김진명씨 이야기도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전혀 안 읽어보셨을수도 있겠군요, 시간이 아까우니까!) 

저는 그 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얼마나 큰 민족적 사명감으로 매번 글을 쓰시겠어요. 그 분의 글에 매혹되는 숱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면에서는 인정하고 싶지만, 주제는 한결같은데 이야기만 달라지는 그 인정할 수 없는 일관성에는 글쎄요. 마음이 아프죠. 허술하지만 그럭저럭 재미있는 이야기, 정치적이지만 성향은 다르고, 동의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그런 글도 있다고요. 긁적. 공지영씨 이번 책은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저는 정이현씨 <타인의 고독>이나 <낭만적 사회와 사랑> 혹은 그 단편집 정도면 제 딴에는 인정하려구요. 난, 뭔 소리를 하는건지.    
 
 
병장 주영준 (2006/03/06 15:56:36)

상원 / 제가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 것 같습니다. '정치적이지 않으려면 아예 정치와 연관시킬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예술이 되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정치적이려면 아름다워라!라는 질책 같거든요.'에 관해, 음. 제가 하고픈 말은 그보단 '정치적이든 정치적이지 않든 아무래도 상관은 없는데, 스스로 정치적인 한에선 (예술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에요. 또 오해의 소지가 생기는데 방금 문장은 '정치성이 높으면 예술성도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작은 멍석을 깔았으면 그 멍석에 1백프로 걸맞는 춤사위를 펼쳐야 하고, 큰 멍석이라면 또 그에 걸맞는 춤사위를 펼쳐야 한다는 거죠. 예술성은 그 '걸맞는' 정도의 퍼센트 점수라고 해 두는게 편할 것 같네요. 큰 멍석이나 작은 멍석이나, 춤이 그에 100프로 걸맞는 춤이라면 90프로 그에 걸맞는 춤 보다 나은 춤이 될 것이구요. 흐. 아침인데다 오늘 또 갑자기 바빠져서 애매한 대답을 남기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글을 살펴보니 제가 '예술이 정치성을 가지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 없음. 단, 가지려면 촌스럽지 않아야 할 것. 가지지 않으려면 충분히 아름다워야 할 것'이라고 질러놓은 부분도 있군요. 제불찰입니다.    
 
 
병장 마성은 (2006/03/07 21:10:45)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다'라는 발언조차도 정치적인 것을.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도, 정치적이지 않은 예술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