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江 고시원 체류기 
 
 
 
 
고등학교 2학년 때. 
집 안에 좀 꼬인 일이 있어, 집에서는 나를 밖에 두고 싶어 했고,
때마침 독서실 생활도 예의 그 ‘노루표’ 사건(모르시는 분은 책마을 게시판에서 노루표로 검색. 씨익)으로 끝이 난 지라 1년 정도 고시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 1년 동안의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냈나 싶다.
정말 지루하고, 어둡고, 침침하고, 흐느적거리고, 눅눅하고, 끈적끈적한 터널과도 같은 1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새카맣게 잊고 살았던 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잊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박민규의 단편 <甲乙고시원 체류기>는 나를 당혹케 하기 충분했다. 
고시촌이 아닌 곳의 후져빠진 고시원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느낌을 모를게다. 


그 시간들은 
암만 잊으려고 노력해봤자 
기억의 사진첩에 사춘기의 낙인으로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라고.
이제 나는 인정해야한다.

이 글은 박민규의 단편 <甲乙고시원 체류기>에 대한 오마주이자,
내 사춘기에 대한 적당한 길이의 헌사다.


                                          
                                                                       *              *              *



한강 고시원. 

이름도 적당히 고시원스럽고 외양도 방직공장 여공들 기숙사같이 생겼다는 점이 처음 건물 뒤편에 가방을 들고 서서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뭐, 나쁘지 않군. 하고 계단을 올라가 냄새나는 화장실을 지나가며 인상 한 번 찡그려 주고 문을 열었다. 주인아주머니의 고시원 내부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동시에 나는,


컬쳐쇼크- 



그러니까, 첫날부터 나는 ‘고시원’이라는 용어의 사회적 의미를 재학습해야 했다. 70평 정도의 공간에 45명 정도가 살고 있었으니까, ‘따닥따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싶었다. 한 달에 13만원만 주면 확보할 수 있었던 나만의 공간은 두 다리 뻗기도 벅찰 정도로 좁아터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그건 정말이지 악취라고도 할 수 없었다. 악취가 아니라, 정말 기분 나쁜, 뭔가 알 수 없는 냄새였다.―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부엌문을 여고 불을 켜면, 활개를 치던 어둠의 자식들이 스멀스멀 그들만의 제국 본토를 향해 놀라운 속도로 미끄러져갔다. 이건 완전 <조의 아파트>구나. 

‘고시생'은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길고 가느다랗고, 음습하고, 소름끼칠만큼 조용한 복도를 중심으로 말 한마디 없는 45개의 쓸쓸한 인생이 70평의 공간에 집약되어 있었다. 


짐을 풀고, 대강의 내부조사를 끝마치고 그러니까 저녁 열한시 쯤 되었을 때, 담배를 한 가치를 빼어 물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마주한 주택의 3층 높이였다. 열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그녀의 방에서 노닥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몸짓으로 커튼을 휙- 쳐버린다. 문득, 이곳이 만약 ‘한강 고시원’의 옥상이 아니었더라도 저렇게 기분나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1급 정비소의 폐기물 집적소와 볼링장 건물 뒤편의 너저분한 풍경. 건물 너머로 보이는 왕복 8차선 도로와 주변의 네온싸인들이 묘하도록 언밸런스한 매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서울이 맞는건가, 근처의 20층 높이 아파트의 끝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이내 목이 아프다. 내가 살던 아파트인데, 이렇게 높았었나. 내가 항상 다니던 길에서 잠깐 30여 미터 더 들어왔을 뿐인데. 알 수 없는 경계를 넘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하루 만에 이 모든 것에 압도당했다. 어린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편입시키는데 ‘한강고시원’이라는 녀석에게 필요한 시간은 단 하루였다.


신발 갈아 신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술 냄새가 진동한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신발을 던지듯 벗어놓고는 걸음을 주체 못해 쿵쿵쿵 소리를 내며 걸어간다. 동시에 두 곳의 방에서 주먹으로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없다. 이런 곳에 사는데 벙어리인지 떠버린지 알게 뭐냐. 문과 벽을 주먹으로 치는 강도와 고요함을 깨며 울리는 소리의 크기는 목소리를 대신한다. 


‘조용히 좀 걸어다녀라 X팔. 지금 시간이 몇신데.’



자리에 돌아와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던 고등학교 국사책의 활자들을 억지로 우겨넣다가 피곤함을 느껴 책상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새우잠 자듯이 몸을 웅크려 누워 살색 벽지를 바라보고는 가만히 생각했었다. 너무 고요하다. 그러니까, 이 고요한 적막 속에서 45명이 자고 있는 거다. 이 좁아터진 곳에서. 


고시원이라는 곳은 이런 곳이구나.
이 넓은 세상에 몸 한번 편히 뉘일 곳 없는 이들의 마지막 보금자리.
그 때. 바닥의 차가운 감촉에 새삼스레 느껴졌다.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세상은 차가웠다.



워낙 적응이 빠른 성격 탓에, 나는 두 세 달 쯤 지나자 완전히 적응해버렸다. 중간고사 성적이 생각 외로 잘 나왔고, 또 집에서는 나름대로 나를 집 밖에 두고 싶어 했으므로, 어머니는 군 말없이 13만원을 내어주셨고, ‘삼십분 공부하고 세 시간 놀고’ 하는 나름의 공부법도 서서히 그즈음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발꿈치를 들어 소리내지 않고 조용조용히 다니는 보법도 익혔고, 문고리를 끝까지 말아쥐고 소리없이 문을 여닫는 것도 익숙해졌다. 고시원에서 한 솥밥 먹는―이건 정확한 표현이다. 밥은 언제나 압력솥에 준비되어있었다. 반찬만 가져오면 식사는 해결이었다.―45명도 이젠 거의 다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말 한번 나누어 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라는 단 한 마디도. 끄덕거리는 목례도 없었다. 

아, 한 번 있다. 한 마흔 다섯쯤 되어보이는 아저씨가 부엌에서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욕설을 내뱉고는 돌아서서 내게 짜증섞인 목소리로 물었었다. “학생. 저 빨간통에 든 김치, 학생이 먹었나?” 이것밖엔.


덩달아 나도 점점 말 수가 적어졌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학교에서도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는 이내 시큰둥해지는 내 모습에 놀랐었다. 그 때의 나는, 하루의 절반정도를 혼자 지냈다. 어쩌면,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오버페이스이면서도, 혼자 있을 때는 조울에 시달리는 이중인격은 그 때의 경험에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곳은 일종의 패배감―지금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으로 가득찬 하나의 ‘수용소’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패배감의 공기를 마시며 스위트 홈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하루하루를 생활하던 나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괴리된 인간이 되어갔다. 떨어져나간 추진로켓처럼, 열 여덟 때, 나는 종착도 방향도 없이 부유했다. 온통 검은 우주에서 간혹 만나는 미아(迷兒)들이라고는 지독한 우울들뿐이었다. 알코올 중독자, 술집 여급, 일일 잡부, 가출 청소년들. 

세상 모두가 새로운 천년을 맞아 뭐든 해보려고 열심이었건만, 
그 곳은 아직 1980년 서울. 에서 멈춘 듯했다.



어느 날엔가, 친구가 방을 두 시간만 빌려 달라고 했다. 단속이 심해져서 비디오방도 못 들어가고 돈도 없으니 여자친구와 뜨거울 수 있도록 빌려달란다. 일부러 방을 대충 정리하고 김치냄새도 솔솔 풍겨보려고 라면도 방안에서 먹었는데 정말로 그 날 밤에 이 녀석이 찾아와서는 난처해하는 내 표정에도 지지않고 통사정을 해대는 바람에 나는 담배 한 갑과 윤제림 시집 한 권을 들고는 방을 기어나왔다.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 한 대 빼어물고 터널 라이트와 같은 톤의, 옥상높이와 엇비슷한 가로등의 도움을 받아 책을 한 두 장씩 넘기고 있는데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려와 아래를 내려다보니 낯선 여자가 고시원으로 들어간다. 여자친구인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아홉시고, 나는 열한시까지 내 방에 못 들어가는 묘한 상황에 처했고, 맞은 편 주택의 여중생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윤제림의 시는 더욱 차분하고, 청명하고 그랬다.



“야 이 X발. 내가 씨앙 X으로 보이나 부지? 이야. 나도 성질 많이 죽었네 X발.”
혀 꼬부라진 목소리와 함께 옥상의 문은 권씨 아저씨를 토해냈다. 12호사는 아저씬데 영화에 나오는 고리대금업자같은 다이어리 스타일의 손가방을 늘상 가지고 다니고 짙은 컬러의 점퍼를 자주 즐겨입지만 뭐하는 사람인지는 통 알수가 없고, 다만 방세문제 때문에 주인 아주머니하고 이야기를 할 때 성이 권가라는 것을 엿들었을 뿐이다. 권씨 요즘 일이 안풀리는지- 한강 고시원“생(生)”들이 다 그렇겠지만-술을 자주 하고 들어온다. 얼마전에는 7호에 사는 아저씨하고 복도에서 대판 싸웠다. 연신 꼬부라진 목소리로 욕을 연발하더니만 비틀비틀 거리며 구석으로 가서 지퍼를 끌르고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고 다시 어둠속으로-옥상의 문으로-사라졌다. 



한강 고시원 같은 음습하고 폐쇄적인 공간에서는 욕망이라는게 이상한 형태로 변형이 되는데 나 같은 경우는 말하기 좀 쪽팔리지만 관음증이었다. 그렇다고 범죄수준으로 남의 방에 침입하거나 그렇다는 건 아니고, 주변에 누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대개 화장실이거나 부엌에 가니까 한 1분정도는 걸리므로-그 방을 슬며시 열어 고개를 내밀고 방안의 구조나 물건들을 보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훔쳐보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걸 몇 달 동안 해 버릇하니 내 주변에 방을 쓰는 사람들은 대충 뭐하는 사람들인지 짐작이 갔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하면 권씨 아저씨가 오줌을 지리고 10분이 지나서 한 여인이 옥상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고3이고, 나의 관찰에 의하면, 두루마리 휴지의 윗면에, 
“꼭 간다! 경희대 관광정보학과!” 
라고 쓴 걸 보아 관광학도 지망생이 틀림없어 보이는 청순한 타입의 단발머리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손에 종이컵을 들고 무언가를 마시며 구석으로 걸어가는데, 그 구석이 다른 구석이 아니라 아까 그 권씨가 오줌을 지렸던 구석이라 나는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호감 반, 걱정 반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거기 가면 안되는데.”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본다. “12호 아저씨가 술 취해서 거기다 좀 실례를 해서요.”

“아 예.”
......뭐야. 그 다음은?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보지. 그럼 내가-
“몇 살이세요?” 
“......열 아홉이요. 저 일이 있어서.”

얼굴에 쓰여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라고.


나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하지만 외모 면에서는 살아가면서 몇 번의 고백도 받아봤고,
몇 번의 킥(내지는 밴, 멀티게임용어. 게임 내 퇴장이 kick이고 IP차단은 ban이다.)도 당해본 10점 만점 기준 평점 5의 보통 남자다. 누군가가 무서워할 만한 얼굴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뭔가. 


가만 생각해보면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이 곳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다 이렇다. 세상에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다른 사람은 다들 그렇고 그런 인생이라고 넘겨짚어 버리고 자기는 인생이 꼬여서 이런 곳에 처박혀 산다는 식인데, 정말 웃기는 일이다. 내 스스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한 두 마디 걸어봐도, 무슨 흡혈귀 빛 닿은 것 마냥 피하는 게 나로서는 너무도 불편했다. 하기야 지 또래에 독서실 안가고 머리는 빠박 삭발에 밤늦은 시간에 옥상에서 담배물고 왼 손에는 부스스한 머리에 어두운 곳에서 보면 꼭 부랑자같은 모습을 한 어떤 이의 사진이 커다랗게 박혀있는 책을 들고 있으니 퍽이나 위험해 보였겠다. 제기랄.처음으로 윤제림 시인을 원망했다. 왜 다른 시인들처럼 폼 잡지 않구 섰느냔 말이지.




너무나 평화로워서 책만 펴면 졸음이 쏟아졌던 고시원 생활도 뜻하지 않은 사건 하나로 접게 되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저녁밥을 사먹고 들어오는데 경찰차가 문 앞에 서있었고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귀동냥을 해보니 27호사는 아저씨가 죽었단다. 사인은 불분명하지만 뇌에 관련해서 무슨 발작이라 그랬다. 발작이라니. 방 안에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그래도 신경끄고 나몰라라 했던 사람들이, 몇 달을 같이 생활 하면서도 서로 말 한마디 않던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방의 번호로만 기억하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말이 많다는 게 왠지 소름이 끼쳤다. 27호를 지나칠 때마다 느끼는 서늘함도 싫고, 1년여의 한강고시원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수능은 점점 다가오고 해서 나는 부모님을 설득해 집으로 복귀했다. 

옥상에서 보았던 마지막 밤하늘을 기억한다.
불그스름하고 부연 하늘은 화려한 서울의 반영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건만, 내 머리는 뜻대로 지워주지 않았다. 
2001년 늦여름의 일이었다. 











이사를 가지 않아 요즘도 이따금씩 그 한강고시원 골목을 지나칠 때가 있다.
익숙한 그 골목을 지나치며 낡은 한강 고시원 간판과 건물을 올려다보면,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기억의 단편들이 순식간에 믹스되어 하나의 감정을 토해낸다. 


급성 발작으로 세상을 뜨신 27호 아저씨에게 명복을-
나이 서른다섯은 족히 되어 보이는데, 벽에 빼곡한 계획표와 가족들 사진을 보며 9급 공무원 시험을 열심히 준비하던 10호 아저씨. 지금쯤은 가족들에게 돌아가 어디에선가 나라의 녹을 받으며 잘 살고 있으려나. 얼굴에 ‘시골서 이제 막 상경했어요.’라고 써붙이고 다니던 여대 1년생 17호 누나. 지금쯤은 졸업해서 그 치열하다는 사회초년병이겠구나. 고등학교 2학년때 집을 나와 지금은 VIPS에서 일한다던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24호 형은 지금쯤 또 어느 아르바이트 전선을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그 청아한 경희대학교 관광정보학과 지망생은 지금쯤 관광가이드가 되어있을까.(혹시 주변에 01학번 여학생을 알고 계신분은 한강고시원 체류여부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주세요-농입니다.) 술에 절어 매일 시비가 붙었던 12호 권씨와 7호 아저씨. 지금쯤은 한강 고시원을 벗어나 작은 셋방이나마 번듯하게 독립했을까. 그 맞은 편 주택의 여중생은 지금쯤 고운 아가씨가 되어 있을까. 방황하는 바스켓맨 디카프리오를 보고 아무도 없는 새벽 세시를 틈타 옥상에서 몰래 하늘을 바라보며 수음하던 나는 지금쯤 여기서 그때를 회상하며 글을 쓴다. 



그러니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안풀리는 인생들도 있을거다.


‘지금쯤’은 말이다.






사실 우리네 사는 세상이란 그 음습하고, 가느다랗고, 무겁고, 질척거리는 공기를 마시고, 
좁아터진 공간에 서로의 방문을 걸어잠그고 사는 고시원과도 같은 곳이 아닐까. 
인생이라는게, 알고보면 자체로 고시考試가 아닐까. 


그런데 왜 그때의 우리는 그토록 외로워하면서도, 
서로의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피해야만 했을까.


서기 2000년 여름부터 2001년 여름까지 한강 고시원에 체류했던 
낙오 직전의 인생고시생人生考試生들이여. 
잊지말자. 


그 때의 우리는 너무도 비겁했다는 것을.


 

  
 
 
 
병장 박원홍 (2006/06/01 07:09:45)

고시원은 아니지만 대학시절 서울 올라가서 치열하게 하숙을 해본 사람으로써 너무도 가슴에 와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6/01 07:23:37)

잠시나마 고시원생활을 했던 사람으로 많은 공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병장 김동석 (2006/06/01 07:54:35)

감사히 읽었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01 08:15:53)

잘 읽었습니다.    
 
 
일병 김현동 (2006/06/01 08:16:55)

정말 잘 읽었습니다.    
 
 
상병 이영준 (2006/06/01 08:37:44)

좋은글, 감사합니다.    
 
 
상병 안대섭 (2006/06/01 09:06:08)

제 자취 생활은 완전 신선놀음이었군요. 
글 감사합니다.    
 
 
병장 김형진 (2006/06/01 09:18:56)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상병 조주현 (2006/06/01 09:47:53)

감사해요    
 
 
병장 이석현 (2006/06/01 10:23:08)

슬프디 슬픈 현실을 다시한번 곱씹어 보게 해주는 글이네요. 
'sometomes fact is straonger than fiction'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병장 박용태 (2006/06/01 14:41:59)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생각케 하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병장 박진우 (2006/06/01 18:05:36)

종민씨와는 이거 경쟁PT에서 언젠가 만나겠는걸요? 으히히.    
 
 
하사 윤석호 (2006/06/01 19:01:58)

잘 읽었습니다. 
언제 한번, 종민씨의 삶의 궤적을 그려볼 날이 왔음 좋겠네요. 
몇번의 오르막과 몇번의 내리막. 그 오름과 내림은 글을 통해 알수 있지만 
오르내림의 연결은 만남으로 알수 있기에 한번 뵈는것도 좋을것 같아요(웃음)    
 
 
병장 김희곤 (2006/06/01 19:43:53)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시원 생활을 조금 해봤지만 저런 우울함을 견딜 수 없어 뛰쳐 나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하긴. 이 글처럼 우울하지는 않은 정도였지만 그것조차도 견딜 수 없었답니다. 여전히 저는 어리고, 무서운가봐요.    
 
 
병장 박민수 (2006/06/02 10:07:05)

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병장 김태경 (2006/06/02 13:29:45)

독서실에 이은 고시원.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이청열 (2006/06/02 15:26:48)

잘 읽었어요!    
 
 
 병장 박진우 (2006/06/02 16:19:23)

명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글!    
 
 
상병 박종민 (2006/06/02 19:30:14)

칸막이 컴플렉스는 계속됩니다. 주욱. 
공감하기 어려운 소재가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이군요. 응원 고마워요. 

석호 / 언제 쯤이나 한 번 뵐 수 있을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웃음) 
희곤 / 저 역시 뛰쳐나갈 수 있었다면 진작에 뛰쳐나갔을 거에요. 

진우 / 경쟁PT에서 만난다는 건 경쟁 대행사로 만난다는 말인데, 
전 솔직히 진우씨 경쟁사에서 보기 두려운데. 같은 팀으로써 클라이언트들의 
트집세례를 방어해 내는 장면을 상상하는 편이 더 편하군요(웃음)    
 
 
상병 김동민 (2006/06/03 11:22:4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이재승 (2006/06/04 18:46:52)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하루정도 안암동에있는 모 고시원에서 체류아닌 체류를 했던 기억이있는데, 
저는 고시원 체류기 하면 거기 풍경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고시원은 어디나 다 음습하고 질척하나 봅니다(웃음) 
어휴 냄새~    
 
 
일병 최건영 (2006/06/15 11:38:12)

잘 읽었습니다. 
건조한 필체로, 깔끔하게 그려내신 것 같아요. 
글 만을 통해서 가슴 와닿는 색다른 경험을 했네요(저는 고시원 경험이 전무라..) 
그런데, 왜 갑자기 슬퍼지는 건가요? 
또 우리의 가슴아픈 부분을 드러내셨나봐요..흑-    
 
 
일병 김태균 (2006/06/15 14:23:32)

공감가는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이은호 (2006/06/19 18:14:38)

슬퍼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