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동네 뒷산에 올랐다. 뒷산 이라고 하니 어디 야트막한 동산 쯤으로 여겨질 법하지만, 이래 봬도 해발 500m. 어른 걸음으로도 꼬박 한 시간 이상은 걸어야 정상에 닿을 수 있는 산이다. 만 5세의 여자아이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여느 산처럼 초입은 완만하지만 중반을 넘어설 즈음부터는 경사가 가파르게 치솟는 탓에 완등이 가능하리라 생각치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산행을 제안했던 이유는, 그저 중턱 어디쯤 올라 벤치에 앉아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축이고는,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며 소박한 성취감 같은 것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이는 주저없이 내 제안을 수락했다. 요즘 아이는 마치 스탬프 투어라도 나선 듯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정복해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신선한 것들보다는 익숙하고 무던한 것들이 많아지는 나로써는 부러운 일이다.
늘 도시에서 지내온 아이에게 숲과 산은 그 자체로 신선한 공간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서너 걸음마다 한 번 씩 멈춰 서서는 무언가를 주의를 뺏기곤 했다. 발 밑에 떨어진 도토리를 집어들고는 이게 무어냐 묻더니, 곧 안이 궁금하다며 고사리 손으로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고는 무자비하게 내려찍었다. “도토리는 다람쥐가 먹는 밥 같은 거야” 라고 이야기를 해주니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도 들은 적이 있다며 유치원에서 들었을 다람쥐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기도 했다.
몇 걸음 더 가서는 쓰러져 있는 나무를 발견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작은 가지를 꺾으려 애를 쓴다. 혼자 힘으로는 무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도와달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온다. 가지를 꺾어 쥐어주자, 다른 등산객들처럼 지팡이 삼아 몇 걸음을 내디뎌본다. 하지만 지팡이로 삼기에는 너무 가늘었던 탓에 다시 가지를 돌려쥐고는 내 쪽으로 붕붕 휘둘러댄다. 평소처럼 으악 하고 단말마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악당 역할을 하고 있자니 아빠 그게 아니란다. 같이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칼싸움을 해야 된단다. 아이의 장단에 맞추어 대여섯 번 가지를 휘둘러 주고서야 다시 산행길을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몇 걸음도 채 못가서는 개미 떼의 행렬에 넋을 빼앗겼다. 말로는 “귀여워!” 를 외치며 감탄하다가도 이내 발로 슬며시 그들을 짓밟아보고 싶어 하는 그 복잡다단한 마음은 무엇일까.
이렇듯 쉬지 않고 새로운 발견을 해대는 탓에 산행은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나는 끊임없이 “이제 가자"며 아이의 주의를 되돌려야 했다. “갈 길이 아직 멀다"는 말로 재촉도 해보고, “저기까지만 가서 조금만 쉬자"는 회유도 해봤다. 그러다 무심코 “산 정상에는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있다"는 말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없는 말은 아니었다. 주말마다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고 올라와 정상에서 시원한 음료며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있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정상까지 오를 생각이 없었기에 이는 의도치 않은 실수였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아이의 목표는 명확해졌다. 정상에 올라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집 앞 편의점만 가도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는 그게 대체 뭐라고 아이는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비록 본인 소유의 돈이 없으니 아무때나 사먹을 수 없는 건 사실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빠, 우리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갈까?” 한 마디면 어렵지 않게 시원한 쭈쭈바 쯤은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는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 최단 경로를 탐색하는 것은 어른의 사고법이다. 아이는 그저 보상이 마음에 들면 이리저리 재는 법 없이 우다다다 달려간다.
완등 뒤에 있을 아이스크림이 썩 마음에 든 아이는 이제 산행 자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꽤 가파른 경사 앞에서도 내 손을 꼭 잡고서는 “할 쑤 이써, 할 쑤 이써"를 되내며 허벅지에 힘을 주고 나아갔다. “할 쑤 이써"는 얼마전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의 주문이라며 가르쳐준 말인데, 이젠 이렇게 산길에서도 써먹는다.
이제 나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말실수였다고는 하나 본의 아니게 아이스크림이라는 미끼를 내걸어 정상 등반이라는,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목표를 제시한 셈이 되어 버렸다. 혹시라도 오늘따라 아저씨가 몸이 안좋아 장사를 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퍼뜩 들었다. 옆에서 끊임없이 “할 쑤 이써"를 외치며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열혈 꼬마 등산객께서 마주칠지 모르는 텅 빈 정상에서 마주할 허탈함과 실망감을 떠올리니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결국 최악의 사태만은 피하고자 아이에게 다른 제안을 꺼냈다. 정상까지 가기에는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니, 이쯤에서 내려가자고.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을 한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부동의 “할 쑤 이써” 모드였다. 아이스크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사주겠다는 회유책도 꺼내봤지만 아이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도 포기를 위로받기 위한 보상보다는 처음 세운 목표를 그대로 이루고 얻어내는 보상이 더 값지다는 것을 알았던 걸까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치긴 했지만 이는 그저 딸바보 아빠의 호들갑스러운 사고일 것이다. 아이는 그저 아빠의 회유를 (내용을 충분히 검토해보지도 않고) 거절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점부터는 나도 숨이 찰 만큼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했고, 휴식이 점점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7살 짜리 아이에게 너무 고된 여정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고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포기하기도 애매해졌다.
결국 아이는 정상에 오르고야 말았다. 험한 경사에 여러 번 숨을 골라가며 쉬어가기도 했지만, 오가던 등산객마다 아이에게 감탄과 응원을 보냈고, 이를 동력삼아 아이는 끝내 등산로 끝에 있는 정자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있었다. 만사 다 제쳐두고 아이스 박스로 달려간 아이는 몇 개의 아이스크림을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메로나를 꺼내 들었고, 뿌듯함과 성취감을 토핑삼아 맛나게 핥아먹었다.
여기까지 보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목표를 달성하고야만 교훈적인 이야기고, 아이를 키우면서 으레 경험할 수 있을 법한 에피소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며칠이나 지나 글로 풀어보는 까닭은 일종의 회의감 비슷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고단함을 버티는 끈기를 배우도록 종용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끈기는 물론 인생에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이러한 덕목이 반드시 누군가의 조기 지도 없이는 얻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의 성장 과정 속에서, 필요에 따라 때로는 실패를 통해서도 이런 태도를 충분히 배워갈 수 있다.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당연하게 오늘을 희생해버리는 삶의 태도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는게 옳은 방향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달성해 보상을 만끽하는 순간은 달콤하다. 하지만 찰나와 같이 짧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달성치 못한 목표들이 천지빼까리로 널려있고, 오늘의 보상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고단하게도 페달을 밟아야 한다. 찰나라는 비유와 대비되도록 이러한 인고의 시간은 영원이라는 비유를 쓰고 싶을 만큼 길고,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태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땅을 사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지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과정이 즐거웠다면 보상이 작아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반대로 과정이 괴로웠다면 보상이 커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저 종착지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급행열차를 타는 여정은 온통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기억과 그것을 견뎌내던 지루함이라는 감정으로 남는다. 그보다는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길가의 도토리에 대해 아빠와 떠들고,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고, 낯선 곤충을 관찰하며 과정을 즐겁게 보낸 여정은 일상을 더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나는 그런 것들을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